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길머의 수수께끼 ①
• 댓글 2개 보기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타인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 수 있을까? 미국의 한 시골 마을의 클리닉에 부임한 의사가 전임자의 비밀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게 되고, 그런데도 그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음을 알게 된다.
아래는 책과 기사, 방송으로 소개된 유명한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마치 추리소설과 의학소설이 만난 것 같은 실화다.
의대를 졸업한 후 수련 기간을 끝낸 벤저민 길머(Benjamin Gilmer)는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클리닉에서 일하게 되었다. 미국에는 그렇게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며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의사들이 있는데, 벤저민 길머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 마을의 '마을 의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벤저민 길머는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클리닉을 설립한 전임자도 자기와 같은"닥터 길머"였다는 것이고—전임자의 이름은 빈스 길머(Vince Gilmer)였는데, 길머가 미국에서 드문 성은 아니다—그가 그 클리닉을 그만두게 된 이유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감옥에 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에서 흔하게 듣는 것처럼) 다투다가 총으로 쏜 게 아니라, 목을 졸라 죽였고, 시신을 확인할 수 없도록 손가락을 잘랐다는 끔찍한 얘기였다.

벤저민은 전임자도 "닥터 길머"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우연히 같은 이름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끔찍한 존속 살인범이라는 얘기는 달랐다. 클리닉을 찾는 환자들은 그 사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닥터 길머"가 부임했다고 하면 당황할 것이라는 우려가 벤저민을 채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사람 중에는 병원에서 농담을 하는 줄로 생각한 사람도 있었고, 어떤 환자는 "닥터 길머"가 진찰실에 들어온다는 얘기를 듣고 공황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살인자가 풀려나서 복직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부임 초기의 오해가 풀리고, 벤저민 길머가 빈스 길머와 완전히 무관한 사람임을 알게 된 환자들은 벤저민에게 전임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건, 마을 사람들은 빈스 길머가 뉴스에 나온 것처럼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며 그를 옹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환자들은 벤저민에게 빈스 길머가 얼마나 훌륭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는지 알려주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루스 트레이시라는 여성은 자기가 직장을 잃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미국에서는 직장을 잃으면 의료 보험도 사라지는 일이 흔하다. 루스의 남편은 일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루스마저 직장을 잃으니 보험 없이 비싼 약을 사야 하는 상황이었다. 빈스는 루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 주고,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우는 루스를 안아주고 다독여줬단다. 그리고 자기가 제약 회사에서 받은 샘플을 모아 루스에게 주었다. 무료로 진료를 해주고, 약까지 공짜로 주는 그에게 루스가 "이래도 되느냐"고 하자, 빈스는 "우리 모두가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했다.
루스에게만 그렇게 한 게 아니었다. 빈스의 환자들이 들려주는 얘기가 하나같이 그랬다. 덩치가 커서 "Bear(곰)"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빈스는 환자들을 만나면 꼭 안아주었고, 돈이 없어 차를 수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수리비를 대준 적도 있고, 진료비가 부족한 사람에게서는 옥수수 한 자루를 진료비 대신 받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필요하면 옛날 의사처럼 왕진 가방을 들고 환자의 집을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기자가 벤저민이 들은 얘기가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마을 사람들을 만났을 때 들은 얘기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에게 그 살인 사건에 관한 흥미로운 얘기를 듣게 되었다. 빈스 길머가 아버지를 죽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빈스는 아버지의 고통을 끝내드리기 위해 어려운 선택을 했을 뿐이라는 거다. 기자는 "그런 의도였다면 목을 조르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의사라면 치사량의 약물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자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은 깜짝 놀라며 닥터 길머가 아버지의 목을 졸라 죽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빈스 길머가 아버지를 살해했을 때의 나이는 벤저민이 그 클리닉에 부임했을 때의 나이와 똑같은 41세였다. 환자들에게서 전임자의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되면서 벤저민은 빈스가 도대체 왜 아버지를 죽였는지 궁금해졌다. 재판에서 유죄를 받은 이유는 그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벤저민이 궁금했던 건 살해 여부가 아니라, '왜?'였다. 환자들이 사랑하는 따뜻한 성품의 의사가 아버지를 잔인하게 죽인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벤저민은 자기가 보던 환자에게서 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이 여기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감옥에 있는) 닥터 길머가 알고 있는 걸 아세요?" 당연한 얘기였다. 감옥에 있다고 해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를 리 없었다. 벤저민이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가 일하는 클리닉은 빈스가 설립한 인생의 작품이었다. 그런 그곳을 자기와 같은 성을 가진 또 다른 "닥터 길머"가 차지해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된 빈스의 기분은 어떨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게 되자 벤저민에게 공포가 찾아왔다. 어느 날 빈스가 감옥에서 나와 벤저민을 찾아온다면?
물론 벤저민이 느낀 건 비현실적인 공포였다. 빈스가 출옥할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벤저민의 환자 중 한 사람이 "닥터 길머가 가출옥했다고 들었다"는 말을 한 후로 벤저민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가출옥 소식은 근거 없는 루머에 불과했지만, 그 이후로 몇 주 동안 벤저민은 출근하면서 클리닉 문을 열기 전에 뒤를 돌아보고 누가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고, 밤에는 악몽을 꾸었다.

벤저민은 빈스에 대해 양가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환자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빈스는 환자에게 따뜻하고 훌륭한 의사였지만, 법이 판단한 빈스는 자기 아버지를 잔인하게 살인한 살인자였다. 그 두 버전의 '닥터 길머' 중 어느 쪽이 진짜 빈스였을까?
기자가 벤저민을 인터뷰한 내용을 들어 보면 빈스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빈스가 정말 악의를 갖고 아버지를 상대로 미리 준비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기 힘든 듯했다. "저는 혼란스러워요. 빈스가 좋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나쁜 사람이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는 빈스가 세운 클리닉에서 일하는 것이 마치 유령이 나오는 집에 사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나쁜 유령이 아니라는 말로 위로를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그 유령이 어떤 쪽인지 모르는 아버지처럼 불안했다. 빈스의 정체를 제대로 파헤쳐 봐야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그것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좋은 의사가 존속 살인범이 된 이유를 알지 않고서는 그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벤저민은 빈스와 함께 일했던 클리닉 직원 테리 월리에게 빈스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기로 했다. 테리는 빈스는 물론이고 빈스의 아내였던 캐런(Karen)과도 가까웠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의사였던 캐런은 빈스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고, 테리와 그의 아이들을 가족처럼 가깝게 대했다고 한다.

테리에 따르면 살인사건이 일어난 그 해에 빈스에게 큰 사건이 두 개 일어났다. 하나는 대형 교통사고였다. 그가 탄 트럭이 고속도로 나들목(출구)에서 전복되면서 가로등을 들이받았고, 트럭은 쓰러진 가로등 아래 깔렸다. 빈스는 출동한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갔는데, (아마도 빈스의 신분증을 확인한) 경찰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아내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자기 이름이 "바비 브라운(Bobby Brown)"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자기가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했고,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하루가 지나자, 빈스의 기억은 되돌아왔고, 퇴원할 수 있었지만, 그가 머리를 크게 다쳤던 것만은 분명하다는 게 직원 테리의 말이었다. 하지만 테리는 거기에 이상한 얘기를 덧붙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빈스가 고의로 그 사고를 낸 것 같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빈스는 그 해에 의료 면허 시험(board exam, 합격한 후에도 10년마다 다시 시험을 보고 갱신해야 한다)을 앞두고 있었다. 빈스는 유난히 시험에 약했고, 몹시 긴장한 상태였다는 게 테리의 말이다. 빈스의 어머니에 따르면 빈스는 어릴 때부터 주의집중장애가 있었다. 빈스가 시험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사고를 낸 것 같다는 게 테리의 생각이다. 게다가 빈스는 낡은 트럭을 바꾸고 싶어 했지만, 집안에서 돈을 관리하는 아내 캐런이 새 트럭을 사는 데 반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고가 났고, 결과적으로 빈스는 새 트럭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빈스가 정말 고의로 사고를 냈다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빈스는 상당히 위험한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 빈스가 갑자기 캐런과 이혼한다는 얘기를 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캐런에게 물어보니 이혼은 빈스가 요구한 것이었다. 아내는 결정하기 전에 함께 상담을 받아보자고 했지만, 빈스는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그러고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 집을 나가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빈스는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이 모든 변화가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기 전 몇 달 동안 일어났다. 빈스는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닥터 길머의 수수께끼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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