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러쉬코프에 따르면 테크 갑부들이 가진 사고 방식의 뿌리는 16세기 영국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21세기에 들어 오면서 훨씬 더 큰 파급력(혹은 파괴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실증주의 과학철학(empirical science)에서 뿌리를 발견했다. 16~17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경험론이라고도 불리는 실증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영국왕립학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자연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붙잡아서 정복하고 제압해야 한다(Nature must be taken by the forelock...lay hold of her and capture her...conquer and subdue her....)" 전통적으로 영어에서 자연은 여성("Mother Nature")으로 묘사되는데, 베이컨이 사용한 forelock은 앞머리다. 왜 하필 앞머리일까? 어떤 모습이 연상되는가? 여성을 땅에 눕히고 강간하는 남성이다. 베이컨은 의도적으로 성폭력의 모티브를 사용한 것이다. 베이컨에 따르면 과학은 남성이 여성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 왜 하필 이런 식으로 묘사했을까?

과학자들(=남성)에게 자연은 알기 힘든 존재, 그래서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해에는 가뭄이 들고, 어떤 해에는 홍수가 나는 "변덕스러운" 자연을 보면서 (남성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과 닮았다는 사고 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연을 여성에 비유한 것이고, 그들에게 환경을 측정하고, 동물과 식물을 채집해서 연구하는 것은 그런 자연/여성을 제압하고, 이해하고, 인간/남성의 의도에 순응하도록 길들이는 행위였다.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새 표본 (이미지 출처: EurekAlert!)

게다가 러쉬코프에 따르면 이런 실증주의적 접근법이 식민주의(colonialism)와 아주 잘 들어맞았다고 한다. 그는 베이컨과 동시대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를 이야기하며 "홉스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두고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냥 자연풍경처럼 취급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에 가깝기는 하지만, 의식이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랑이, 개미와 다르지 않으니 필요하면 그냥 죽이면 된다고 했죠."

이런 사고 방식이 지금은 서구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미국 보수 진영이 좋아하는 앤 쿨터(Ann Coulter)는 환경주의자들을 혐오하고 기후 위기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인물인데, 다음과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나님이 지구를 인간에게 주셨어요. 우리는 식물과 동물, 나무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이 '지구는 너희의 것이니, 가져라. 강간해라. 네꺼니까.'라고 하셨습니다. (God gave us the earth. We have dominion over the plants, the animals, the trees. God said, ‘Earth is yours. Take it. Rape it. It’s yours.')"
앤 쿨터 (이미지 출처: Politico)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갖게 된 지 수백 년이 되었다면 왜 굳이 실리콘밸리 부자들의 탈출 환상을 문제 삼을까? 부자들은 원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저분한 환경에서 분리되어 살고 싶어 하지 않았나? 테크 갑부들은 뭐가 다를까?

가난한 흑인들과 분리되어 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들 (이미지 출처: Unequal Scenes)

마크 저커버그는 로마 황제,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심취해서 헤어스타일까지 흉내 내고, 라틴어 문구도 여기저기에서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권력은 잘해야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정도였던 반면, 지금 실리콘밸리의 갑부들은 지구 환경을 통째로 파괴해서 인간이 거주하기 힘든 곳으로 만들 힘을 갖고 있다.

그게 중요한 차이, 즉 양적 차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로마 문화와 역사에 심취했던 걸로 유명하다. (이미지 출처: Roman Empire Times)

하지만 러쉬코프가 보기에는 질적 차이도 존재한다. 이들은 탈출 환상(escape fantasies)을 좋은(positive)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게 러쉬코프가 그들의 사고 방식을 탈출 계획(plans)이나 탈출 전략(strategies)라고 부르지 않고 탈출 환상(fantasies)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들은 그런 상상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을 넘어, 그걸 원한다.

과학소설에서 출발한 가속주의(加速主義, accelerationism)라는 사고 방식이 있다. 러쉬코프는 현재 미국에서 가속주의 사고 방식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 트럼프의 전략가이자, 대중 선동가로 유명한 스티브 배넌(Steve Bannon)라고 말한다. 배넌의 주장은 인류 문명이 전속력으로 돌진해서 모든 걸 파괴한 후 그 위에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피터 틸이나 일론 머스크가 하고 있는 생각도 다르지 않다. 지구의 파괴를 염려해서 발전을 속도를 늦출 게 아니라, 더 속도를 내어 종말을 앞당기고, 그다음에 자기들이 완전히 통제 가능한 새로운 문명을 만들자는 얘기다.

Accelerationism: how a fringe philosophy predicted the future we live in
The long read: The world is changing at dizzying speed – but for some thinkers, not quickly enough. Is accelerationism a dangerous idea or does it speak to our troubled times?
가속주의를 설명한 가디언의 기사

즉, 그들은 지금 하는 게임으로는 가망이 없어 보이니, 이 게임은 빨리 끝내고 다음 게임("Game B")로 넘어가자고 한다. 그렇게 만드는 문명 2.0은 현재의 문명이 가진 한계에 얽매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문명이 망가질 경우 자기는 다치면 안 되기 때문에 거대한 대피소를 만드는 것이고, 세상이 정리된 후에는 지상으로 올라와 새로운 문명을 설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다시 만드는 문명은 지금 우리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질서 있고, 구조화된 문명이 될 것이라는 게 그들이 가진 탈출 환상의 지향점이다.

20세기 냉전 때 핵전쟁 공포를 겪은 탓인지 대재앙을 피해 자족적인 대피소를 만든다는 환상은 유독 미국 문화에 강하게 남아있고, 근래에 들어서는 게임(Fallout)이나 영화(Silo) 등으로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물론 젊은 남자들이 압도적으로 더 좋아하는 상상이지만,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우 남성들 중에 유독 종말을 준비하는 생존주의자(Survivalist), 프레퍼(Prepper)가 많은 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만큼 비슷한 문화, 혹은 사고 방식을 공유한다. 좀비 영화의 인기도 이렇게 '나 혼자 살아남는다'는 환상과 무관하지 않다.
폐기된 전략 미사일 창고를 개조한 주거용 대피소 이미지와 드라마 시리즈 'Silo'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Designboom, Screen Rant)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전은 뭘까? 지금의 세상을 엔지니어의 시각으로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러쉬코프는 부자들의 모임으로 유명한 다보스 포럼(Davos Forum)이나, 테드 토크(TED Talk) 같은 데 나와서 발표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기후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고 비판한다. 그들이 돈벌이의 욕심을 줄이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방법이지만, 그건 그들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똑똑한 자기만이 해결책을 갖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있다. 버닝맨(Burning Man) 페스티벌이나 아마존 정글에 들어가 아야와스카(ayahuasca) 같은 환각제를 복용하고 "어머니 지구와 직접 소통하고" 지구를 구하는 영감을 얻었으니 그저 평범한 과학자와 운동가들이 수십 년 동안 주장한 해결책보다 훨씬 나은 방법을 찾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거기에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투여해서 단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기 때문에 가장 많을 돈을 벌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엔지니어 출신 CEO들의 몽정(wet dream)에 가깝다.

버닝맨 페스티벌 (이미지 출처: Artsy)

과연 공학적인 상상이 정답일까? 러쉬코프는 지구상에서 말라리아를 없애겠다고 작정한 빌 게이츠의 예를 보라고 한다. 게이츠는 자선 재단을 통해 5억 개가 넘는 모기장을 아프리카에 보냈다. 하지만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모기장을 치고 자면 성욕이 줄어든다며, 모기장은 아프리카의 인구를 줄이려는 서구의 음모라고 생각하고 거부했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넘쳐나는 모기장을 활용할 방법을 찾다가 물고기를 잡는 그물로 사용하기 시작한 거다. 게이츠 재단이 보낸 모기장은 물에 던져 고기를 잡기 위한 재질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심각한 환경 오염을 유발했지만, 모기를 막을 수 있도록 촘촘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걸 사용하면 잡아서는 안 되는 치어(稚魚, 어린 물고기)들까지 모두 잡게 되는 바람에 강에서 물고기의 씨가 말라버렸다.

실리콘밸리에서 나오는 기후 위기 해결책이라는 것도 다르지 않다. 하나같이 휘황찬란한 지오엔지니어링(geoengineering)으로 "한 방에" 해결하겠다면서, 그 계획이—게이츠의 모기장처럼—실패로 돌아갈 경우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한 논의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대중의 눈을 사로잡는 방안이 등장하면 각국 정부와 대중은 당장 노력해야 할 부분을 무시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비판이다.

하지만 그런 계획이 실패할 경우 직접적으로 피해를 볼 사람들은 안전한 대피소를 갖고 있는 테크 부자들은 아닐 거다. 그게 그들이 무모한 계획을 남발하면서 동시에 탈출을 꿈꿀 수 있는 이유다.

실패한 모기장 프로젝트를 보도한 뉴욕타임즈의 기사 영상

러쉬코프는 일론 머스크가 2021년 15억 달러의 비트코인을 매수한 행위는—비트코인 채굴에 들어가는 엄청난 에너지와 결과로 발생하는 환경 파괴를 고려하면—그가 테슬라를 만들어 이뤄낸 온실가스 저감효과를 모두 상쇄한 거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실제 파급 효과의 측정치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다.) 그가 지구 환경 보존에 진심이었다면 비트코인에 투자했을까? 그에게는 큰 수익이 나지 않으면서 지구를, 혹은 인류를 위하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를 화성에 보내겠다고 거창한 말을 하지만 그의 스페이스X는 테슬라보다 훨씬 더 유망한 돈벌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환경, 기후 문제 해결에 실패할 경우 죽게 될 사람들이 진정한 이해관계자(stakeholder)다. 인류에게는 평생토록 환경을 연구하고, 환경을 위해 싸워온 진정한 이해관계자들이 있다. 그들은 문제의 복잡성을 알고 있고, 하나의 거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백 개의 작은 해결책을 동원해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기만이 거대한 해결책과 자본이 있다고 주장하며 수퍼히어로 행세를 하는 테크 갑부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며 혼자 살아남을 환상을 즐기는 가짜 영웅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