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r From Over
• 댓글 남기기우크라이나 전쟁만큼 전 세계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끄는 전쟁이 또 있었을까? 사람들은 선과 악이 분명한 전쟁에 관심이 많고,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 힘든 분쟁을 들여다보는 것을 귀찮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먼저 공격받지 않았음에도 침공을 한 주체가 분명한 전쟁이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더 많은 수의 세계인들이 여기에 동의한다.
게다가 이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인기 있는 구도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약한 쪽을 응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연구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문가들조차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가 며칠 만에 승리할 거라고 예측했을 만큼 우열이 분명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강력한 저항으로 강자를 밀어붙이는 모습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게 된 거다. 물론 러시아와 러시아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러시아를 더 강한 서구 국가들에 맞서 싸우는 다윗으로 인식한다. 두 나라가 모두 스스로를 약자, 피해자로 생각하는 건 아이러니이지만, 정당성을 부여받고 싶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이제 우크라이나가 군사적으로 약체라고 하기는 힘들다. 미국과 서유럽의 나라들이 제공하고 있는 첨단 무기들은 개전 초기부터 오래되고 정비가 불량한 러시아의 장비와 무기 앞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서구 국가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재블린과 스팅어 미사일처럼 방어에 유리한 휴대용 중화기를 제공했고, 전쟁이 장기화하고 러시아가 빼앗은 지역을 지키는 구도로 바뀌자 M777 곡사포,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 하이마스)와 같은 대형 무기를 공급하면서 공격을 돕고 있다.
그 효과는 분명하다. 9월에 들어오면서 우크라이나가 북부 하르키우(Kharkiv) 지역에서 보인 놀라운 성과가 좋은 예. 아래 지도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러시아가 지난 5개월 동안 빼앗은 땅보다 우크라이나가 9월에 들어와 1주일 동안 되찾은 면적이 더 크다. 우크라이나군은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국경까지 진격했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진격해오는 우크라이나 군대에 놀라 전혀 물건도 챙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옷가지와 편지 따위가 널브러져 있고, 탄약과 탱크 같은 군장비가 고스란히 남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무기 공급처"라는 농담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장비에 칠해진 식별기호 Z를 페인트로 지우고 그 위에 자국군의 기호를 그려서 사용하고 있다.
젤렌스키와 미국, 영국의 참모들
원래 서방 언론에서 예측하고 기다리던 우크라이나의 대대적인 반격(counteroffensive)은 남부 헤르손(Kherson)을 향한 진격이었다. 남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헤르손을 되찾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계산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큰 성과는 북부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두고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습격한다) 전략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헤르손을 공략할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준비가 안된 북부에 화력을 집중해서 영토를 회복했다는 거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이번 작전과 관련해서 직접 브리핑을 받은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서 이번 작전은 성동격서(feint, diversion)가 아니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군은 남부에서 헤르손 지역을 실제로 강하게 공격했고, 그 결과로 러시아가 그 지역에 사는 러시아 지지자들을 상대로 시행하려던 관제 주민투표를 연기하게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만 러시아의 화력이 남부에 더욱 집중되어 있고, 남부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경험이 많은 병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크게 눈에 띄는 성과가 나지 않은 것뿐이다.
위의 기사는 우크라이나의 성공적인 반격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우선 이번 반격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장군들에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을 밀어낼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극적인 전기("a dramatic move")를 마련하라고 명령하면서 그 구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 생각한 것은 남부 헤르손을 수복하고 헤르손과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빼앗은 마리우폴(Mariupol)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장군들은 이 계획을 미국, 영국의 국방부 관료들과 상의했고, 요청을 받은 미국과 영국은 남부 공략 계획을 가지고 시뮬레이션(이를 흔히 'war game'이라 부른다)을 해봤다고 한다.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군에 너무나 많은 피해가 날 뿐 아니라 성공하기 힘들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이유는 러시아군의 핵심 전력이 남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가 남부를 노릴 것을 예상하고 이 지역의 방어를 강화해 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하던 중 러시아군의 상황을 살피다가 북부에 주둔한 군대의 사기가 (여러 가지 이유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숫자만 보면 만만치 않지만 공격을 시작하면 쉽게 무너질(brittle) 지역들이 보였다고 한다. 그런 판단 하에 헤르손을 향한 단일 공격보다는 헤르손과 하르키우 두 곳을 동시에 공격하는 작전으로 다시 시뮬레이션을 했더니 "크고 확실한 승리(a big, clear victory)"를 거둘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고, 이 작전을 실행하기로 3국 군사 전문가들이 동의했다는 것이다.
성과의 지속 여부
하지만 이 작전에는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미국에서 이를 위해 엄청난 무기 지원을 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이를 위해 우크라이나군에서는 미국에 필요한 무기들을 세세하게 나열한 리스트를 전달했고 미국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하이마스와 이에 장착되는 유도미사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두고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첨단 무기로 쉽게 전쟁을 한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잘 알려진 대로 우크라이나 군대는 재블린 같은 중화기를 사용해 공격할 때 시스템이 제안하는 거리보다 훨씬 더 가까이 적에게 다가가서 명중률을 높인다. 첨단무기도 훌륭하지만 목숨을 건 용감한 군인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본 것과 같은 전과는 나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우크라이나군이 미국에게서 제공받은 레이더 파괴용 공대지 미사일(HARM)을 구소련제 미그 29 전투기에 장착해서 사용한다는 얘기는 이미 전설적이다. 이 무기는 원래 서방 국가용으로, 구소련/러시아산 무기와는 호환이 되지 않는데 우크라이나군이 센서를 개조해서 자국 전투기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창의적 활용이 이어지면서 "우크라이나군은 맥가이버"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과 군의 높은 사기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런 우크라이나의 자세와 미국이 마치 화수분처럼 공급하고 있는 무기가 만나서 막강한 효과를 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번 대대적 반격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우크라이나의 승리가 눈앞에 있다"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우선 그 '승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가 있지만 젤렌스키가 강조하듯 "러시아군을 우크라이나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 승리라면 그 승리는 가까이에 있지 않다. 이번의 남부 헤르손 공략이 이를 잘 보여준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헤르손 공략은 성동격서 전략이 아니라 엄연한 공격이었지만 러시아군은–미국의 시뮬레이션이 예상한대로–이를 잘 막아낸 셈이다. 젤렌스키는 이렇게 남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한 러시아군을 몰아내지 않고 승리를 선언하기는 힘들다.
Far From Over
북부 지역을 되찾은 우크라이나는 이제 2014년부터 사실상 러시아가 장악해온 동부 돈바스 지역을 공략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돈바스를 다음 목표로 삼는다면 푸틴 정권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특히 철도의 허브 역할을 하는 이지움(Izyum)도 되찾았기 때문에 이를 거점과 축으로 삼아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군을 몰아붙일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남부에 주둔한 러시아군의 화력도 막강하지만, 북부 하르키우에서 후퇴한 러시아 병력이 돈바스로 집결하면서 그 상태야 어쨌든 더욱더 화력이 밀집되었다. 아무리 우크라이나가 용맹스럽게 싸운다고 해도, 아무리 러시아군이 종이호랑이였다고 해도 돈바스와 남부를 단시간 내에 회복하는 건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일어난 대대적인 반격은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될 겨울이 오기 전에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공감한 우크라이나와 미국의 합작품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군사적인 성과만이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에 발행한 '세 가지 방법'에서도 설명했지만, 이 전쟁은 푸틴의 결단으로도 끝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9월 초 참패로 인한 푸틴 비판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전쟁 시작과 함께 국내 여론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결과 그동안 잠잠했던 비판 세력이 푸틴이 전쟁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일부 비판 세력이 생겼다고 해서 푸틴의 위치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건 푸틴의 편에서 이번 전쟁을 지지했던 러시아의 극우 인플루언서들이 러시아군의 실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우리 군은 퇴각하고 있는데 그러는 동안 모스크바에서는 축제나 하고 있었다"며 러시아의 지도부까지 함께 비난한 것이다. 중요한 건 이런 인플루언서의 발언 내용이나 강도가 아니라, 이들이 비판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이는 푸틴이 국내에서 여론의 압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극우 인플루언서들 중에는 푸틴이 제대로 전쟁을 하려면 국민 징집(mobilization)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푸틴에게는 몹시 조심스러운 선택이다. 푸틴은 징집령을 내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그동안–푸틴의 여론 전략대로–전쟁에 무관심하게 남아있던 국민들이 러시아군의 전과에 관심을 갖게 된다. 직업군인이 싸우는 것과 강제 징집된 자기 자식과 남편이 싸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당장 징집령 카드는 쉽게 쓰기 힘든 푸틴은 당분간 방어에 집중하면서 미사일로 후방을 공격하는 데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버티며 겨울을 기다리는 것이다. 에너지값이 고공 행진을 하면서 유럽인들 사이에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하면 푸틴은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협상을 시작할 수 있고, 국민들의 불평에 못 이긴 유럽의 각국은 젤렌스키에게 양보의 압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우크라이나의 반격 성공으로 실현 가능성이 줄어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러시아를 상대로 이기고 있는 우크라이나에게 양보를 강요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다가올 유럽의 압력을 예상한 우크라이나와 미국이 이번 공격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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