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천국, 시네마 지옥
• 댓글 남기기며칠 전 가디언에서 흥미로운 오피니언 칼럼을 읽었다. 요즘 영화들이 과거의 성공작들을 활용해 안전하게 돈을 벌려고만 하면서 지나치게 위험 회피적(risk-averse)이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칼럼의 주장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길지 않은 글인데 공감할 만한 다양한 예를 들고 있어서 직접 읽어보면 더 좋으니 추천한다).
최근 픽사(Pixar)의 새 애니메이션 '라이트이어(Lightyear)'의 예고편이 공개되었는데, 예상외로 사람들의 반응이 없었다. 평소 픽사가 주는 것들이 모두 담겨있는데도 말이다. 이 영화는 픽사의 흥행작 '토이스토리'에 등장하는 버즈 라이트이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배경 이야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헐리우드가 흥행작의 후속편(시퀄, sequel)을 끝도 없이 내놓고 있다는 거다. 애초에 그 영화 속 영웅이 왜 환영을 받았는지를 잊고 그저 프랜차이즈에서 돈을 짜내기 위해 리부트(reboot), 프리퀄(prequel), 배경 이야기(origin stories)를 만들어낸다. '인디애나 존스' 3편(1989년 작품)이 리버 피닉스를 캐스팅해서 '인디애나 존스'의 어린 시절을 보여줄 때만 해도 재미있게 봐줬는데, 그 이후로 그런 과거 회상이 한 편의 영화로 만드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스타워즈'의 한 솔로, '101 달마시안'의 크루엘라 드 빌,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마법사, '스파이더맨'의 베놈, '배트맨'의 조커 같은 캐릭터들이 그런 예로, 주인공의 배경 이야기도 모자라 악당까지 짜내면서 배경 이야기를 만든다.
이렇게 탄생한 모든 작품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배경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주인공 캐릭터는 원래 흥행했던 전작에서 이미 캐릭터가 완성된 채 과거 이야기에 등장하기 때문에 극적인 요소가 사라진다.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 영화 '대부(Godfather)'의 2편 정도가 예외에 해당하는 드문 예다.
헐리우드에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캐릭터가 바닥난 게 아니다.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정작 극장판 영화는 시퀄, 프리퀄, 리부트로 채워지는 거다. 영화 스튜디오들이 안전한 게임을 하면서 이미 인기를 확인한 영화의 프랜차이즈에만 돈을 쓰는 건 결국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는 거다.
위의 칼럼은 현 상황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비판하는 '현 상황'이 정확하게 언제 시작된 걸까? 언제부터 영화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걸 그치고 그저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업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2006년에 나온 로맨틱 코미디 영화 '홀리데이(The Holiday)'에는 평생을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한 90세 노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서 애봇이라는 이 인물이 과거의 헐리우드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60여 년 전에 헐리우드에 처음 도착했는데, 오자마자 영화와 사랑에 빠졌지. 평생 이어질 사랑이었어. 내가 틴슬타운(Tinseltown=헐리우드)에 왔을 때만 해도 씨네플렉스, 멀티플렉스 같은 건 없었지. 블록버스터(비디오 대여점)도 DVD도 없었고, 스튜디오를 거느린 대기업이 나타나기도 전이었어. 영화에 특수효과가 들어가기 전이었고, 박스오피스 흥행성적이 저녁 뉴스에 야구 경기 결과처럼 등장하지도 않았지." 이 영화가 요즘 나왔다면 블록버스터, DVD 대신에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예로 들었겠지만 2006년에는 아직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는 아마존이 서점을 몰락시키기 전에 나온 영화 '유브갓메일You've Got Mail'에서 대형 서점의 폐해를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헐리우드가 돈벌이에만 관심 있다는 불평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코엔 형제의 1991년 작품 '바톤 핑크(Barton Fink)'에는 진정한 창작에는 관심이 없고 돈벌이가 최고의 가치가 되는 헐리우드에 대한 비평적인 시각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배경은 1941년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바톤 핑크는 브로드웨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극작가인데 헐리우드의 영화사로 부터 큰돈을 제안받고 영화 대본을 쓰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온 인물이다. 헐리우드는 그때도 이미 돈만 아는 비즈니스였다.
아니, 헐리우드는 처음부터 그런 곳이었다. 앞서 인용한 영화 속 극작가가 헐리우드를 '틴슬타운'이라 부르는데, 크리스마스 장식에 쓰이는 반짝이는 줄을 의미하는 틴슬(tinsel)이 헐리우드의 별명이 된 이유가 원래 그렇게 겉만 번지르르하고 화려한 동네라는 조롱의 의미였다. 따라서 가디언의 칼럼은 의미 있는 지적이지만 과거에도 들었고, 앞으로도 듣게 될 비판의 2021년 버전일 뿐이다. 원래 문화산업은 그렇게 돈을 목적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고상한 옷을 입을 뿐이다. 미국의 출판산업도 초기에는 영국 작가들의 작품을 무단 복제해서 팔았다.
변화하는 영화 산업
가디언의 기사는 비록 반복되는 비판을 담고 있기는 해도 별 생각 없이 극장으로 달려가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헐리우드가 어떻게 변하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확인할 좋은 기회가 된다. 만약 가디언의 기사로 충분하지 않다면 아래 세 장의 슬라이드가 헐리우드 영화 산업을 요약해서 설명해줄 수 있다.
참고로, 아래의 자료는 Box Office Mojo의 웹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1979년부터 20년 간격으로 각 해의 헐리우드 흥행 상위 10위 영화들이다. 빨간 점과 배급사 이름에 들어간 하이라이트는 내가 넣은 것이다. 빨간 점은 시퀄/프리퀄/리부트처럼 관객이 이미 프랜차이즈를 알고 있었던 영화를 표시한 것이고, 하이라이트는 그해 10위 안에 2개 이상의 영화를 올린 배급사를 표시한 것이다. 우선 1979년을 보자:
1979년 흥행 10위권 영화 중에 분명한 시퀄은 두 편뿐이다. 1976년 당시 헐리우드 기준으로는 저예산(110만 달러)으로 28일 만에 후다닥 만든 영화 '록키'가 큰 흥행을 거둔 후 이를 프랜차이즈로 만든 두 번째 작품이 나온 것이고, 007 시리즈의 11번째 작품인 '문레이커(Moonraker)'가 다른 하나의 시퀄이다. '스타트렉'의 경우는 원래 TV 드라마로 성공한 것을 처음 영화화한 것이기 때문에 큰 틀에서 시퀄/프리퀄/리부트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더 관심이 가는 건 다른 영화들이다. 시퀄은 아니지만, 훗날 프랜차이즈가 되어 시퀄을 낳을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슈퍼맨'과 '에일리언'은 말할 것도 없고, '아미티빌 호러' '더 저크' '미트볼즈' 같은 영화들도 흥행했다는 이유로 시퀄을 낳았다. 내용상 시퀄이 나오기 힘든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의 경우는 다시 편집해서 리덕스(redux)판으로 내놓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참고로, 워너브라더스, 파라마운트, 그리고 MGM 스튜디오가 각각 두 개의 작품을 10위 안에 넣는 데 성공했고, 유니버설과 21세기 폭스, UA도 한 작품씩을 올렸다. 당시만 해도 이들은 거대 스튜디오였지만, 2021년 시점에서 돌아보면 작은 스튜디오들이 활발하게 경쟁하던 시절이다.
1999년 상위 10위 영화들에서도 프랜차이즈가 되어 후속작을 내놓을 작품들이 보인다. '매트릭스'와 '미이라(The Mummy)'는 후속작들이 전작만큼은 못돼도 제법 돈을 벌어들였고,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처럼 저예산으로 성공했다가 후속작에서 완전히 망가지는 작품도 있다.
1999년은 무엇보다 디즈니가 기회를 확인한 해다. 타잔은 TV 시리즈와 실사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이를 애니메이션으로 포장해서 내놓았고, 별 시선은 끌지 못했지만, 흥행에는 성공한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때 디즈니는 '토이 스토리 2'와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의 성공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알다시피 훗날 디즈니는 픽사를 인수하고 스타워즈 프랜차이즈도 사버린다.
1999년을 그해 기준으로만 보면 디즈니는 프랜차이즈/시퀄 장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합병이 완료된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 박스오피스를 보면 디즈니는 이미 "보이지 않는 위험(phantom menace)"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2019년을 보자. (2020년이 아닌 2019년을 기준으로 20년씩 위로 거슬러 올라갔던 이유는 2020년의 영화 흥행기록은 팬데믹으로 인해 아웃라이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표를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아마도 "끔찍하다"와 "재미있는 게 쏟아지네"로 갈릴 것 같다. 디즈니의 프랜차이즈를 좋아하고 수퍼 히어로 영화를 일일이 챙겨보는 사람들에게는 '시네마 천국'이겠지만, 이런 영화에 관심이 없거나 다양한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다. 디즈니는 무려 일곱 편을 10위 내에 넣었고, 10위 안에 있는 영화들은 모조리 시퀄/프리퀄/리부트다. ('캡틴 마블'의 경우 처음 영화화된 작품이지만 이미 잘 구축된 마블의 세계, 즉 MCU 안에 마련된 공간에 넣은 퍼즐 조각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결국 같은 프랜차이즈로 봐야 한다). 디즈니는 헐리우드의 원톱, 아니 유일한 공룡이 되었고, '극장 영화=프랜차이즈'라는 등식이 완성되었다.
상위 10위 안에서 프랜차이즈가 아닌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건 단순히 그런 영화들이 인기를 끌고, 돈을 잘 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영화가 아닌 영화,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 '디즈니가 만든 프랜차이즈'가 아니면 상영할 스크린을 찾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디즈니 영화만으로 모든 스크린을 채울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리 디즈니가 콘텐츠 공룡이라고 해도 모든 스크린을 1년 365일 상영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장 많은 관객이 몰리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황금 시즌에 디즈니가 아닌 영화가 상영할 스크린을 찾는 건 힘들어진다는 얘기다. 영화관은 굳이 디즈니의 압력이 없어도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배급사는 항상 최대한의 스크린을 확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사람들이 몰릴 때는 팔릴 영화로 상영관을 채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디즈니보다 작은 스튜디오(=나머지 모든 스튜디오)가 만든 영화, 프랜차이즈가 아닌 영화들은 스크린을 찾아도 비성수기로 밀려나기 때문에 흥행에 성공하기는 더 힘들어진다. 원래 영화산업은 출판업과 비슷해서 한 해에 내놓은 여러 작품 중 흥행에 성공한 한 작품이 스튜디오를 먹여 살린다. 따라서 제작사는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여기에 가장 큰 투자를 한다. (이를 '텐트폴 전략'이라고 한다. 가운데 서 있는 긴 막대가 텐트 전체를 주저앉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즈니가 아닌 다른 제작사에서 텐트폴로 생각한 콘텐츠가 성수기 스크린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충분한 돈을 뽑지 못하게 된다. 결국 대형작품은 디즈니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워너브라더스나 유니버설 스튜디오 같은 제작사들은 아직 대형 예산 영화를 만들 능력이 있고,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위의 세 장의 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미래는 이런 제작사들에 호의적이지 않다.
Monoculture
그렇다고 해서 미래가 모두에게 암울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렇게 쏟아지는 프랜차이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다. 아니, 어쩌면 대다수가 그런 콘텐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산업이 이를 반영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영화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위험을 회피하는 것은 제작사들만이 아니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 한 편을 보는 데 들어가는 액수는 점점 더 커진다) 실패하지 않을 즐거움을 찾는다. 위에서 영화산업과 출판업이 비슷하다고 했지만, 독서 시장에서도 사람들은 새로운 작가의 작품보다 잘 알려지고 익숙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선호하고, 그렇게 유명한 작가들의 상업적 소설을 매년 읽는다.
가령 2019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픽션 부문의 리스트를 보자. 데이비드 발다치나 존 그리셤, 대니얼 실바, 노라 로버츠, 대니엘 스틸, 존 샌포드 같은 작가들이 두 권 이상을 올려놓고 있다. 평론가들은 이들이 말 그대로 매년 쏟아내는 작품에 관심이 없겠지만, 소설책 시장을 끌고 가는 작가는 이들이고, 대형 출판사들은 이들을 확보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셤과 로버츠는 펭귄 랜덤 하우스에서, 실바는 하퍼 콜린스에서, 그리고 발다치와 샌포드, 스틸은 사이먼 & 슈스터, 책을 낸다. 이 세 출판사는 각각 미국 출판업계의 1, 2, 3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모두 소비자들이 원하는 쪽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항상 그렇듯 시장의 지배자는 시장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가까운 영화관에 갔는데 디즈니 영화로 도배가 되어있다면 대부분은 그걸 보지, 다음 달에 다시 오거나 멀리 떨어진 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리는 독립 영화제를 찾아가지 않는다. 대다수 관객에게는 그저 그 시간을 때울 콘텐츠가 필요할 뿐이다.
무엇보다 디즈니라는 거대 공룡이 보여주는 콘텐츠를 모든 사람들이 섭취하는 건 마치 환금성 작물의 단일경작(monoculture)이 생태계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영양 섭취까지 방해하는 결과를 낳은 농업계의 현재와 많이 닮았다.
다만, 콘텐츠 다양성 측면에서 보면 스트리밍 서비스의 존재는 불행 중 다행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프랜차이즈를 무한 확대하는 극장 전략을 자사의 스트리밍 서비스인 디즈니 플러스에서도 이어가는 디즈니 스튜디오와 달리, 넷플릭스는 전 세계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수급하면서 그나마 우리의 콘텐츠 식탁의 메뉴를 다양하게 유지해주고 있다. 물론 이 구도도 역시 넷플릭스라는 거대 자본으로 지탱되고 있지만 어쨌거나 '대형 스크린=(디즈니) 프랜차이즈, 안방 스크린=(조금 더) 다양한 콘텐츠'라는 구도가 영상 콘텐츠의 미래, 아니 현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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