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의 시간 ①
• 댓글 2개 보기바닥을 치는 이야기는 많다. 우리는 잘못된 선택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이 잘못을 깨달은 후, 삶의 폐허를 딛고 다시 기어오르는 이야기를 종종 만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서 우리는 감동을 얻고, 때로는—아니, 많은 경우—'나는 저기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비밀스러운 안도감을 즐기기도 한다. 오늘 소개할 이야기에서도 그런 감동과 안도감을 찾는다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오늘의 이야기는 뉴욕타임즈의 미디어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데이비드 카(David Carr, 오터레터의 '테크 기업이 된 신문사'에서 그의 이야기를 잠깐 했다)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다. 내가 카의 이름을 신문에서 알아볼 시점에 그는 업계에서 베테랑이자,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쓰는 기사도 인기였지만, 매일 날카롭게 날리는 트윗은 미국 기자들은 누구나 읽는 게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2008년에 책을 출간하면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데이비드 카(2015년에 뉴욕타임즈 뉴스룸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가 젊은 시절에 지독한 마약 중독자였다는 사실은 그와 가까운 기자들 외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책 'The Night of the Gun'의 부제는 '기자가 직접 취재한 자기 삶의 가장 어두운 이야기'이다. 이 부제가 많은 것을 설명해 주지만, 이 책이 나온 후 저자가 직접 책의 일부를 긴 기사 형태로 신문에 소개('Me and My Girls')하면서 나도 그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그 책과 기사가 나온 2008년은 내가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던 때였다. 데이비드 카의 문제는 우울증이 아니었고, 나의 문제는 마약 중독이 아니었지만, 이 글은 내가 우울증을 벗어나게 도와준 많은 것들 중 중요한 하나였다. 나는 지금도 이 글을 내 우울증이 나아지기 시작한 계기로 기억한다.
조금 긴 글이지만 어디에선가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도 그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옮겨본다.
만약 내가 여자들을 때리고, 싸구려 마약을 팔던 뚱뚱한 깡패였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과연 내 이야기를 듣고 싶을까? 그게 아니라, 마약 중독에서 회복된 후,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졸업하고, 쌍둥이 딸의 양육권을 되찾아 혼자 키웠다면? 그러면서 암도 극복했다면? 아마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고 싶을 거다.
하지만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다. 인간이라는 종(種)은 자기의 이야기를 직접 해석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어울리지 않는 얘기는 빼 버린다. 나도 내가 혼자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웠다고 말한 다음에야 내가 그 아이들의 엄마를 때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는 우리 삶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거짓말을 하지만, 그 결과 우리 자신은 훨씬 그럴듯한 인물로 포장된다.
마약 중독자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가? 한 넝쿨에서 다음 넝쿨로 이동하는 타잔이 다음 넝쿨을 찾는 것처럼, 중독자들은 약효가 떨어지면 다음 약 주입을 기다린다. 그렇게 중독자의 시간은 15분 단위로 흐른다. 1988년의 후반 몇 달 동안 나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북부에 있는 한 집에서 코카인을 주사하며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의 "패스트카(Fast Car)"를 듣고 있었다. "여기보다 못한 곳은 없어. 0에서 시작했으니 잃을 게 없어. (Any place is better. Starting from zero, got nothing to lose.)"라는 가사가 나의 이야기라는,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코카인을 주사하거나 흡입한 후에는 몸이 뒤틀리며 잠을 잘 수 없게 된다. 창문 블라인드의 구석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밖을 내다보며 경찰차가 여기로 오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하루 종일 그랬고, 밤새도록 그런 상태에 있었다. 무료함과 공포가 공존했다. 마약 중독의 말기는 그렇게 경찰이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나날이다. 경찰이 아니라면 그 누군가가 찾아와 내 시신을 내 부끄러움과 함께 땅에 묻으러 올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있는 집에서 누군가가 나와 똑같이 블라인드 구석을 들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두운 밤, 블라인드가 살짝 움직이며 빛이 빠져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집에 있는 사람들과 내가 블라인드를 들고 내리면서 모스 부호처럼 신호를 주고받고 있다는 망상에 빠졌다.
우-리-도-약-에-취-해-있-어.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도 웬만해서는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과 내가 가진 "공통의 취미"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다.
나는 외로웠지만, 홀로 사는 건 아니었다. 내가 머물던 곳은 내 여자 친구 애나(Anna)의 집이었다. 애나는 주위에 마약을 파는 공급책이었고, 예전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둘, 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가 있었다. 애나가 외출한 어느날 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었다. 코카인을 흡입하는 데 사용하는 장비를 새로 마련했고, 아이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집 안에서 깨어있던 건 나와 발리(Barley)뿐이었다. 발리는 코기 잡종으로, 내가 대학생 때부터 키우던 개다. 나는 혼자 마약에 취해있을 때는 발리에게 말을 걸곤 했다. 그렇다고 발리가 내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에서 발리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미친 걸까? 맞다. 나는 언제 이 짓을 그만둘까? 아마 영원히 못 할 거다. 지금 신이 나를 지켜 보고 있을까? 그러실 거다. 신은 모든 걸 보고 계신다. 블라인드가 올라가는 것도 보실 거다.
그렇게 약에 취해 편집증에 빠지면 나는 경찰은 신이 보낸 사자(使者)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처벌하러 온다기보다는 나를 벽을 향해 밀어붙이고 내가 저지른 잘못과 무관한 사람들—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고 오는 사람들일 것이었다. 그게 내가 저지른 일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일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던 어느날 밤이었다. 코카인을 흡입할 때마다 내 신경 시냅스는 경고음을 보냈다, '경찰이 온다. 지금 당장 이리로 경찰차들이 밀어 닥칠 것이다.' 나는 집 앞에 나가 앉아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이 오면 집 안에 마약과 마약 복용 도구들이 있지만 총은 없다고 실토하고, 그런데 아무런 잘못이 없는 어린아이 네 명이 있다고 알려주기로 했다. 그러면 경찰들은 내게 수갑을 채우고 머리를 숙이게 한 채로 나를 데리고 집 안에 들어가 내가 알려주는 곳에서 마약과 주사기와 흡입용 파이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선한 여성들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안전하고 행복한 곳을 데려갈 것이다.
그게 내 계획이었다.
나는 코카인을 한 번 더 빨고 나서 발리와 함께 밖으로 나가 집 앞 계단에 앉았다. 어두운 바깥은 쥐 죽은 듯 조용했지만, 약기운이 돌면서 내 눈과 심장, 이마의 혈관이 고동치고 있었다. 그 순간,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 표시가 없는 차량 6대에 나눠 탄 경찰들이 불을 끈 채 줄 지어 다가왔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경광등도, 사이렌도 없었다. 우려하던 일이 드디어 일어난 것이다.
경찰차에서 정복을 입은 경찰과 사복의 형사들이 섞여 나왔고, 나는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서 그들이 긴 총을 땅을 향해 45도 각도로 들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집 앞 계단에서 내가 선택한 어두운 삶의 결과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것을 막고 있다는 묘한 자부심을 느꼈다. 끊임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던 내가 드디어 옳은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방향을 바꾸더니 길 건너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경찰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엎드려! 팔 뻗어! 갑자기 움직이면 쏜다!" 반바지 운동복을 입은 사내가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지만, 이미 예상하고 기다리던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그후로도 고함 소리가 몇 번 더 들리고 조용해졌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나머지 상황을 창문 블라인드의 모퉁이를 들고 살펴봤다. 경찰들은 작전을 종료하고, 체포한 사람들에 수갑을 채워 경찰 밴에 태웠다. 나는 들었던 블라인드를 다시 내려 놓고 내 할 일을 했다. 이번은 내 차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어느 무더운 여름날, 마약의 중독에서 벗어난 나는 나의 과거를 돌아보기 위해 그 시절 내가 살던 올리버 애버뉴의 집 앞에 앉아 경찰이 들이닥친 그날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났고, 일어나지 않았는지 힘겹게 회상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당시에는 백인 동네였던 곳이 이제 흑인 동네로 바뀌었지만, 그것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깔끔한 잔디밭과 많은 아이들이 보였고, 그 시절 주택 안에서 벌어지던 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좋은 직장에 다니게 된 내가—어린 쌍둥이는 자라서 대학교에 가게 되었다—양복을 입고 돌아와 앉아 있으니 그때의 일이 정말로 일어난 걸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내가 계속 앉아있자 내가 살던 집의 거실 창문 블라인드의 구석이 살짝 올라갔다. 이제 그만 자리를 뜰 때가 된 것이다.
나는 내 입으로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내가 내 얘기를 하는 건, 지하철에서 냄새나는 드레드록스(dreadlocks) 머리를 하고 "스탠드 바이 미(Stand by Me)"를 부르며 행인들에게 돈을 구걸하는 마약 중독자가 어쩌다가 그 지경이 되었는지를 들려주는 것보다 특별히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약에 빠졌던 사람이 얘기를 들려준다고 해서 그가 정말로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기억한다고 해도 그걸 인정하기도 힘들 가능성이 높다.
마약 중독자는 인지적 곡예사(cognitive acrobat)에 가깝다. 가는 곳마다 서로 다른 버전의 자신을 소개하고, 만나는 사람들이 원하는—정확하게 말하면 중독자가 원하는—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들이 자기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한다. 내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온갖 종류의 마약에 중독된 삶을 살았던 결과 나의 뇌는 온전하지 않다.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중독자의 말은 신뢰하기 힘들다. 비록 내가 중독에서 벗어났지만, 나는 약에 취할 기회를 찾기 위해 입을 놀리던 사람이다.
나처럼 무책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 C형 간염을 앓고,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고, 에이즈에 걸리고, 노숙자가 되어 차가운 공원 벤치에서 생활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나는 예쁘고 똑똑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세 명의 아이를 얻었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업을 갖고 있다. 내가 다른 마약 중독자의 삶과 다른 여정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뭐였을까?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버전의 이야기는 한번 들려 줄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적어도 그 일들이 일어난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니까.
나는 미국 중부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서쪽 끝에 있는 교외 지역에 사는, 존 치버(John Cheever)의 소설에 나올 법한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모님은 7명의 자녀를 낳으셨고, 나는 그중 넷째였다. 그런 평온한 중산층 동네에서는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밖에서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집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가정이었다. 부모님은 친절한 분들이셨고, 우리 동네에는 마약을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나는 넙죽 받아먹었을 것이고, 더 달라고 사정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중독에 취약한 체질을 타고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서부로 여행을 떠났다. 소위 레인보우 패밀리(Rainbow Family, 무지개가족. 1970년대 반문화反文化를 지향하며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던 히피 집단들을 가리킨다—옮긴이)의 버스를 얻어 타고 함께 이동하면서 페요테(peyote, 환각성분이 든 선인장)를 얻어 복용했고, 그 과정에서 환각제가 삶에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체험했고, 사면발이(crabs, 성관계로 옮는다)로 지독하게 고생하기도 했다. 미니애폴리스로 돌아온 나는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살았다. 기계를 조립하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내 작업감독은 돌리 파튼(Dolly Parton)의 가슴을 숭배하는 키가 아주 작은 남자였다.
그후 주립대에 입학해 두 곳을 차례로 다녔다. 대학에서 나는 친구는 많았고, 돈은 거의 없었고, 즉흥적인 충동에 끌려 살았다. 정상적인 식사 대신 팝타르츠(Pop-Tarts)와 마운틴듀 같은 간식거리를 먹고 살았고, LSD, 페요테, 마리화나, 환각버섯, 메스칼린, 암페타민, 콰루드, 발륨, 아편, 해시 같은 약물과 온갖 종류의 술을 마셨다. 나는 완전히 쓰레기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21살 생일, 내가 일하던 고급 식당에 찾아온 손님 하나—그는 돔 페리뇽 같은 비싼 술을 마시는 마약 딜러였다—가 양철로 만든 담배통을 몰래 내 손에 쥐여주며 나중에 화장실에서 열어보라고 했다. 나는 화장실에서 그 안에 든 파우더를 코로 흡입했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엔도르핀이 치솟으며 전에는 모르던 감각이 몸 구석구석에서 살아났다. (코카인을 처음 경험한 것이다—옮긴이)
마약 중독자들은 그 마약을 처음 경험했을 때의 강렬한 기억을 잊지 않는다. 마약을 계속 복용하면서 엔도르핀이 점점 적게 나오게 되지만, 그래도 첫 기억은 떠나지 않고 남는다. 1985년이 되면 나는 프리베이싱 코카인(freebasing coke)이나, 그보다 저렴한 크랙(crack cocaine)도 하게 되었다.
"크랙 중독자(crackhead)"는 마약 중독자들 중에서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빨이 다 빠진, 정신병자 같은 메타암페타민(meth) 중독자들이 나타나서 최악의 타이틀을 차지하기 전까지 크랙 중독자는 "중독자 조직표"에서 최하위에 있었다. 코카인을 처음 시작하면서 담배처럼 피울 때만 해도 마치 환상적인 놀이터에 입장한 아이처럼 경이로움을 느낀다. 크랙을 강렬함을 처음 경험한 사람이 원하는 건 단 하나, 더 많은 크랙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충격적인 경험에 놀라 물러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 친구가 미네소타주 뉴포트에 있는 한 오두막에서 내가 크랙에 중독되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좋은 친구 사이고, 내가 너를 참 좋아하지만, 그때의 너는 네가 아니었어. 그때 너랑 얘기하면 내 친구 데이비드가 아니라, 그냥 정신 나간 사내와 얘기하는 것 같았지. 네가 동물처럼 행동하는 걸 보면서 두렵더라고."
'중독자의 시간 ②'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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