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와 관련해서 영미권 사람들이 종종 하는 질문이 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크리스마스를 만들어냈다는 게 사실이냐?"는 것. 물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이라는 크리스마스의 기원을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다. 많은 현대인이 즐기는 크리스마스라는 '명절'이 사실은 디킨스가 만들어 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 주장의 효시는 영문학에서 찰스 디킨스 연구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F.G. 키튼(Kitton)이 1903년에 발표한 논문 "크리스마스를 '발명한' 남자(The Man Who 'Invented' Christmas)"에서 찾을 수 있다. 키튼은 디킨스가 1843년에 발표한 유명한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Christmas Carol)'이 현대인이 생각하는 크리스마스를 탄생시켰다고 말한다. 크리스마스는 그 소설이 나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지키는 날이었지만,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이미지, 즉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감사와 선물을 나누고, 함께 식사하는 카드 속 따뜻한 모습은 디킨스에서 시작되었다는 거다.

키튼의 주장은 얼마나 사실일까?

이런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이미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Design Bundles)

크리스마스는 유럽에서 오래된 전통이고, 학자들에 따르면 그 전통이 기독교가 유럽에 전해지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winter solstice)를 지키는 전통이 있는데, 유럽에서는 이런 전통이 기독교가 전래한 후로 사라지지 않고, '예수의 생일'로 둔갑해서 크리스마스가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은 예수가 봄에 태어났다고 생각했고, 정확한 날짜를 확인할 근거는 없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오기 전에도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며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집을 환하게 밝히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칠면조와 소고기 요리를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전통이 있던 영국에서도 찰스 디킨스가 태어나 자라던 시점이 되면 크리스마스의 인기는 줄어들고 있었고, 옛날 사람들이 즐기던 날 정도로 취급되었다. 휴일도 아니었으니,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날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다면 디킨스는 왜,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재발명"하게 되었을까? 그 과정을 잘 설명한 것이 NPR의 스루라인(Throughline)이 방송한 "When Christmas Went Viral (크리스마스가 바이럴 되었을 때)"이라는 에피소드다. 아래는 라디오극처럼 구성된 이 에피소드를 읽기 쉽게 요약, 재구성하고, 설명을 붙인 것이다.


찰스 디킨스(1812~1870)가 활동한 시대를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임기(1837~1901)라는 의미로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라고 부른다. 밖에서 보면 막강한 대영제국의 시대였지만, 영국 안에서는 산업혁명이 끝난 후 극심한 빈부격차와 비참한 노동 환경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다. 증기기관의 도입으로 공업은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힘과 속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노동시간은 하루 12시간에 달했다. 기업가의 이윤이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참고로, 카를 마르크스가 자신이 대표작인 '자본론'을 이 시기에 망명자로 머물던 런던에 머물면서 썼다.)

찰스의 부모는 중산층이었지만, 돈 씀씀이가 헤프고 경제관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큰 빚을 지게 되었고, 결국 그의 아버지는 당시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이 가게 되는 채무자 감옥(debtor's prison)에 보내졌다. 찰스가 12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감옥에 간 후로 집세도 내지 못하게 되자, 결국 어머니는 찰스를 포함한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감옥에 들어가서 살아야 했다.

그의 기억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사건이었다.

18, 19세기의 채무자 감옥을 설명하는 영상

등록금도 내지 못하게 되니 학교에서도 쫓겨난 찰스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일하는 흑색 도료(blacking, 구두약 제조 등에 사용하는 물감) 제조 공장에 들어가 밤낮으로 일했다. 그는 그렇게 일하면서도 제대로 먹지 못해 항상 배고픈 상태로 길거리를 배회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여차하면 떠돌이나 도둑이 될 수도 있었다"고 했다. 그가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같은 소설에서 묘사한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기가 겪은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다.

영어권에서 종종 듣게 되는 Dickensian이라는 형용사는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이라는 의미인데, 불평등한 사회와 열악한 노동, 노숙자, 배고픈 아이들을 묘사할 때 사용될 만큼 그의 소설들은 당시 영국인들의 비참한 생활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디킨스는 어떻게 작가의 길에 들어섰을까?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é)가 그린 1860년대 런던의 아이들 (이미지 출처: Seven Dials Covent Garden)

당시 영국에서는 대량 인쇄 기술의 발전으로 신문과 잡지의 값이 싸졌고, 그 결과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있었다. 글이 많이 유통되니 글을 쓸 수 있는 작가, 기자가 더 많이 필요했다. 넷플릭스의 인기가 폭발하면서 영화 제작자의 몸값이 치솟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공장 노동에 진력이 난 디킨스는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글을 써서 먹고사는 저널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십 대 후반의 일이다.

처음에는 프리랜서로 글을 썼다. 속기법을 배워 일감을 찾았고, 저널리스트로서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에 관한 글을 썼다. 영국 의회의 의원들은 물론이고, 마차를 모는 마부와 슬럼가에 사는 주민들, 병원에 입원한 환자, 심지어 교도소 죄수들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취재했다. 헤밍웨이를 비롯한 훗날의 많은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계를 위해 기사를 쓰면서 남는 시간에 단편 소설을 함께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기 본명을 숨기고 필명인 보즈(Boz, 동생의 별명)를 사용해 "보즈의 스케치(Sketches by Boz)"라는 시리즈를 썼다. 런던에 사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이 글들은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슬픈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찰스 디킨스의 후손이자 디킨스 연구자인 루신다 디킨스 헉슬리(Lucinda Dickens Hawksley)는 그의 초기 글은 지금으로 말하면 '관찰 코미디(observational comedy)'를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이야기와 비슷해서, 대중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소재로 삼은 이야기들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다가 쓴 장편 소설이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였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초판본 저자는 디킨스의 필명인 '보즈'로 표기되어 있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그 후 찰스 디킨스라는 본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이 서른이 될 무렵이면 영국을 넘어 미국에서도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루신다 헉슬리는 찰스 디킨스가 누린 엄청난 인기의 비결로 다양한 계층의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을 꼽는다. 당시 많은 영국의 작가들이 상류층의 이야기를 쓴 반면, 디킨스는 귀족부터 도시의 청소 노동자까지, 누구나 자기와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을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자기 소설이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찰스 디킨스는 서른 살이 되던 1842년, 미국을 방문하기로 한다. (참고로, 이때는 디킨스보다 3살 많았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아직 일리노이에서 주의원을 하던 시점이다. 영국에서는 노예제도의 폐지가 완료된 시점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던 남부와 이를 폐지한 북부 사이의 갈등이 커지고 있었다.)

디킨스는 미국 방문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왕정을 유지하던 영국과 달리 대통령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실험을 하고 있던 미국이야말로 영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한 후 그의 환상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책과 함께 미국에서 인기를 끈 찰스 디킨스 초상화. 이 그림을 통해 미국인들은 디킨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National Portrait Gallery)

디킨스는 "미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중에 자기만큼 (미국이라는) 공화국에 큰 믿음을 가졌던 사람도 없었을 것"이라며 좋아했지만, 그곳에서 그는 미국인들이 심각하게 물질주의에 빠져 있고, 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예의를 모르고 무례해서, 그가 길을 걷고 있으면 유명인인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지려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가 묵는 방 창문으로 고개를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단다. 그가 목격한 미국의 정치인들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언론을 동원하는 비겁한 방법을 사용했고, 언론인들은 돈을 받고 그런 글을 써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건 흑인들이 받는 차별이었다. 이미 노예제를 폐지한 필라델피아 같은 도시에서도 감옥에서는 흑인과 백인을 완전히 다르게 취급하는 것을 봤고, 버지니아주 리치먼드(가장 큰 노예 시장이 있던 곳으로, 훗날 남북 전쟁 때 남부 연합의 수도가 된다)에서는 기차역에서 백인 노예주들이 흑인 가족을 나눠서 매매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남편, 아버지와 생이별하면서 통곡하는 흑인 가족을 본 그는 "내가 흑인 노예가 흔들어 주는 요람에서 자라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썼다.  

그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미국 노트(American Notes)'라는 책으로 출간했지만, 그 책으로 미국 독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출간한 소설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경제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디킨스에게는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즉 가난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났다. 가장으로서 아내와 네 명의 아이를 부양해야 했던 디킨스에게 다음 책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아이들이 자기의 어린 시절처럼 굶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다음 책은 무슨 일이 있어도 흥행에 성공해야 했다.

그런데 디킨스가 선택한 주제는... 출판사가 보기에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리스마스를 발명한 남자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