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턴병(Huntington's disease)은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루게릭병을 하나로 합친 것 같다"고도 할 만큼 끔찍한 질병이다. 부모 중 한 사람만 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갖고 있어도 발현되는 '우성 유전병'으로, 유전 확률은 무려 50%다. 환자는 극심한 통증, 성격 변화, 운동 능력 저하, 그리고 기억 상실을 겪다가 결국 사망하게 된다. 보통 발병 후 20년 안에 사망하는데, 알츠하이머 같은 뇌 질환이 그렇듯, 뇌 기능의 저하로 식사 중 질식이나 폐렴이 사망 원인이 된다.

그런데 빈스가 살해하기 전 아버지가 보였던 증상을 종합해 보면 헌팅턴병이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이 병은 보통 35~45세 사이에 발병하는데, 빈스 길머의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이 그가 40세 때였다. 빈스의 증상이 헌팅턴병일 가능성을 생각해 낸 스티브 부이와 벤저민은 헌팅턴병의 증상과 빈스의 증상을 비교해 봤다.

행동 장애가 있나? 빈스는 아버지를 살해했다. 환각 장애는? 빈스는 누군가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환청 증상을 호소한다. 쉽게 짜증을 내는가? 폭행을 당하면서도 걸핏하면 다른 재소자를 공격한다. 기분 변화가 심한가? 그렇다. 안절부절못하고 몸을 계속 움직이는가? 그렇다. 그 밖에도 편집 증세, 얼굴을 찌푸리는 등 특이한 몸동작, 급작스러운 몸놀림, 불안정한 걸음걸이, 방향 감각 상실 및 혼란, 판단력 상실, 성격 변화, 언어 변화, 불안과 스트레스... 빈스의 모든 증상이 헌팅턴병과 일치했다.

물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벤저민과 스티브 부이는 변호사도 아니고, 빈스의 가족도 아니라는 것. 교도소 입장에서 관련자가 아닌 의사 두 명에게 재소자의 유전자 검사를 하게 허용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3주가 지난 어느 날, 기자는 빈스가 월렌스 리지 교도소에서 매리언 교도 의료 센터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는 여러 곳에 수소문한 끝에 재소자들을 돕는 사회복지사에게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빈스가 자살하겠다는 말을 했고, 방에 면도날을 숨기고 있는 게 발각되어 의료 센터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사회복지사는 벤저민과 기자에게 빈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으냐고 물었고, 벤저민은 헌팅턴병을 의심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사회복지사는 "그렇다면 저희 쪽에서 검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바로 다음 날 의료 센터에서 일하는 정신과 의사가 빈스를 진찰하고 벤저민에게 전화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일주일 후 빈스의 혈액을 채취해 유타주에 있는 실험실에 보냈다.

벤저민 길머
이미지 출처: The Assembly NC

결과는 바로 나왔다. 벤저민이 받은 이메일의 첫 줄이 "빈스 길머는 헌팅턴병 양성 반응을 보였습니다. 세 개의 염기(CAG)서열이 43회 반복되었으며, 이는 강한 양성 반응을 의미합니다." 정상인에게서는 CAG 반복 횟수가 평균 19회 정도이지만 헌팅턴병 환자에게서는 40회 이상 나타난다. 부이와 벤저민의 의심이 맞았다. 드디어 빈스 길머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이다.

벤저민은 이메일을 읽는 순간 기쁘면서도 슬펐다. 헌팅턴병은 너무나 끔찍한 병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평생 교도소에서 사는 거랑, 헌팅턴병으로 일찍 죽는 거랑... 뭐가 더 나은지 잘 모르겠어요."

매리언 교도 의료 센터에서 검사를 진행한 정신과 의사는 콜린 앵글리커(Colin Angliker)라는 사람이었다. 교도소 의료 센터에서만 25년을 일한 사람이라고 하면 타성에 젖어 재소자들을 돕는 데 관심이 없을 것 같지만, 앵글리커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교도소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빈스에게는 더없이 완벽한 의사인 셈이다.

그들은 앵글리커를 찾아가, 그에게서 병명을 들은 빈스의 반응을 물었다. "저는 얘기를 꺼내면서 걱정했어요. 헌팅턴병이라는 게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런데 빈스 길머씨는 그다지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빈스는 지난 몇 년 동안 자기 뇌에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고, 모두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껏 그가 사실을 말하고 있었음이 드디어 증명된 것이다.

앵글리커는 빈스에게 약을 처방해 주었고, 그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후부터 그의 상태는 크게 호전되었다. 걸음걸이도 좋아졌고, 말하는 것도 달라졌으며, 불안증도 줄어들었다고 했다. 기자는 무슨 약을 처방했느냐고 물었다.

"셀렉사 80밀리그램을 정제 형태로 처방했어요." 빈스가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그대로였다. 빈스가 헌팅턴병을 의심했기 때문에 그걸 원했던 건 아니다. 빈스는 자기에게 세로토닌(신경전달물질)이 결핍되었다고 셀렉사 처방을 원한 것이었다. 헌팅턴병은 뇌세포와 뉴런을 죽이기 때문에 신경전달물질의 감소로 이어진다. 결국 빈스의 자가 진단이 맞았다는 얘기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교도소는 왜 빈스의 호소를 무시했을까?

벤저민은 앵글리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환자가 무려 9년 동안 호소했는데도 처방이 되지 않은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어요. 저도 의사이지만, 정신과 전문의가 아닌데도 두 번 방문만에 빈스가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거든요. 교도소 의료진이 검사를 많이 한 것으로 아는데 왜 진단이 되지 않은 걸까요?" 앵글리커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증상을 호소하는 재소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게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의료진을 자주 봅니다. 교도소만큼이나 사고가 유연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재소자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아요. 빈스의 경우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가 겪었을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슬프네요."

벤저민과 기자는 변호사를 만나 보기로 했다. 그들이 만난 사람은 버지니아 대학교 법학과의 리처드 보니(Richard Bonnie) 교수로, 같은 학교의 법학, 정신의학, 공공정책연구소(Institute of Law, Psychiatry, and Public Policy) 소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을 연방 법원으로 가지고 가서 빈스의 재판 당시 정신 상태가 스스로 변호할 수 없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빈스의 현재 상태를 고려하면, 긴 재판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 그냥 주 정부의 아는 사람을 통해 특별 석방(compassionate release, 수감자의 질병이나 나이를 고려한 석방)을 추진하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빈스와 전화 통화를 했다. 빈스의 헌팅턴병 판정이 나온 후로 첫 통화였다. 벤저민이 상태를 묻자, 빈스는 약을 먹게 된 후로 상태가 아주 좋아졌다고 했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좋아졌는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그렇게 말하는 빈스의 목소리마저 달라져 있었다. 그는 거의 정상인처럼 느낀다고 했고, 대화 중에 웃기도 했다. 3개월 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가 웃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유전자 검사로 병명을 알게 되었고, 약도 효과를 내고 있으니 정말 좋다는 빈스에게 벤자민은 진단 결과가 겁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두렵지 않아요. 저는 오히려 안심이 됩니다."

빈스 길머의 사진을 들고 있는 벤저민 길머
이미지 출처: The Asheville Citizen Times

하지만 벤저민과 기자는 그렇게 좋아하는 빈스와 30분 정도를 대화하던 중에 빈스가 헌팅턴병이 어떤 병인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의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두 사람에게는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병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다면 교도소에서 찾아볼 방법도 없었을 터였다. 빈스의 아버지가 헌팅턴병을 앓았기 때문에 빈스도 앓고 있다면, 빈스의 여동생도, 여동생의 두 아이, 그리고 세 명의 손주도 모두 헌팅턴병 유전자를 갖고 있을 위험이 있었다. 벤저민은 그 얘기를 어렵게 꺼냈다.

설명을 다 들은 빈스는 "지금으로서는 치료법이 없다는 거죠?" 하고 물었다. "네, 증상을 치료하는 것밖에 없고, 지금으로서는 병 자체를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벤저민의 설명에도 빈스는 별로 좌절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셀렉사를 복용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 말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닥터 길머, 벤저민과 케인 크리크 클리닉 이야기를 나눴다. 벤저민은 빈스의 옛 환자와 친구들이 빈스의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이야기했고, 빈스는 그 클리닉에서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돈이 없는 환자가 치료비를 대신해 옥수수 한 자루를 가져오면 직원들과 함께 전자레인지에 튀겨서 버터를 뿌려 먹었던 일화도 빼놓지 않았다.

케인 클리닉에서 일하던 시절의 빈스 길머(맨 앞)와 직원들
이미지 출처: Davidson College

빈스는 병원에서 일하면서 사람들과 삶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게 큰 행운이었다고 했다. 벤저민은 그런 빈스에게 의학계가 등을 돌린 것이 미안하다고 했지만, 빈스는 벤저민에게 "선생님은 제게 등을 돌리지 않으셨죠. 먼 거리를 운전해서 이곳까지 찾아와 저를 만나주셨잖아요." 빈스가 돌보던 마을의 환자들이 벤저민에게 "내가 아는 닥터 길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들려줬고, 그 말을 들은 벤저민이 진실을 파헤치게 된 것이다. 빈스는 다시 옛날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 벤저민에게 고맙다고 했다.


벤저민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테리 매컬리프(Terry McAuliffe) 버지니아 주지사에게 특별 석방을 요청하는 탄원을 냈지만, 거절당했다. 이들은 2021년, 후임 주지사인 랠프 노섬(Ralph Northam)에게 다시 탄원을 시도했다. 노섬 주지사가 신경과 의사 출신이라는 것에 기대를 걸었지만, 다시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노섬 주지사가 선거에 패해 물러나면서 2022년 1월, 임기 마지막 날에 교도소에서 나오는 즉시 병원에 입원시킨다는 조건으로 석방을 허가했다.

빈스 길머와 벤저민 길머의 이야기가 2013년에 한 방송을 통해 알려진 후, 이들의 사연은 대중적인 관심을 끌었다. 벤저민은 그의 치과 치료비와 입원비를 모금하는 캠페인을 진행했고, 2023년에는 이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