카너먼의 마지막 결정
• 댓글 1개 보기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행동경제학의 대가"라고 불렸고,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기도 했지만, 경제학 과목은 수강해 본 적도 없는 심리학자였다. 심리학자가 경제학상을 받는 바람에 당시 큰 화제가 되었지만, 그의 의사결정(decision-making) 연구가 행동경제학에 미친 영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2011년에 발표한 'Thinking, Fast and Slow(한국어 판은 '생각에 관한 생각')'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을 만큼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1년 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는 뉴욕타임즈 부고 기사에는 다소 낯선 대목이 있었다. 카너먼의 파트너인 바버라 트버스키(Barbara Tversky)가 카너먼의 사망 장소가 어딘지 밝히기를 거부했다는 거다.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왜 굳이 사망한 곳을 알리지 않으려 할까?'하고 궁금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 1년이 지난 후 그 이유가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를 통해 밝혀졌다. 90세의 대니얼 카너먼은 스위스에 가서 의사조력자살(medically assisted suicide, "안락사")을 통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곳이 그가 살던 미국도, 그의 고향인 이스라엘도 아닌 스위스라고 하면 사람들이 의사조력자살을 떠올렸을 것이고, 큰 병이 없었던 그가 스위스에서 죽었다면...? 하고 생각하는 기자들이 온갖 추측 기사를 써냈을 거였다.
이 글은 안락사의 형태인 의사조력자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읽으시는 분께서 근래 들어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고 계신다면, 그래서 자살을 생각해 보셨다면 읽지 않으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자살에 대한 충동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대화를 나눌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1577-0199로 전화하시거나, 그 밖에도 이 링크에 도움을 받으실 수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처음 공개한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제이슨 츠바이크(Jason Zweig)는 한 때 그의 저술과 관련해 연구를 돕기도 하고, 카너먼이 앞서 말한 베스트셀러를 쓰고 있을 때 편집을 도와주기도 했던, 그의 오랜 친구다. 그래서 츠바이크가 쓴 글은 카너먼의 사망에 관한 탐문 형식의 기사가 아니라, 카너먼을 잘 아는 친구가 그가 마지막 결정을 내리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그의 생각을 추적하는 담담한 추모글에 가깝다. 그래서 제목도 '결정을 연구해 온 최고의 사상가가 내린 마지막 결정'이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카네먼은 스위스에서 의사조력자살을 하기로 결정하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마지막 이메일을 보냈다. 츠바이크는 그 이메일을 받지 못했지만, 그걸 받은 사람들이 전해줘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왜 곧바로 언론에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저는 제 선택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대중에 공개하는 선언처럼 만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 가족은 제 사망 원인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가능한 한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부고 기사(obituary)에서 그게 초점이 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은 사망 원인 이야기는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가족과 지인들이 그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카너먼은 왜 의사조력사를 선택하게 된 걸까?
그는 불치병의 말기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메일에서 자신은 "아직 활동적이고, (매일의 뉴스를 제외하면) 삶의 많은 것들을 즐기고 있다"면서, "지금 죽어도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다음에 나오는 대목이 그가 더 이상 살 생각이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러나 내 신장이 거의 다 망가진 상태이고,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빈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90세예요. 이제 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카너먼은 신장 투석기를 사용하고 있지도 않았고,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인지 능력이 감소했다거나,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심지어 세상을 떠나던 그 주까지도 연구 논문 몇 개를 진행하고 있었다. 쉽게 생각해서는 그에게 특별히 죽을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너먼의 파트너이자 스탠포드 대학교 명예교수인 바버라 트버스키는 카너먼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프랑스 파리에 가서 딸을 비롯한 가족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미술관에도 가고, 발레 공연도 보고, 맛있는 프랑스 음식도 먹고,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 있는 어린 시절 집도 가 보고, 좋은 날씨에 많이, 아주 많이 걸었단다.
그게 그의 마지막 며칠이었다.

츠바이크는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카너먼의 마지막은 그가 주장하던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사람이 특정 경험을 즐겁게 기억하거나,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것은 그 즐거움이나 고통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가 아니라, 그런 감정이 가장 강렬했던 순간(peak)과 마지막 순간(end)에 영향을 받는다. 가령 실험 도중에 똑같은 강도의 고통을 경험했다고 해도 가장 아플 때 실험이 종료된 참가자는 고통을 점차 누그러뜨린 후에 실험이 종료된 참가자보다 그 실험을 더 아팠던 것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카너먼은 자기가 평소에 하던 주장에 충실한 삶의 종료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가장 아름답게 끝나는 삶은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 될 것이니까. (아래 영상은 카너먼이 피크엔드 법칙을 설명하는 테드 토크)
카너먼이 지인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그의 선택과 관련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대목은 이거다. "저는 십 대 시절부터 인생 말년에 경험하는 비극과 수치(miseries and indignities)는 불필요하다고 믿어 왔습니다. 저는 그 믿음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노년에 있다면, 혹은 주위에 나이가 많은 사람을 아는 독자라면 카네먼이 하는 말이 뭔지 금방 이해할 거다. 사람들이 알츠하이머병처럼 사람의 인지 기능을 망가뜨리는 퇴행성 신경 질환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카너먼의 결정을 알게 된 가족과 지인 중에는 그의 생각을 바꾸려고 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를 설득하지 못했다. 특히 한 친구는 너무나 끈질기게 호소하는 바람에 카너먼이 이제 그만하라고 말해야 했단다. "행복한 삶을 왜 여기에서 끝내려느냐"는 게 친구들의 말이었지만, 건강이 완전히 망가져서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의 인생은 좋지 않은 경험을 마지막으로 끝나게 될 것이고, 이는 그의 피크엔드 법칙에 어긋날 것이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제가 생명을 더 이상 연장하는 게 의미 없을 때까지 살아있기를 바라지만, 저는 바로 그 단계에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급하게(premature) 세상을 떠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 결정을 듣고 어렵게 마음을 바꿔 제 생각을 지지해 준 몇몇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삶이 고통으로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성급하게" 죽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은 흥미롭다. 츠바이크는 이와 관련해서 카너먼의 친구이면서 결정이론을 연구한 애니 듀크(Annie Duke)의 책, '큇(Quit)'을 인용한다. 이 책의 부제 '포기할 때를 아는 힘(The Power of Knowing When to Walk Away)'를 생각한다면 카너먼은 포기할 때는 알았던 것 같지만, 츠바이크에 따르면 정작 저자 듀크는 친구 카너먼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성급한 결정처럼 '느껴지는' 것과 정말로 성급한 결정인 것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불치병 말기가 아니라면 나쁜 게 아닌데 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았을까요? 주위 사람들이 객관적인 의견을 제시한다면 왜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요? 도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요?" 듀크의 궁금증이다.
어쩌면 츠바이크가 자신의 글 서두에서 소개하는 카너먼의 연구가 그의 결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카너먼과 그의 동료 에이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 바버라 트버스키의 남편이었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가 했던—훗날 노벨상을 받게 되는—연구는 기존에 경제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관념, 즉 인간은 이성적인(rational) 존재이며, 필요한 정보를 바탕으로 일관성 있는 결정을 내린다는 생각을 뒤엎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네만은 인간이 비이성적(irrational)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신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이고, 쉽게 속으며—특히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경향이 있는데, 많은 경우, 그런 자기기만(self-delusion)은 사람을 지탱해 준다—일관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 카네만의 주장이었다.
카너먼은 인간이 이성적인 것도, 비이성적인 것도 아닌, 인간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믿었다는 게 츠바이크의 설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너먼이 자신의 피크엔드 법칙에 따라 내린 결론도 반드시 이성적인 결론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면 주위 사람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은 카너먼이 그런 선택을 할 때까지 겪고 있던 존재론적 고민을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카너먼과 같은 선택이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개인적인 선택은 아니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반론에도 한 번 귀를 기울여 보시길 바란다. 작년에 소개했던 '데이빗 브룩스의 반론'이 바로 그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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