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읽게 된 문서 하나가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문서는 영국의 의회에서 작성한 보고서로, 영국의 탄광과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의 증언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령, 사라 구더(Sarah Gooder)라는 8살짜리 여자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새벽 3, 4시에 갱도에 들어가서 (오후) 5시 반에 나와요. 저는 잠을 안 자요. 불이 있어 앞을 볼 수 있을 때는 노래도 부르지만, 캄캄한 곳에서 일할 때는 무서워요." 교회 주일학교에서 글을 배우고, 기도도 배웠다는 사라는 탄광 대신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이사벨라 리드(Isabella Read)라는 12살짜리 여자아이는 몸을 많이 구부려야 이동할 수 있고, 갱도 내에서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물을 건너야 하는 일이 많은데, 여름에는 숨을 쉬기 힘들다고 했다. (이 보고서에 들어간 아이들의 증언은 여기에서 몇 개 읽어 볼 수 있다.)

디킨스는 이 보고서 속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증언을 읽으려 하지 않을 것임을 안 디킨스는 영국의 사회 문제를 소설로 써야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탄광에서 일하던 영국 어린이들의 모습 (이미지 출처: Wikipedia)

원래 불면증이 심했던 디킨스는 런던의 밤거리를 몇 시간씩 걷곤 했다.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런던은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한 데 섞여 살고 있었고, 1840년대 유럽을 휩쓴 대기근이 시작되기 직전이었지만 벌써부터 아일랜드에서 배고픈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인구과밀이 극심한 상태였다. 당시 뉴욕 등의 다른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런던의 길거리는 말똥으로 가득해 악취를 풍겼다. 런던에는 아직 하수구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물과 오수는 길거리와 강에 넘쳐났다. 그런 환경에 도시 빈민이 살고 있었고, 특히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한겨울에도 넝마 수준의 옷을 입고 떨며 지냈다.

이런 아이들은 동물처럼 매를 맞으며 사고의 위험 노출된 위험한 노동에 투입된 거다. 디킨스는 가난한 아이들의 삶을 고발하는 이야기를 써서 1849년 크리스마스에 맞춰 내놓고 싶었다. 하지만 출판사가 보기에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쓰면 팔기 힘들 게 분명했기 때문에 디킨스의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디킨스는 출판사의 의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분노를 세상에 꼭 알리고 싶었고, 책을 쓰기 시작한 지 6주 만에 탈고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주인공이 오래전에 죽은 친구의 유령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출판사는 이 책이 실패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디킨스는 이미 빚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돈을 투자해 초판 6,000부를 인쇄했다.

이제 독자들의 반응을 기다려야 했다.

7년 전에 죽은 친구 제이콥 말리의 유령을 본 에베네저 스크루지 (이미지 출처: The History Press)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843년 12월 19일에 서점에 깔렸는데, 단 며칠 만에 초판이 모두 팔린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인기는 런던과 영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지금은 크리스마스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이 들어 본,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867년, 디킨스는 두 번째 미국을 방문한다. (디킨스가 그렇게 혐오했던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북전쟁은 1865년에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 디킨스는 워싱턴 D.C.부터 뉴욕, 보스턴을 거쳐 최북단의 메인주까지 동부의 도시들을 방문하며 지금의 북토크와 비슷한 강독회를 개최하며 독자들을 만났다.

강독회 표를 구하기 위해 독자들이 길에 줄을 서서 밤을 새웠고,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암표를 샀는데, 암표가 당시 돈으로 50달러(현재 가치로 1,000달러 이상)에 거래되기도 했다. 심지어 디킨스의 사진까지 팔렸다고 하니 요즘 팝 아티스트의 콘서트를 연상시키는 인기였다.

디킨스는 이 책의 성공으로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자기 아이들을 굶기고 싶지 않은 마음도 간절했고, 자기 돈을 투자했을 만큼 책의 성공을 믿었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이루어져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도—어쩌면 그의 기대 이상으로—잘 전달되었던 것 같다. 그가 보스턴에서 열었던 강독회의 청중 중에는 멀리 시카고에서 온 사람이 있었다. 공장주였던 그 사람은 디킨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스크루지가 유령들을 만난 후에 얻은 깨달음과 비슷한 경험을 했고, 시카고로 돌아가 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크리스마스를 쉬는 날로 선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에 스크루지가 했던 것처럼, 자기 종업원들에게 매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칠면조를 한 마리씩 선물했다.

강독회에서 이야기하는 찰스 디킨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우연이겠지만, 크리스마스 카드가 처음 판매된 것은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초판이 나온 1843년이었고, 미국 백화점에서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원하는 선물을 들어주는 '백화점 산타'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이었다. 따라서 1867년, 디킨스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그 역시 중요한 문화적 상품이 된 셈이다.

"찰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를 발명했다"라는 말이 퍼진 건 어쩌면 이렇게 현대적 의미의 크리스마스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었던 시점이 '크리스마스 캐럴'의 출판과 겹쳤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매뉴얼처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가족과 친구, 무엇보다 자기 주위에 '스크루지 삼촌'처럼 외롭게 지내는 사람을 초대해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선물을 나누는 것이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지내는 법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디킨스는 1867년 미국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듬해인 1868년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강연회에서 올린 수익이 너무 커서 세금 징수원이 그가 미국에서 번 돈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항구까지 쫓아왔지만, 그가 탄 배가 출발한 직후였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지 2년 후인 1870년, 5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찰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난 지 2주 후, 미국 정부가 크리스마스를 연방 휴일로 선포하면서 크리스마스는 모든 노동자가 쉴 수 있는 공식 휴일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캐럴(노래)도 그즈음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니, 우리가 아는 크리스마스의 이미지는 그때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따라 이웃과 선물과 음식을 나누며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모습을 보는 디킨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히 기뻤겠지만, 한편으로는 회의적인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고 한다. 일 년 중 하루에 종업원들에게 칠면조를 선물하고, 이웃을 초대하는 건 좋지만, 나머지 364일은 누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줄까? 크리스마스 때 좋은 일을 한다고 사회가 정말로 나아질까? 이게 그가 크리스마스의 유행을 전적으로 좋아하지 못했던 이유다.

찰스 디킨스의 후손이자 디킨스 연구자인 루신다 디킨스 호킨스는 이렇게 말한다. "스크루지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 잘 살아있습니다. 빈민 아동들도 여전히 많고, 부의 불평등 문제도 심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모두가 스크루지죠. 우리 모두는 주변을 둘러 보고, 무엇을 바꿔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

자기 무덤을 발견하고 우는 스크루지 (이미지 출처: MeisterDruc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