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빈)를 여행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알게 된 게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젊은 시절 한 때 비엔나에서 살았다는 사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유명한 미술학교(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 두 번이나 지원했다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유명하고,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몰랐던 건 히틀러가 인종주의적 사고에 처음 노출된 곳도 비엔나였다는 사실이었다.

히틀러는 1908년부터 1913년까지 비엔나에 살았는데, 그 시기 비엔나의 시장이 카를 뤼거(Karl Lueger)였다. 뤼거는 비엔나를 현대적인 도시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지만, 현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전신이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CS) 소속이었다. 기독사회당은 포퓰리스트 정당으로 반유대주의를 내세우고 있었고, 훗날 나치주의의 모델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단체였다. 1897년에 시장에 취임한 그는 "외세"를 몰아내겠다고 다짐했고, 그가 말하는 외세는 결국 오스트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을 의미했다.

뤼거는 실제로 유대인을 몰아내거나 핍박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히틀러는 카를 뤼거의 반유대주의에 영감을 받았고, 훗날 독일의 지도자(Führer)가 되어 이를 실행에 옮긴다. 히틀러는 1919년에 독일 노동자당(DAP)에 가입하는데, 이 당이 이듬해 바꾼 이름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즉 나치당이다.

히틀러는 1933년에 독일의 수상이 되었고, 그 직후에 일어난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을 계기로 비상사태법을 통과시켜 헌법을 무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사실상 독재자로 변모한다. 하지만,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인 1920년대 후반에 이미 그의 잠재적 영향력을 눈여겨보던 사람들이 있었다. 독일인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언론에서 그를 취재하고 싶어했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 언론에서도 그의 인터뷰를 추진했지만, 나치당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1931년의 아돌프 히틀러. 아직 독일의 권력을 잡기 전이다.
이미지 출처: The Guardian

그러다가 1931년, 나치가 끈질기게 요청하던 미국 기자에게—아직 수상이 되기 전인—히틀러를 인터뷰할 기회를 처음으로 줬는데, 그 기자가 바로 도로시 톰슨(Dorothy Thompson)이다. 지금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2차 세계 대전 당시만 해도 톰슨은 히틀러와 나치주의에 대항해서 싸우는 대표적인 언론인이었다.

도로시 톰슨은 유대계는 아니었지만 유대인들이 지금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오니즘(Zionism)을 지지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난 후 중동을 방문해서 유대계에 밀려 살던 땅에서 쫓겨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목격한 톰슨은 생각을 바꿔 이를 반대했다. "이곳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면 이곳에서 끝없는 전쟁을 부를 것"이라는 게 톰슨의 경고였다.

하지만 히틀러를 가장 강하게 비판하던 언론인이 유대인 정착지에서 일어나는 팔레스타인 핍박을 비판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톰슨이 변절했다고 생각했다. 21세기에 다시 고개를 든 극우 파시즘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우리로서는 이스라엘의 행동과 히틀러의 행동을 모두 비판하는 것이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고, 특히 유대계가 운영하는 미국 매체들에서 기사를 게재하지 않기로 하면서 1930, 40년대에 가장 유명했던 저널리스트 도로시 톰슨은 빠르게 잊혀졌다.

도로시 톰슨을 표지 사진에 게재한 타임 (1939년)
이미지 출처: Videos Index on TIME

도로시 톰슨의 두 경고—히틀러에 대한 경고와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경고—는 모두 적중했지만,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엇갈린다. 당시의 여성들과 달리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톰슨을 곱게 보지 않는 시선이 많았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톰슨의 생각이 항상 옳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사람의 판단이 항상 옳을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도로시 톰슨의 삶은 입체적이고 흥미롭다.


도로시 톰슨의 삶은 당시 여성들의 전형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가 성장한 환경은 당시 여성들이 살아야 했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도로시는 1893년 뉴욕주 북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감리교 목사로, 영국과 독일에서 온 이민자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기 위해 그곳으로 이주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도로시가 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은 패혈증인데, 사람들은 무허가 낙태시술의 부작용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한다.

아버지는 곧 재혼했지만, 딸이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본 아버지는 도로시가 16살 때 시카고에 있는 자기 여동생들에게 보냈다. 그곳에서 성장한 도로시는 당시에는 드물게 여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고, 학교를 옮겨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공부하고 1914년에 우수한 성적(cum laude)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당시의 교육 받은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성의 선거권을 보장받기 위한 운동에 참여했다.

톰슨을 비롯한 여성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미국은 1920년에 여성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수정 헌법 19조를 인준했다. 인생에서 다음 목표를 고민하던 톰슨은 유럽으로 건너가서 글을 쓰면서 기자가 되기로 한다. 기자가 되려면 입사 시험을 보고 언론사에 입사하는 한국 문화에서는 다소 낯선 방법이지만, 톰슨이 유럽으로 가기로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20년경의 도로시 톰슨
이미지 출처: Wikipedia

미국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글을 많이 써서 이름을 알려야 한다. 처음에는 취재 능력도, 글솜씨도 부족하니 원고료를 받지 못하고 무료로 여기저기 기고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다가 글이 좋아지면 매체의 편집자 눈에 띄고, 작은 매체에서 원고료를 받거나 기자(reporter, staff writer)로 취직해서 일하게 된다. 그렇게 경력이 쌓이고, 취재력이 좋아지면 더 큰 매체로 옮겨가는 게 미국의 일반적인 기자 경력이다. 지금은 흔하지 않지만, 신디케이트(sydicate)를 통해 여러 매체에 기사를 동시에 게재하기도 한다. AP, AFP 같은 통신사에 소속되어 있어도 기사가 여러 매체에 실린다.

1920년대는 미국에서 신문과 잡지의 전성기였다. 일간 신문만 2,000개가 넘었기 때문에 글솜씨와 취재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글로 먹고 살 수 있었다. 문제는 시장이 크다 보니 공급도 많았고, 그러니 일을 막 시작하려는 도로시 톰슨 같은 사람은 미국 내에서 나오는 뉴스로는 경쟁하기 힘들었다. 이미 많은 취재원을 가진 경력 기자들이 선점하는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렇게 의욕은 넘치고, 경력은 부족한 이들에게 좋은 출발점이 유럽이었다. 유럽은 항상 전쟁으로 시끄러운 곳이었지만, 특히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고, 많은 뉴스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미국인에게는 불안한 지역이고, 외국어를 배워야 하고, 가정을 꾸리기 힘드니 경력직은 회피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젊은 글쟁이들에게 좋은 출발점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로,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1차 세계 대전 때 유럽으로 건너가서 머물며 기사를 썼고, 훗날 소설의 소재도 그곳에서 얻었다.)

도로시 톰슨은 그렇게 유럽으로 건너간 젊은 기자, 특파원(통신원) 지망생 중 하나였다.

도로시 톰슨의 1940년 모습
이미지 출처: NPR

톰슨은 기자로서의 감이 뛰어났던 것 같다. 그가 런던으로 떠난 게 1920년 6월이었고, 8월에 아일랜드로 가서 신 페인(Sinn Féin) 소속의 아일랜드 독립 지도자 테런스 맥스위니(Terence MacSwiney)를 인터뷰했는데, 인터뷰 당일에 맥스위니가 영국 정부에 체포되었고, 두 달 후에 감옥에서 단식 투쟁을 하다 사망한 것이다. 톰슨의 인터뷰는 맥스위니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한 인터뷰가 되었고, 그 기사는 국제 뉴스 서비스(INS)를 통해 미국 신문들에 게재되었다.

그 기사를 본 필라델피아 퍼블릭 레저(Philadelphia Public Ledger)의 비엔나 특파원직을 제안했고, 그렇게 해서 도로시 톰슨은 미국 신문사의 특파원이 되었다. 이곳에서 톰슨은 존 건터(John Gunther), G.E.R. 지디(Gedye) 같은 당대의 유명한 영미권 특파원들과 교류했고, 독일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25년에는 퍼블릭 레저의 중부유럽 총괄 특파원으로 승진했다.

톰슨의 대표적인 전기인 'American Cassandra: The Life of Dorothy Thompson'의 저자 피터 커트에 따르면 톰슨은 "주요 언론사의 해외 지국을 총괄하게 된 첫 여성이었고, 유럽에 거주하는 해외 특파원들 사이에서는 여왕으로 통했다." 톰슨은 비엔나에 머무르는 기간 중 임페리얼 호텔에 살았는데, 이 호텔은 톰슨 외에도 많은 해외 매체의 특파원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내가 지금 묵고 있는 호텔에서 걸어서 20여분 떨어진 곳에서 지금도 영업하고 있어서 이 글을 쓰는 중에 잠시 다녀왔다.)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역사학자 데보라 코헨(Deborah Cohen)의 책 'Last Call at the Hotel Imperial'은 당시 이 호텔에 머물며 2차 대전을 취재하던 특파원들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비엔나의 임페리얼 호텔과 데보라 코헨의 책
이미지 출처: 박상현, Amazon

'도로시 톰슨의 경고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