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립대학교(CUNY)에서 디지털 미디어와 디지털 시대의 인간 자율성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더글러스 러쉬코프(Douglas Rushkoff) 교수는 한국에 그다지 잘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 (그의 책 두 권의 책이 소개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도 그가 만들어낸 개념과 표현들은 들어봤을 거다. 미디어가 바이러스처럼 퍼진다는 '바이럴 미디어(viral media)', 온라인에서 얻게 되는 인기와 평판 등을 일컫는 '소셜화폐(social currency)' 같은 표현이 러쉬코프가 처음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디지털 네이티브'도 그가 만든 표현이라고 소개하지만, 다른 사람이 먼저 사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1961년에 태어난 더글러스 러쉬코프는 인터넷이 보급되기 직전에 등장한 사이버펑크(cyberpunk) 운동에 심취하면서 사이버 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디지털 미디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미디어학자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영향을 받은 흔적은 그의 주장에서 잘 드러나고, 'Coercion(강제)'라는 책으로 마셜 매클루언 상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 나온 이 책의 부제는 'Why We Listen to What "They" Say (우리는 왜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가)'로, 대중은 왜 미디어에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기업이 하는 마케팅에 넘어가는가를 분석한 책이다.

더글러스 러쉬코프 (이미지 출처: WIRED)

러쉬코프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유명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그의 분석틀을 낡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24년 전에 했던 주장을 소셜미디어 시대에 적용해도 전혀 문제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러쉬코프와 연구 분야가 겹치고,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 중 하나가 '감시 자본주의 시대'라는 책과 '소셜 딜레마'라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 교수다.) 2012년에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서 러쉬코프를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대니얼 카네만(Daniel Kahneman)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상가 10인'에 선정했다.

미국에서 이 정도로 유명한 교수는 각종 행사에 키노트 스피커로 초대된다. 그의 책을 모두 읽어 보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그럴 만한 시간이 없기도 하고, 이만한 사람이 등장하면 행사의 흥행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초대를 받으면 교수로서는 부수입이 생기고, 낯선 곳으로 여행하는 기회도 되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날 기회도 된다.

그런 자리에 익숙한 러쉬코프가 기억하는 아주 독특한 연설 초대가 있었다. 아래의 이야기는 러쉬코프가 작년에 새로운 책을 발간한 전후로 그가 했던 인터뷰와 발표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골라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참고한 그의 이야기는 여기여기, 그리고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


러쉬코프를 초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테크 쪽 투자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의 전문 분야가 디지털의 미래라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부르는 건데—러쉬코프는 자기는 사실 미래주의자(futurist)가 아니라 현재주의자(presentist)라고 밝힌다. 한국에 소개된 그의 책도 '현재의 충격'이다—결국 그들은 트렌드를 듣고 투자할 대상을 탐색하려는 거다. 러쉬코프는 돈을 많이 줘도 그런 초대에는 응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떤 초대장을 받아 들고 망설이게 되었단다. 금액의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교수로 일하는 자기가 학교에서 받는 연봉의 1/3에 가까운 돈이었다. 한 번 발표하고 그만한 돈을 받는다고? 게다가 행사 장소가 미국 서부의 사막 한 가운데였고, 거기까지 가는 비행기는 비즈니스석 티켓을 제공한다고 했다. 그는 가기로 했다.

공항에 내린 후에는 사막 한 가운데 있는 행사 장소까지 주최 측에서 리무진을 타고 3시간 동안 달렸는데, 행사 장소인 리조트에 다가가니 그곳에 오는 사람들이 탄 개인용 비행기들이 착륙하는 게 보였다. 리조트 전용 비행장이었다. 그 리조트에서 쉬고 다음 날 아침,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골프카트를 타고 발표장으로 향했다.

미국 유타주 사막에 있는 어느 리조트 (이미지 출처: ABC4

행사장에서 발표 준비를 마친 러쉬코프 앞에 나타난 "청중"은 다섯 명이었다. 그 다섯 명이 러쉬코프의 이야기를 듣고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렇게 엄청난 돈을 지불한 것이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굴까? 나중에 돌아와 이들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그중 세 명은 억만장자(billionaire)였고, 나머지 두 명도 억만장자인 것 같았지만, 온라인에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이 부자들은 러쉬코프에게 다양한 질문을 했다. 질문의 형식은 'A or B'였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중에서 어느 쪽에 투자하는 게 나은가?"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중에서 어느 쪽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따위의 질문이었다. 러쉬코프는 이런 투자 관련 질문에 좋을 답을 줄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해줬단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질문, 결과적으로 가장 오래 대화를 나누게 된 질문은 이거였다:

"알래스카와 뉴질랜드 중에서 어느 쪽이 나은가?"

두 지역을 평가하라는 게 아니라, 인류의 문명이 파괴되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에 대비한 대피소(bunker)를 어디에 짓는 게 좋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다섯 명의 부자들은 기후 재난, 핵 재난, 전자기 펄스(electromagnetic pulse, EMP는 핵무기로부터 발생하는 감마선으로, 전자기기에 과전류를 일으켜 이를 영구적으로 파괴한다)로 인한 재난, 혹은 사회불안으로 인류 문명이 파괴되는 상황을 단순히 "그 일(the event)"이라고 불렀다. "그 일이 일어나면 알래스카와 뉴질랜드 중에서 어디가 더 안전하겠습니까?"

거기에 있던 부자들은 이런 위기가 닥치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요새로 피신하려고 하는데, 이를 짓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어딘지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러쉬코프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러쉬코프 같은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자기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러쉬코프에게 묻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대피소 개념에는 심각한 구멍이 있었다.

"사람들이 당신들의 대피소의 위치를 알고 몰려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들이 말하는 요새는 오래도록 버틸 수 있는 식량부터 수영장까지 갖춰진 호화로운 성채에 가깝다.)

"아, 저희가 계약한 특수부대 출신 경호원들이 막게 됩니다. 전화만 하면 비행기를 타고 대피소로 도착하기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면 화폐가 아무런 쓸모 없을 텐데 그들에게는 뭐로 보상하실 건가요?"

러쉬코프의 질문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렇게 단순한 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단 말일까? 그중 한 사람이 몰스킨 노트를 열고 경호원들에게 보상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적었다. 대피소 아이디어가 가진 구멍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량이 들어있는 금고는 자기만 아는 비밀번호로 접근이 철저하게 통제된다고 했다. 그런데 특수부대 출신 경호원들은 총을 갖고 있지 않나? 그들이 생각을 바꿔서 부자들을 위협하면?

그 질문에 부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종말의 날 대피소 상상도 (이미지 출처: Medium)

러쉬코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어떻습니까? 그 경호원들에게 지금 잘 해주는 겁니다. 그들의 가족과 친하게 지내고, 자식들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고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면, 종말의 날이 닥쳤을 때 당신의 얼굴에 총을 쏘지는 않지 않을까요?"

그가 부자들에게 설명하려던 건, 문명의 종말을 걱정해서 그런 계획을 세우는 대신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면 문명의 종말을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문명 종말에 대비하는 부자들은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만 열중할 뿐, 대피소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러쉬코프는 그 부자들이 인류에게 닥칠 일이 걱정되어서 대피소를 만들려는 게 아니라, 그런 상황을 핑계 삼아 그들이 가진 종말에 대한 환상(fantasy)을 충족하려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리조트에 모인 부자들은 마르크스주의 미디어 이론가인 러쉬코프에게서 싫은 소리를 듣게 될 걸 몰랐을까? 러쉬코프의 생각은 이렇다. 그 부자들은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과 생각이 다른, 아니 반대되는 사람을 불러서 자기들의 아이디어를 테스트해 보려는 거였다. 그런 사람의 지적을 들으면서 보지 못했던 구멍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걸 수정하면 더 완벽한 계획이 될 거니까 그렇다.

그런데 러쉬코프는 테크 갑부들의 대피소 계획과 그런 계획이 나오게 된 그들의 사고 방식, 혹은 철학을 보면서 그들이 만들어 팔고 있는 테크놀로지의 핵심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갑부들이 만들려는 대피소는 그들이 가진 '탈출 환상(escape fantasies)'의 한 예일 뿐, 실리콘밸리에서 설계하는 미래의 테크놀로지가 결국 같은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탈출 환상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