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의 글을 쓰게 된 계기는 한 지인에게서 받은 질문이다. "기독교는 왜 여성의 낙태권을 그렇게 물고 늘어지나요?" 이 질문에 가장 단순한 답(인 동시에 기독교에서 선호하는 답)은 "성경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그게 이유일까? 살인하지 말라는 건 개신교 고유의 가치가 아니다. 인류의 거의 모든 사회가 살인을 죄악시했다. 살인을 금하지 않는 사회는 없다.

그렇다면 개신교가 다른 어떤 종교나 가치 체계보다 살인을 막는 것에 더 열심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미국의 보수 개신교가 반전운동을 낙태 반대 운동에 비해 더 열심히 한 게 아니다. 미국에서 십 대 이하 아이들의 사망 원인 1위는 '총기에 의한 사망'이고, 전문가들은 총기 규제만이 답이라고 수십 년 동안 이야기하고 있지만, 미국의 보수 개신교 신자들은 총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런 이유로 미국의 보수 개신교 신자들이 낙태에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게 살인이고, 성경이 살인을 금했기 때문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들은 낙태 하나에만 흥분하기 때문이다. (발달 단계에 따라 다르지만 초기 단계의 태아는 인간으로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 낙태에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는다.)

하나님, 총, 트럼프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좋아하는 세 단어로, 트럼프 지지 집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복음주의 세력을 결집해 정치 세력화하려 했던 윌리엄 B. 라일리의 시도는 '스콥스 재판'의 여파로 완전히 실패했다. 스콥스 재판의 중계를 통해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의 생각을 알게 된 대다수의 미국인은 그들이 그저 무식한 사람들이라며 무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세기 동안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흩어져 지내던 보수 개신교를 결집해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바꿔 놓은 건 1973년 1월 22일에 연방 대법원이 여성의 낙태를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다, 라는 게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하지만 앞의 글에서 소개했던 종교학자 랜덜 바머는 그 내러티브는 신화(myth)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1960, 70년대에 복음주의 내부에서 일어난 논의를 살펴보면 "낙태 합법화에 분개해서 결집한 복음주의자"들은 없었다.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전략이 있었을 뿐이다.


"기독교는 왜 여성의 낙태권을 그렇게 물고 늘어지나요?"라는 질문 뒤에 이어지는 질문이 있다. "낙태와 관련해서는 원래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대가 강했고, 개신교는 아니지 않았나요?"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갖는 궁금증이다. 이건 정확한 지적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오기 직전인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까지 복음주의 교단에서는 낙태에 반대하는 건 가톨릭교회들의 주장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복음주의와 같은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전통적인 반감—"가톨릭교회가 미국을 뺏으려 한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가 하는 주장에 동조하기는 커녕 오히려 반대하는 기류가 강했다.

단순히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복음주의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매체인 '크리스천 투데이(Christian Today)'는 1968년에 복음주의 의료인들의 모임인 크리스천 메디컬 소사이어티(Christian Medical Society)와 공동으로 낙태(임신 중지)가 가진 도덕적 이슈를 살피는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여러 날 이어진 이 컨퍼런스에는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참여해서 의료인들과 대화를 나눴고, 그 결과 도출된 결론을 마지막 날 발표했다. "우리는 낙태가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낙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필요할 경우)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를 원한다." 이게 복음주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1971년에는 미국 보수 개신교, 복음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남침례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에서 심지어 낙태를 합법으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럼 이들의 생각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온 후에 바뀌었을까?

아니다. 는 '로대 웨이드' 판결이 나온 이듬해인 1974년에는 1971년에 채택한 결의안을 다시 투표해서 재확인했고, 1976년에 이 결의안에 대한 지지를 세 번째 확인했다. 여성의 낙태권리는 합법적이고, 기독교에서 나서서 반대할 이슈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이들은 무슨 계기로 낙태에 관한 태도를 180도 바꾸게 되었을까? 엉뚱하게 들리지만, 사립학교법과 관련이 있고, 그 바탕에는 인종주의가 숨어있었다는 종교학자 랜덜 바머의 설명이다.  

기독교 사립학교들의 분노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로 대 웨이드'와 함께 미국의 연방 대법원이 내린 역사적인 판결 중에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 1954년)'라는 게 있다. 캔사스주에 살던 흑인 학생이 자기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가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흑인학교에 가야 하는 게 부당하다고 소송을 낸 것으로 시작해서, 그때까지 유지되던 "분리하되 평등"이라는 인종차별 정책을—적어도 공립학교에서는—폐지하게 만든 판결이다.

그 판결의 결과로 미국 학생들은 인종 구분 없이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식이 흑인 학생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걸 원하지 않던 백인 부모들은 자식을 사립학교로 전학시켰다. 국가가 학교에 인종 통합 교육을 강제할 수 있는 이유는 연방정부가 공립학교 운영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통합하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는 통보를 받은 공립학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립학교들은 달랐다. 이들은 학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으니, 흑인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나라의 지원을 받지 않으니, 운영비를 잃을 위험도 없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이 나온 직후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를 중심으로 백인 아이들의 전학이 급속도로 일어났고, 이때부터 미국에서는 '공립학교=흑인학교'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한 예로, 미시시피주의 홈즈 카운티에서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이 나온 첫해에 공립학교에 다니는 백인 학생이 700명에서 28명으로 줄었고, 이듬해에는 0명이 되었다.

미국 대도시에 위치한 오래된 공립학교들은 지금도 백인 학생의 비율이 아주 낮다. 백인들이 도심에서 벗어난 탓도 있지만, 많은 사립학교들에서 백인 학생 비율이 아주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이미지 출처: Reddit

이런 새로운 환경에서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복음주의 기독교 목사들이다. 이들은 인종차별이 유지되는 사립학교를 열어 합법적으로 백인 학생들만 받았다. 그런데 이들이 돈을 벌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인종이 분리된 학교를 찾는 학부모들이 많아서만이 아니다. 이들은 이를 자선기관(charitable institution)으로 등록해서 세금을 면제받았다.

자식이 동등한 교육을 받기 원했던 홈즈 카운티의 흑인 부모들은 백인들이 이런 편법을 사용하는 것에 항의하며 이 문제를 법정에 가져갔다. 이 사건이 '그린 대 코널리(Green v. Connally)'로, 연방 대법원은 1971년, 인종을 분리하는 사립학교들은 자선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세금을 면제받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미국 보수 백인 유권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보수적인 백인들은 1960년대 이후로 미국에서 흑인의 민권이 신장된 결과로 자신들의 자유가 제한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린 대 코널리' 판결이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연방 교육부를 없애겠다고 벼르고 있는 이유도 이 판결과 관련 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유권자들은 물론이고,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부터 공화당 지지자들은 연방 교육부가 세금을 사용해서 진보적인 어젠다를 공립학교에 강요한다고 반발하며 교육부를 없애자는 얘기를 꾸준히 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연방 교육부는 1979년, 미국 최초의 복음주의 기독교 대통령이라 불리는 지미 카터가 만들었다. 카터에 대해서는 곧 설명한다.) '그린 대 코널리' 판결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보수 백인 유권자들이 연방 정부를 왜 그토록 싫어하고 무너뜨리려 하는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인종주의와 관련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그린 대 코널리' 판결로 인종을 차별하던 기독교 사립학교 운영에 차질이 생기자, 이런 학교를 운영하던 복음주의 목사들이 분노하게 되었다. 정부가 보기에는 인종을 차별하는 기관이지만, 이들은 백인들끼리 지내는 공간, 혹은 자유를 연방 정부가 무단으로 침범한 것이었다. 복음주의 목사들은 이런 연방 정부 정책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세력을 형성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물론 복음주의의 정치 세력화는 반세기 전 윌리엄 B. 라일리의 꿈이기도 했다. 문제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믿는 백인들의 세를 규합할 마땅한 정치적 이슈가 없다는 데 있었다. 라일리가 반진화론을 이슈로 복음주의 정치 세력화를 시도했다가 '스콥스 재판'으로 실패한 후로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정치에 관심을 끊고 사는 것이 몸에 뱄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정치는 신앙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이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1976년, 남부의 한 독실한 복음주의자가 느닷없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게 바로 최근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미 카터(Jimmy Carter)다.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
이미지 출처: The Atlantic

문제는 그가 복음주의 목사들이 원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보수 개신교의 탄생 ⑥'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