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도 게재 되었습니다.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49년 동안 미국 여성의 임신 중지 권리를 보장해온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발표가 나온 지난달 말, 많은 미국인이 국기인 성조기를 거꾸로 걸면서 대법원 결정에 항의했다.

이미지 출처: 레딧(Reddit)

모든 여론 조사 결과가 대다수 미국인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대법원은 1973년에 나온 판결이 크게 잘못된 법 논리를 따랐다는 이유로 뒤집었다. 새로운 결정을 지지해온 쪽에서는 “태아의 생명은 국민 다수의 의견과 상관없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수의 의견과 다른 판결에 개의치 않았다.

대법원의 이번 결정에 반대한 사람들은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대법관이 국민 의견과 다른 쪽으로 법 해석을 내리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사법 쿠데타”라고 비판했다. 국기를 거꾸로 걸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항의의 표시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왜 하필 국기를 뒤집었을까? 국기를 뒤집는 게 왜 항의의 표시가 되는 걸까?

우리는 항의의 표시로 국기를 불태우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이 불에 탄 국기는 성조기일 것이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정부의 결정, 혹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국기를 태우는 일이 종종 있었고, 다른 나라에서는 미국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양키 고 홈!”을 외치며 성조기를 태웠다. 물론 많은 나라가 자국 국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금하면서 꼭 버려야 할 때는 소각하게 하지만, 버리기 위해 국기를 소각하는 것과 항의하기 위해 공개장소에서 태우는 건 분명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종류의 행동은 문화적인 배경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항의의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가령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문화에서는 그 손동작을 모욕의 의미로 사용할 수 없고, 거꾸로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는데 타문화에서 모욕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생긴다. (1992년 호주를 방문 중이던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평화의 표시로 검지와 중지를 세워 V 표시를 했는데, 손등이 군중을 향하는 바람에 그 나라에서 욕설로 받아들인 일이 있다.) 따라서 국기를 뒤집었을 때는 그 의미를 다른 미국인들, 특히 대법관들과 정치인들이 알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문화적 배경이 있을까?

물론 성조기를 거꾸로 들고 태우면 항의의 의미는 더욱 분명하다. (이미지 출처: Babalú Blog)

가장 직접적인 답은 미국의 국기법(U.S. Flag Code)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법에 따르면 미국 국기는 위아래를 바꿔서 게양할 수 없는데, 한 가지 예외를 허용하고 있다. 바로 “생명과 재산이 큰 위협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심각한 위기상황(dire distress)”이다. 이런 상황에 부닥칠 경우 국기를 거꾸로 걸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대법원 결정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성조기를 거꾸로 게양하는 것은 대법원의 결정으로 자신, 즉 국민의 생명이 큰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성조기가 거꾸로 걸릴 수 있는 예외 조항을 가진 미국의 국기법

물론 성조기를 거꾸로 내건 사람들이 모두 그 시점에 실제적인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의 새로운 판결 때문에 미국 남부를 포함한 보수적인 지역에서는 성폭행을 당했거나 근친상간의 경우에도, 심지어는 산모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임신중지 수술을 할 수 없도록 주법을 수정하고 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병원에서 안전한 임신중지 수술을 허용하지 않은 결과 많은 여성이 스스로 이를 시도하거나 의사면허가 없는 사람에게서 수술을 받다가 사망하는 일이 흔했다. 이제 미국 헌법의 보호가 사라진 세상에서 과거처럼 사망하는 여성들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경고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이 큰 위협 아래”에 처하게 되었다는 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미국의 국기법은 왜 그런 특이한 예외 조항을 두게 되었을까? 사실 국기를 거꾸로 내거는 행동은 해상에서 시작되었다. 서구 국가들이 커다란 범선을 만들어서 대륙과 대륙 사이를 이동하던 시절을 생각해보자. 그 시절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배에서 사고가 나거나 비상사태가 발생해서 선원과 선박이 큰 위험에 처하게 되면 지금처럼 무선, 위성통신을 사용해 구조를 요청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배, 특히 상선들은 정해진 항로를 따라 이동했기 때문에 항로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 뱃길을 지나는 다른 배들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1819)

예나 지금이나 바다를 지나는 모든 선박에는 위험에 빠진 사람이나 선박에 지원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대양에서 가장 빠르게 구조의 손길을 제공할 수 있는 건 근처 선박이기 때문이다. 1912년 대서양을 건너다가 침몰한 타이태닉호가 빙산과 충돌한 직후 근처를 지나는 선박들에 구조 요청을 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렇게 요청을 받은 주변 선박 선원이 모르는 다른 선박 구조를 꺼리지 않는 이유는 이런 관례가 깨지지 않고 지켜져야 자신이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선상에서 일어난 위기 상황을 지나는 선박들에 알릴 방법이 없었다. 그때 사용하던 것이 깃발이다. 전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국제신호기’ 혹은 ‘국제기류신호’는 영어의 알파벳과 1에서 10까지의 숫자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무늬의 깃발로 만들어서 단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에 따르면 N과 C, 두 개의 깃발을 게양할 경우 “나는 위험에 처해있다. 도움을 요청한다”는 메시지가 된다.

물론 이런 오래된 신호기 깃발을 모든 선박이 다 갖추고 있고, 모든 선원이 숙지하고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럴 때 가장 쉽게 사용하는 것이 어느 선박이나 갖추고 있는 자국 국기를 거꾸로 거는 것이다. 많은 나라 선박이 오고 가는 항로에서 선박들끼리 서로를 확인하다가 상대 선박에 국기가 거꾸로 걸려 있으면 누구나 ‘저건 뭐지?’하고 재확인하게 되는 데서 비롯된 연락방법이다.

영국의 국기 유니언잭의 경우 위아래를 구분하기 힘들지만 선박에 사용하는 깃발인 엔사인(ensign)은 붉은 깃발 왼쪽 상단에 유니언잭을 넣었기 때문에 뒤집을 경우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영국의 국기 유니언잭의 경우 위아래를 구분하기 힘들지만 선박에 사용하는 깃발인 엔사인(ensign)은 붉은 깃발 왼쪽 상단에 유니언잭을 넣었기 때문에 뒤집을 경우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반드시 거꾸로 건 깃발만이 구조신호는 아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아무 깃발에 매듭을 묶어 놓거나, 깃발이 아닌 다른 걸 걸어놓아도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다시 말하면 마스트, 혹은 깃대에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게 걸려 있으면, 심지어는 아무 깃발을 걸지 않은 경우도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한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바다를 지나는 배들은 항상 위험을 가정하기 때문에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고, 그런 동료애로 상대방의 상태를 민감하게 파악하기 때문이다.

선박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신호는 다양하다. (출처: 위키피디아)

미국인들이 국기를 거꾸로 거는 것은 이런 문화적 배경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미국의 국기법이 정하는 예외 조항에 문자적으로 해당한다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국기법은 법이기는 해도 처벌조항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의로 잘못 사용하더라도 특별히 강제할 방법은 없다. 오히려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해서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국기를 불태우는 것보다는 훨씬 더 양호하고 덜 자극적인 방법으로 국기를 거꾸로 게양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