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개신교의 탄생 ②
• 댓글 2개 보기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개신교 신자이거나, 개신교를 믿는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제법 많을 거라고 본다. 만약 '내가 믿는, 혹은 믿었던 기독교도 복음주의(Evangelicalism)였을까?'하는 궁금증이 든다면 종교학자이자, 성공회 신부인 랜덜 바머(Randall Balmer)는 복음주의의 특징을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첫째, 성경은 신(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는 말이고,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둘째, 영적 각성, 혹은 거듭나는(born-again)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셋째, 자기가 믿는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마 한국에서 자란 개신교 신자라면 대부분 이 세 가지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 '원래 모든 기독교가 그런 거 아니었어?'라고 생각할 거다. 그만큼 복음주의는 개신교의 신앙에 깊이 뿌리 내렸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 "복음주의자(Evangelicals)"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백인 크리스천'이다. 구글에서 그 단어로 이미지를 검색하면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사진들을 보면 공화당이 아니라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제 미국의 복음주의는 트럼프와 단단하게 연결되었다. 우리가 흔히 "미국의 보수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이 이 복음주의다.

미국 공영라디오(NPR)의 인기 프로그램인 스루라인(Throughline)에서는 2019년, 트럼프를 지지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에피소드를 방송했다. 이 에피소드는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라는 아일랜드계 영국 성경학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19세기에 등장한 극단적 보수주의 성경 해석 방식인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를 시작한 사람이지만, 그보다는 기독교 신자들이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는 휴거(携擧, rapture)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사람으로—대중적으로는—더 유명하다.
존 넬슨 다비의 성경 해석
신자들에게 종교란 무엇일까? 특정 종교가 그걸 믿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간단하게 말하기 힘들다. 수백, 수천 년 전에 기록된 경전은 현대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이나 가르침을 주기 힘들다. 기독교인이 아무리 성경을 따라 산다고 해도 구약 성경 레위기에서 길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제사를 지내는 법은 없다. 성경에서 신이 명령한 대로 살려면 땅을 매매해서는 안 되고, 누군가에게서 땅을 샀더라도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기독교 성경에는 이렇게 현대인들이 현실적으로 따를 수 없는 명령, 혹은 가르침이 아주 많다.
그렇다면 그런 경전을 바탕으로 한 종교를 "믿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가장 단순하고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그 종교가 말하는 사후 세계를 기대하고 사는 것이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 선에서 종교를 믿는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신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한다면? 여기서부터는 '해석'이 필요하다.

가령 기독교 성경에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라는 구절이 몇 차례 등장한다. 많은 기독교인은 이런 구절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지만, 이런 신의 명령을 지키기로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단순하게는 염소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는 요리를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을 비인간적인 행동은 동물에게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동물권을 존중하는 생활을 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 그런 명령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고 해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복잡해진다. 가령 유대인들은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구절을 유제품(젖)과 육류를 함께 먹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햄버거를 먹어도 치즈버거는 먹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구약 성경을 공유하는 기독교인 중에 치즈버거를 먹는 게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같은 해석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교파가 만들어지고, 때로는 갈라져서 아예 다른 종교가 되기도 한다. 개신교는 종교 개혁을 통해 로마 교황청에서 독립했지만, 끊임없는 내부 분열로 다양한 종파로 갈라졌다.
존 넬슨 다비가 1800년대 초에 목격한 상황이 그거였다. "나는 기독교의 한 종파에 속할 뿐, 다른 종파에는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교회는 갈라지고 흩어져 분리된 집단을 만들어냈다."

1827년 어느 날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다비는 몇 달 동안 침대 생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성경만 읽다가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개신교 내의 각 교파가 기독교를 쪼개고 있기 때문에 교파를 무시하자고 했고, 로마 가톨릭을 닮은 영국 성공회의 위계 서열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그가 당시 개신교에서 믿던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을 거부하고,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을 주장한 것이다. 전천년설, 후천년설은 신학교에서나 배우게 되는 복잡한 이야기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가 언제 다시 이 땅에 내려오느냐"를 두고 나온 성경 해석이다. 그때까지 개신교에서는 성경 속 예언을 해석해서 세상이 끝날 때가 다가오면 1,000년 동안 평화로운 시기가 찾아오고, 그 뒤에 예수가 하늘에서 다시 내려온다(=재림)는 해석이 일반적이었는데, 다비는 성경을 새롭게 해석해서 예수는 그 평화로운 1,000년의 기간 전에 재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어느 쪽이 맞다고 한들 언제일지도 모를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그런 해석 차이가 왜 중요했을까? 신자가 세상의 종말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현재를 사는 자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는 예수가 오기 전에 1,000년 동안 세상에 평화로운 시대가 펼쳐진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즉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게 후천년설을 믿던 사람들의 세계관이었다.
존 넬슨 다비의 전천년설이 보는 미래는 다르다. 평화로운 1,000년, 즉 "천년왕국"이 들어서기 전에 예수가 재림할 텐데, 그때까지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고통과 비극으로 가득한 끔찍한 곳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세상에 비극이 벌어져도, 세계가 파괴되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예수가 재림하기 전까지는 세상은 계속 나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비가 내놓은 "종말의 징조" 중 하나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지금의 이스라엘)으로 귀환하고, 이스라엘 국가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라는 구절에서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한다고 믿었다. 그가 이런 해석을 하던 당시는 유대인들이 유럽을 비롯해 세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 현대 이스라엘은 탄생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시오니즘이 강하게 일어나고 현대 이스라엘 국가 건설 논의가 시작된 것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다비의 종말론 해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신교 신자들, 특히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 다음으로 시오니즘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자기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유대인들과 달리 복음주의자들은 유대인이 국가를 건설해야 예수가 재림한다고 믿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런 예언적 시각이 현대 이스라엘의 성립—과 팔레스타인 주민이 처하게 된 현재 상황—의 배경이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예언에 동의하지 않지만, 도움이 되기 때문에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들의 지지를 뿌리칠 이유가 없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미래가 암담할 때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숙명론에 빠지게 된다. 다비가 성경 속 예언을 비관적으로 해석한 건 당시 아일랜드의 기독교인들이 느끼던 절박한 심정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는 전통적으로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 점점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단순히 종교적 압력이 아닌 정치적인 압력이었다. 다비는 자신의 해석을 팸플릿으로 만들어 아일랜드 전역에 뿌려서 인기를 끌었고,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를 퍼뜨리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미국으로 발길을 옮겼다. 다비의 숙명론적 미래 해석은 신생국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었다.
그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다비의 성경 해석이 처음에는 미국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미국의 건국 직후부터 1840년대까지 미 대륙에서 일어난 기독교 부흥운동("제2차 대각성 운동"이라 불린다)이 미국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사회를 개혁하고, 제도를 개선하려는 강한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세상은 갈수록 나빠질 거라는 다비의 암울한 관점은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이 건국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빠지면서 미국인들의 생각도 바뀌게 된다.
'보수 개신교의 탄생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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