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영화
• 댓글 남기기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의 신작이자 '아바타(Avatar)'의 2편인 '아바타: 물의 길(Avatar: The Way of Water)가 지난주에 미국에서 개봉작 수익으로 역대 10위를 기록하며 '어벤져스(Avengers)를 제쳤다.
더 중요한 건 세계 시장의 기록이다. 2월 4일 기준으로 역대 흥행작 4위를 기록했다. 3위인 '타이타닉'이 세운 기록을 깨지는 못할 것 같다는 보도가 나오기는 하지만 사실 '타이타닉' 역시 카메론 감독의 작품이고, 이 차트에서 부동의 1위 역시 그의 전작 '아바타'다. 카메론 감독은 역대 흥행작 순위 5위에 안에 3개의 작품을 넣은 엄청난 일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온라인에서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영화를 봤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꼭 보라고 추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영화가 왜 좋은지 설명하는 사람도 없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이나 대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더 찾기 힘들다. 세계 영화 시장을 휩쓸고 있는 작품인데 아무도 얘기를 하지 않는다.
이게 이상하지 않다면 '탑건: 매버릭(Top Gun: Maverick)'이 작년에 개봉되었을 때 전 세계적으로 온오프라인에서 얼마나 큰 바이럴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라. 주인공 역을 맡은 톰 크루즈에 대한 찬사는 물론이고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F-14 톰캣이 귀환하는 장면을 두고 벌어진 밀덕들의 즐거운 토론까지, 이 영화는 아주 많은 대화를 끌어냈다. 글로벌 흥행 기록 10위권 밖(12위를 기록했다)에 있는 영화가 이만큼 화제가 되었는데 무려 4위를 기록하고 있는 '아바타: 물의 길'은 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이 작품의 소리 소문 없는 흥행은 뜻밖의 일이 아니고, 업계에서는 이런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 카메론의 전작 '아바타'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영화는 세계 기록을 세웠지만 지난 10여 년간 아무도 '아바타'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바타'의 속편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던 2019년에 콜라이더(Collider)에는 'Avatar: The Biggest Movie Franchise Nobody Talks About (아바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세계 최대의 영화 프랜차이즈)라는 기사가 실렸다. 세계 영화사에 기록을 세운 전작 '아바타'가 나온 지 10년이 되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신기한 현상을 설명하려는 기사였다. 그 글을 쓴 톰 레이먼은 21세기의 영화 시장에서 과거에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영화가 흥행 기록을 세우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지적했다. 요즘 극장에서 영화가 흥행하기 위해서는 관객들이 이미 배경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슈퍼 히어로물의 속편이어야 한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2009년의 '아바타'는 그런 공식을 깨고 요즘의 마블 수퍼 히어로물도 넘지 못하는 기록을 세웠다는 것이다.
물론 온라인에서 많이 이야기되고 바이럴이 되는 게 반드시 흥행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가령 영화에서 온 인기 있는 밈(meme)이지만 아무도 그 출처를 모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요즘 일어나는 바이럴 중에는 광고주와 손을 잡은 플랫폼, 인플루언서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것들도 많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많은 관객이 봤는데 아무도 영화 속의 장면이나 대사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신기하게 생각했고, 이 현상을 분석한 글이 제법 많이 나왔다. 그중 어느 하나가 정답을 갖고 있다기 보다는 나름 설득력이 있는 주장들이라서 몇 개를 소개해본다.
1. 궁극의 놀이공원
지난해 말 뉴욕타임즈매거진은 '아바타와 사라지는 블록버스터의 미스테리'라는 기사(아래 링크)를 게재하면서 위에서 제기된 궁금증을 풀어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다지 신선한 시각을 담은 글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얘기가 나온다. 글을 쓴 제이미 로렌 카일레스는 가장 어린 밀레니얼, 혹은 가장 나이가 많은 Z세대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아바타'가 처음 나온 2009년에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궁금증을 풀어 보려는 (그리고 그걸 기사로 쓰려는) 마음에 어느 호텔 방에서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로 2009년에 만들어진 '아바타'를 처음 봤다고 한다.
보고 난 후의 소감은? 그가 들었던 악평이 모두 사실이었다. 흔한 플롯(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에,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뻔한 대사였다. 너무나 진부한 영화였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세계 1위를 했다면 인류 전체가 망상(delusion)에 빠진 것이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남들이 모두 좋아하는 걸 자신만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작 '아바타: 물의 길' 개봉을 앞두고 재개봉한 전작을 3D 영화관에서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영화 속 나비(Na'vi) 족의 움직임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어느 부분이 그래픽이고 어느 부분이 실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시각적 완성도가 높았고, 몰입감이 뛰어났다. 기자는 영화가 주는 착시현상(illusion)이 20세기 사람들이나 감탄하던 기술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21세기에 영화를 보며 그렇게 느낄 줄은 몰랐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콜라이더의 기사를 쓴 레이먼은 '아바타'를 본 사람들이 훗날 이 영화의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건 마치 놀이공원에서 즐겼던 롤러코스터를 기억하려는 것과 같다. 롤러코스터의 핵심은 타는 경험이지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나중에 블루레이 DVD로 나와서도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는 경험을 집에서 할 수는 없다."
흥미로운 건, 플로리다에 위치한 디즈니 월드에 아바타를 주제로 한 놀이공원 '판도라(Pandora: The World of Avatar)가 있다는 사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가령 해리포터 놀이공원 등과는 달리) 영화의 내용과 무관하게 영화 속에 등장한 자연환경을 경험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이 영화와 관련해서 이야기는 철저하게 무시된다.
놀이공원에서 느낀 즐거움을 글로 전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사람들은 그저 "꼭 가봐"라고 추천하는 게 전부다. '아바타'를 본 사람들이 꼭 극장에서 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입소문이 퍼지고 영화가 큰 인기를 끌어도 문화적인 임팩트는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옛날 방식의 성공
문화적 임팩트(cultural impact)라는 측면에서 가장 흥미 있는 글은 복스(Vox)의 알렉스 아바드산토스가 쓴 기사. 이 기사에서는 인기 영화들이 누리는 문화적 임팩트, 혹은 적합성(relevance)에 의문을 제기한다.
위에서 광고주와 플랫폼이 바이럴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요즘 히트작들은 철저한 공식을 따른다. 거의 예외 없이 전작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그 뒤를 잇는 속편이기 때문에 개봉을 앞두고 전작을 넷플릭스 등의 스트리밍을 통해 재공개해서 '복습'을 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개봉까지는 1년 넘게 남은 작품의 예고편(트레일러)을 유튜브에, 그것도 차례대로 여러 편 공개하면서 관객의 관심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려 애쓴다. 이렇게 해서 온라인에 버즈(buzz)가 일어난다면, 그것을 얼마나 문화적 임팩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홍보이고, 어디서부터가 문화적 현상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복스의 기사는 현재 헐리우드의 영화산업이라는 문맥에서 문화적 적합성이라는 것은 과거와 달리 2008년 이후 마블이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USC 영화학 교수인 J.D. 코너의 말을 빌려 '아바타'는 그런 의미에서 '에일리언'이나 '혹성탈출'과 같은 옛날식 프랜차이즈라고 설명한다. 이런 옛날식 프랜차이즈 영화의 특징은 영화 그 자체가 매력 요소이고, 종점(endpoint)이지, 장난감과 게임 등으로 끊임없이 돈벌이 요소를 확장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아바드산토스는 '만약 문화적 임팩트라는 것이 이렇게 마블 같은 영화 스튜디오들이 돈벌이를 위해 만들어낸 자본주의적 착시현상에 불과하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블 영화들의 관객과 달리 '아바타'의 관객이 영화를 즐기고 나서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영화의 가치가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닐 수 있다.
3. 내러티브 마찰율
물론 모든 영화들이 마블처럼 마케팅을 통해 문화적 임팩트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고,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가 항상 진부한 스토리에 시청 경험만으로 돈을 번 것도 아니다. 그가 만든 '타이타닉'은 전 세계적인 인기와 더불어 문화 현상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터미네이터'와 '에일리언' 시리즈는 상업적 성공은 물론이고 수많은 (당시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 밈을 탄생시킨 작품이다. 그런데 왜 카메론 감독은 유독 '아바타' 시리즈에서는 진부하고 눈에 띄지 않는 스토리와 대사로 일관했을까?
'아바타'의 팬 중에는 영화의 스토리가 진부하다는 비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플롯이 1990년 영화 '늑대와 춤을 (Dances with Wolves)'의 플롯과 비교해보라. 원주민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세력의 일원이었던 남자가 원주민 여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그들의 편에서 자신이 한때 속했던 침입자들에 맞서 싸운다는 플롯은 헐리우드에서도 가장 흔한 얘기다. '늑대와 춤을'과 같은 해에 나온 '토탈리콜(Total Recall)'도 똑같은 플롯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래 영상은 '정직한 예고편(Honest Trailers)'라는 유튜브 채널인데 '토탈리콜'편의 3:00 지점에서 나오는 '아바타'와의 유사점 설명을 보면 플롯의 작은 디테일까지 똑같다.)
원주민의 문화를 이해하는 백인 남성이 침략자의 지위를 떠나 원주민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스토리는 너무나 흔해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2006년 작 '블러드 다이아몬드 (Blood Diamond)'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흑인 편에 선 백인이었고, 무려 1962년에 나온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에서는 피터 오툴이 아랍인들 편에 선 영국인으로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원작은 1926년에 나온 책이다. (참고: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아바타에 미친 영향'이라는 기사)
물론 백인 남성과 원주민 여성의 사랑 이야기라면 '포카혼타스'를 빼놓을 수 없다. 1995년에 나온 디즈니 만화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1600년대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백인 남성의 원주민 구원 판타지는 이렇게 뿌리가 깊다.
플롯이 하도 복잡해서 관객의 대부분이 영화를 이해한 척 한다는 농담까지 나오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과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 카메론이지만,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그가 굳이 이렇게 익숙하고 흔해 빠진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는 박스오피스의 결과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영화 '탑건: 매버릭'이 벌어들인 금액을 (미국) 국내와 해외로 나눠보면 약 50:50의 비율이다. 꽤 단순한 스토리라인과 톰 크루즈라는 세계적인 스타를 동원했을 때 얻어낸 성과다. 하지만 '아바타: 물의 길'의 경우 해외 수익이 70~75%를 차지한다. '매버릭'이 12위, '물의 길'이 4위를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너 교수는 카메론 감독의 영화가 "마찰이 없다(frictionless)"라고 표현한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간결함이 흥행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쉽다고 모든 영화가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렇게 초대형 작품일 경우, 특히 시각적인 즐거움이 흥행 포인트인 영화에서 신경을 써야 이해할 수 있는 플롯은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friction) 되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 결과,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단순히 관람을 권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무도 '아바타'의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입장료 수익만으로도 기록을 세울 수 있다면 굳이 마블과 같은 스토리라인을 만들 필요도, 밈을 뽑아낼 대사나 액션 피규어를 만들기에 좋은 캐릭터를 만드는 데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는 게 제임스 카메론 브랜드의 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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