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부상을 알리는 1976년의 뉴스위크, 크리스천 투데이, 그리고 1977년의 타임

프랜시스 셰이퍼와 아들 프랭크가 함께 제작한 10부작 다큐멘터리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 인기가 마지막 두 에피소드에 담긴 낙태 합법화 반대 주장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버지 프랜시스 셰이퍼가 주장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다큐멘터리의 주요 내용이었기 때문에 "낙태 합법화 반대 주장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다고 보는 게 좀 더 정확하다.

그래서 프랭크는 낙태 합법화에 대한 반대를 좀 더 분명하게 주장하는 다큐멘터리를 따로 만들고 싶었다. 대부분이 아버지의 주장인 첫 다큐멘터리와 달리, 낙태 문제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2021년 BBC를 통해 소개된 그의 인터뷰에서 자세히 들을 수 있다. 서구에서 일어난 문화전쟁(Culture War)을 다룬 'Things Fell Apart'의 첫 에피소드가 바로 낙태 합법화에 반대한 복음주의자들, 특히 프랜시스와 프랭크 셰이퍼의 이야기다.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에피소드에 등장한 내용에 바탕을 두고있다.
BBC Radio 4 - Things Fell Apart, S1. Ep 1: 1000 Dolls
Strange tales from the culture wars by Jon Ronson.

중요한 건 프랭크가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자고 할 때만 해도 아버지는 낙태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프랭크는 그런 아버지를 설득하다가 안 되자 "이 다큐멘터리 만들지 않으면 아버지도 낙태에 찬성하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렇게 거의 강압적으로 만들어 1979년에 발표한 다큐멘터리가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였다. (러닝타임 4시간의 이 다큐멘터리는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프랭크는 충격적인 비주얼을 동원하고, 아버지를 출연시켜 낙태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앞서 발표한 다큐멘터리와 달리 오로지 낙태 문제만을 다룬 이 작품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은 아주 실망스러웠다. 프랭크 셰이퍼는 첫 다큐멘터리가 성공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형 스타디움을 빌려서 상영회를 열었는데, 좌석이 텅텅 비었다. 이 작품의 첫 투어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다큐멘터리에서 임신 중지로 사라진 태아들을 보여주기 위해 해변에 뿌려둔 1,000개의 인형
이미지 출처: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프랜시스와 프랭크 셰이퍼는 두 번째 작품을 어떻게든 흥행시키고, 낙태 이슈를 띄우기 위해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었던 크리스천 투데이를 찾아가 호소했지만, 돌아온 답은 "여성의 낙태권에 반대하는 건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유명 매체에서 "우리는 pro-life(낙태 반대)가 아니다. 이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이슈가 아니다"라는 반응이 나왔다는 건, 그들의 운동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뉴욕의 대표적인 타블로이드 신문인 뉴욕포스트가 기독교인들이 희한한 걸 만들었다는 호기심 어린 태도로 프랭크 셰이퍼의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는데, 그걸 본 여성운동 진영에서 분노한 것이다. 이들은 보수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반대하며 셰이퍼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되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피케팅을 하며 시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화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언론이 시위를 보도했고, 그게 뜻하지 않게 셰이퍼의 다큐멘터리를 널리 홍보하는 결과를 낳았고, 영화 상영과 함께 열린 세미나에도 방송 기자들이 찾아와 보도하자,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진보적인 대도시 여성들이 기독교적인 가치를 공격한다'는 틀로 이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그저 가톨릭에서나 중요시하던 낙태 문제를 복음주의자들이 완전히 자신들의 정치적 이슈로 끌어안는 순간이었다.

뉴욕에서 일어난 낙태권 수호 시위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복음주의 기독교가 이 문제에 뛰어들자 가톨릭교회가 낙태권에 반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미국 내에서 소수에 불과한 가톨릭 신자들과 달리 복음주의자들은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표에 배고픈 정치인들이 찾아왔고, 정치인들이 드나들자 그들을 좋아하는 정치적인 목사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낙태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과격화하기 시작했다.

복음주의자들의 과격화에는 프랜시스 셰이퍼의 책임이 분명히 있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만 해도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정도에 그쳤던 그가 1981년이 되면 낙태 반대운동에 올인하면서 거친 수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행동(실천)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태아를 죽이는 일이 5살짜리 아이를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에게는 그런 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

이 말은 정치를 회피하지 말고, 세상에 뛰어들어 법을 고치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살인자를 물리적으로 막으라"는 말로 들렸고, 미국 전역에서 이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위키피디아의 "Anti-abortion violence(낙태 반대 폭력)" 항목에 따르면 197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최소 11건의 살인과 42건의 폭파, 200건의 방화, 531건의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말을 하면서 프랜시스 셰이퍼가 한 말이나 글을 인용하곤 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트 슬레피언이라는 의사를 총으로 살해한 제임스 코프(James Kopp)다. 그는 셰이퍼의 가르침을 좋아해서 스위스의 라브리에 머물며 그의 설교를 들었고, 그 이후로 과격한 낙태 반대 운동을 시작해 결국 1998년 의사가 사는 집으로 찾아가 창밖에서 총을 쏘아 살해했다.

낙태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의사(바트 슬레피언, 왼쪽)를 살해한 제임스 코프
이미지 출처: The Hamilton Spectator

제임스 코프가 저지른 살인의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결국 1970년대 중반, 아버지 프랜시스 셰이퍼를 설득해 낙태에 반대하는 내용을 다큐멘터리에 포함시킨 아들 프랭크 셰이퍼를 만나게 되지만, 1998년이면 프랭크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고 낙태 반대 운동은 물론, 복음주의 진영을 떠난 지 오래였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프랭크는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던 아버지가 1984년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부터 지독히 정치적이고 과격한 제리 폴웰(Jerry Falwell) 목사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폴웰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동성애자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내가 키우는 개가 그 짓을 하면 나는 끌고 나가서 총으로 쏴 죽일 거야."

레이건 대통령과 제리 폴웰 목사, '목사인가, 정치인가?'라는 제목으로 폴웰을 다룬 기사
이미지 출처: Salon, University of North Texas

십 대 시절의 프랭크는 종교적인 열정과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해서 낙태 반대 운동을 시작했지만, 그 이슈가 정치권을 드나드는 목사들 손에 넘어간 후에는 과격하고 추한 모습으로 변했고, 그걸 본 프랭크는 낙태권에 대한 견해를 180도 바꿨고, 아버지는 존경하지만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완전히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기가 사회에 입힌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여성의 낙태권을 옹호하는 노력을 지난 30년 동안 해 오고 있다.

프랭크 셰이퍼는 그 이후로 몇 번씩 교단을 옮기다가 현재는 스스로를 '기독교 무신론자'라고 밝힌다. 기독교 무신론(Christian atheism)은 기독교의 가르침은 받아들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인격체를 가진 신은 믿지 않는다.


복음주의 기독교는 레이건의 시대였던 1980년대 이후로 힘을 꾸준히 키웠고, 한 번도 '낙태 불법화'라는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공화당 정치인들을 통해 연방 대법원에 보수 대법관을 채워 넣었고, 오바마 시절에는 공화당이 편법을 동원해 대법관 임명을 거부하다가 트럼프 정권 때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꾸준히 비판해 온 판사들을 대법관으로 임명해 결국 2022년에 이를 뒤집는 판결을 끌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