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락사의 형태인 의사조력자살(medically assisted suicide)를 다루고 있습니다. 글 자체는 이성적이고 차분한 분석이고, 이런 형태의 죽음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읽으시는 분께서 근래 들어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고 계신다면, 그래서 자살을 생각해 보셨다면 읽지 않으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자살에 대한 충동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대화를 나눌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1577-0199로 전화하시거나, 그 밖에도 이 링크에 도움을 받으실 수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율성(자율적 의사결정)이라면 캐나다에서 의사조력자살이 크게 확대되는 추세는 비극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반가운 추세다. 죽음은 이제 더 이상 비자발적이고 비참한 삶의 끝이 아닌, 훌륭한 자기표현 방식이 될 수 있다. 2022년 말, 캐나다의 한 패션업체(La Maison Simon)는 의사조력자살을 선택한 37세의 여성에게 바치는 브랜딩 영상을 만들어 발표했다. (아래)

이 여성은 콜라겐 유전자의 이상으로 신체의 연결 조직이 약해지는 엘러스 단로스 증후군(Ehlers-Danlos syndrome)을 앓고 있었다. 이 여성이 세상을 떠난 다음 날 대중에 공개된 위의 영상은 "All Is Beauty (모든 것은 아름답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그의 죽음이 "가장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말하며, 별 다섯 개짜리 고급 리조트에서 인스타그램에 올릴 법한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다.

의사조력사(Medical Assistance in Dying, MAID)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2016년에 이미 예상했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죽음을 앞두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조력사를 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들의 경고는 오히려 약했다. 캐나다는 단 몇 년 만에 조력자살을 금하는 나라에서 조력자살의 기준이 세계에서 가장 느슨한 나라로 변했다.

사는 데 비애를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조력자살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가령 55세의 마이클 프레이저는 죽을병을 앓고 있지는 않지만, 보행장애가 있고, 간 질환과 요실금 등의 질환, 그리고–그 자신에 따르면 어린 시절 오래도록 지속된 학대의 결과로–정신 건강에 문제를 겪고 있다고 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장애인 지원 프로그램에서 매달 받는 지원금은 겨우 연명만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에게 치사량의 약물을 처방한 의사가 토론토스타 기자에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프레이저는) 빈곤의 사회적 측면, 사회 계층구조 같은 것이 자신의 정신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조력자살(MAID)이 캐나다 사회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 되면서 삶의 종말을 둘러싼 복잡한 도덕적 문제들은 서서히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조력자살의 허용 여부 결정은 실용적인 고려가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관료적인 맥락에서 내려진다. 퀘벡주의 의료 규제를 담당하는 퀘벡 의학교육협회Collège des médecins du Québec) 회장의 말에 따르면, 조력자살은 "정치적인 문제도, 도덕적, 종교적 문제도 아닌, 의학적인 문제"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물질주의적인 비용 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이 생명은 신성하다는 확신보다 더 중요하고, 사회경제적 부담이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타일러 던론 (이미지 출처: Orilliamatters)

37세의 타일러 던롭은 신체적으로 건강하지만, 조현정동장애(schizoaffective disorder)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직장도, 집도, 사회적 연결망도 없는 그는 지역 뉴스 매체와 했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의사조력사 얘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나한테는 미래가 없지 않나?' 하고 말이죠." 앞으로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의사조력사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는 거다. 뉴애틀랜티스에는 캐나다 MAID 자격 평가사와 서비스 공급자 협회가 발표한 슬라이드에는 한 은퇴한 평가사가 만난 한 커플은 의학적 문제가 아닌 빈곤과 주택문제를 프로그램 지원의 이유로 밝혔다는 내용이 나온다.

의료비 문제가 결정의 변수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AP 통신에 따르면 온타리오주의 한 병원에 입원했던 로저 폴리는 퇴행성 뇌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병원의 의료진이 조력사 얘기를 하도 자주 꺼내는 바람에 이들의 말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 병원의 윤리 책임자는 폴리에게 병원에 계속 남아 있으면 하루에 "1,500달러가 훌쩍 넘는" 돈이 들어간다고 했다. 그 말에 폴리가 나보고 죽으라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고 하자 그는 "로저, 이 결정은 제가 하는 게 아니에요. 말씀드린 것처럼 당신이 조력사에 관심이 있는지 여쭤보는 게 제 몫일 뿐입니다." (이 기사와 관련해 이 병원에서는 환자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특정 환자와 관련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으며, 환자가 먼저 관심을 보이기 전에 의료진이 조력사 이야기를 논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자율성에 기반한 자유주의

이런 흐름에도 캐나다 의회는 MAID 프로그램의 자격 조건을 강화하거나 다른 탈출구가 없어 조력사를 찾을 수 있는 환자들을 돕기 위한 의료 및 커뮤니티 서비스를 대폭 늘릴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반면 MAID의 자격은 곧 확대될 전망이다. 지난 2월 15일, 의회 위원회는 MAID 지원 자격을 확대하는 방안을 발표했는데, 그 방안을 보면 "죽음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성숙한 미성년자(mature minors)"가 새롭게 포함되었다. 이 문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엄한 죽음을 원하는 캐나다인들의 모임(Dying With Dignity Canada)'은 "성숙한 미성년자"를 "자신의 건강과 관련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12세 이상"으로 정의할 것을 권고했다. 캐나다는 2024년이면 공식적으로 정신 장애만으로도 MAID 프로그램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한 논의의 틀이 변화하고 있다. 이제 질문의 핵심은 더 이상 "고통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끝내는 것을 국가가 도와야 하는가?"가 아니다. MAID 프로그램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세워진 의학적 이유에 근거한 인한 조력자살과 그냥 자살을 가르는 선이 희미해지는 중이다. 도덕적 딜레마는 이거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보면 당신은 그를 말려야 하는가, 아니면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이 그의 선택임을 알고 오히려 도와주어야 하는가?

나는 캐나다를 콕 집어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캐나다에서 태어났고, 캐나다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미국에 비해 건강한 문화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국론 분열도 덜 심각하다. 그런데도 캐나다를 예로 드는 건 캐나다의 MAID 프로그램이 현대의 자유주의 가진 중요한 측면, 즉 자유주의가 다양한 색깔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 내재한 종류의 자유주의는 서구 사회에 널리 퍼진 것으로 소위 '자율성에 기반한(autonomy-based) 자유주의'다.

'존엄한 죽음을 원하는 캐나다인들의 모임' 같은 단체는 '권리'를 강조한다. (단체의 웹사이트)

자율성에 기반한 자유주의는 하나의 중요한 신념에 근거한다. 즉, 나는 내 자신의 주인이고, 나 자신은 나의 소유물(property)이라는 신념이다. 내가 소유권을 갖고 있으므로 내 소유물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처분할 수 있다. 나의 삶은 내가 만드는 프로젝트이고, 내게 하나뿐인 나의 삶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처분하라고 내게 말할 자격은 나 외에는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버전의 자유주의에 따르면 내 삶의 목적은 행복하게 사는 것, 즉 기쁨–이 기쁨의 정의 역시 내가 결정한다–이 고통보다 더 큰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겪는 고통이 내가 느끼는 기쁨보다 크다고 판단하면, 그리고 상황이 앞으로 절대 나아질 수 없다고 판단하면, 내 삶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을 끝낼 권리가 있고, 국가는 내가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막을 권한이 없다. 국가는 내가 나의 삶을 존엄하게 끝낼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따라서 자율성에 기반한 자유주의를 따른다면 의사조력사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선물에 기반한 자유주의

하지만 또 다른 버전의 자유주의가 있다. 이를 '선물에 기반한 자유주의(gifts-based liberalism)'라 부르기로 하자. 이 자유주의가 가진 신념은 다르다. 나는 선물을 받은 사람이고, 대대로 길게 이어져 온 인류의 한 부분이라는 신념이다. 나는 내 앞서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았다. 나의 삶(생명)도 그렇게 받은 선물 중 하나다. 따라서 인생의 핵심적인 활동은 개인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내가 나의 선조들에게서 받은 선물들을 깨닫고, 이를 적절하게 더 개선해서 내 뒤에 올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데이빗 브룩스 (이미지 출처: New York Magazine)

선물에 기반한 자유주의자들은 자율성에 기반한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선택을 즐기지만, 그들의 선택은 우리가 받은 선물이라는 틀, 그러한 선물이 수반하는 타인에 대한 책임이라는 틀 안에서 이뤄진다. (선택권에 대한 이런 이해가 있다면 미국에서 임신중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양극단의 주장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 신체의 자율성에 기반한 절대적인 임시중지권이나 개인적인 상황이나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는 무조건적인 금지 둘 다 동의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단순한 개인이나 소유권자가 아니라 시민이고 가족의 일원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그리고 우리 후에 올 사람들에게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런 의무 중 많은 것들이 알고 보면 우리에게는 기쁨의 원천이 된다. 건강한 사회는 구성원들이 이런 의무를 수행하도록 준비하고,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돕는 법을 통과시킨다. 반면 병든 사회는 이런 의무를 저버리는 것을 쉽게 하는 법을 통과시킨다.

나는 선물에 기반한 자유주의가 자율성에 기반한 자유주의보다 더 나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해 더 정확한 일련의 가정에 기반하고 있으며, 인간적인 삶의 방식과 건강한 사회로 인도한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납득시켜 보려 한다.


'데이빗 브룩스의 반론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