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뒷얘기 ③
• 댓글 4개 보기진행자: 쿠퍼 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해보죠. 흑인이면서 새를 좋아하고,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이 소년이고, 만화책을 좋아하는 너드(nerd)로 자라는 건 어떤 경험인가요? 마블이 지금처럼 영화 프랜차이즈로 유명해지기 전에 마블 만화에 깊이 빠졌다고 하셨어요. 당시만 해도 마블은 재정적으로 난관을 겪고 있지 않았나요? 그런 마블에 심취하는 건 그다지 쿨한 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쿠퍼: 마블의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적어도 당시는 마블이 아직 유명해지고 돈도 버는 방법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온갖 아웃사이더의 조건들을 모두 동시에 갖고 있었던 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진행자: 네, 맞아요.
쿠퍼: 거의 가망이 없는 수준이었죠. (함께 웃음) 그런데 말이죠, 저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걸 기억합니다. 그냥 그게 저라는 사람이니까요. 그것들이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들이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조언을 할 것 같아요. 세상의 모든 아이들,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남들과 다른 이상한 면이 자신에게 있다면 그냥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장래에 여러분이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겁니다.
진행자: 쿠퍼 씨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신이 만화 속 슈퍼 히어로들을 보면서 성적으로 흥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셨어요. 생각해 보면 슈퍼 히어로들은 대부분 근육질에, 몸에 딱 붙거나 (웃음) 몸을 드러내는 옷을 입으니 그럴 만도 할 거 같아요.
쿠퍼: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걸 깨닫는 데 사춘기까지 걸리지도 않았어요. (웃음)
진행자: 아하, 그렇군요. 그 사실을 알게 된 걸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남자 슈퍼 히어로들을 성적으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쿠퍼: 그때가 1970년대였고, 제가 자란 곳은 롱아일랜드(Long Island, 뉴욕시 동쪽에 있는 길고 큰 섬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갖고 사는 블루칼라 계층도 많이 산다–옮긴이)였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게이라는 걸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고, 살고 싶으면 드러내면 안 되는 거였죠. 엘렌(Ellen DeGeneres, 미국 TV 사상 처음으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코미디언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혀서 미국 사회를 놀라게 한 것이 1994년이다–옮긴이)도, 앤더슨 쿠퍼(Anderson Cooper, CNN의 간판 앵커로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힌 건 2012년의 일이다–옮긴이)도 없었을 때입니다.
유명인들은 아직 아무도 커밍아웃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스톤월(Stonewall) 사건도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죠. 그래서 저는 모든 걸 꽁꽁 감추고 있어야 했어요. 아주, 아주, 아주 힘들었습니다.
진행자: 책에 그때 심정을 "관에 갇힌 채 땅속 깊숙히 묻힌 (locked inside a coffin under six feet of earth)" 느낌이었다고 쓰셨어요. 실제로 느끼는 감정을 숨기고 최대한 이성애자처럼 보이려고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쿠퍼: 어떤 실수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하는 게 맞아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웃으실 것 같지만, 제가 너드였다고 말씀드렸죠? 동성애자임을 드러낼 수 있는 실수를 절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제게 우상 같은 캐릭터가 있었어요. '스타트렉'에 나오는 스팍(Spock)이 그 캐릭터였죠. 스팍은 지적이고, 아주 똑똑하죠. 반은 벌칸(Vulcan, 극 중 외계인 종족)이고 반은 인간이라서 인간이 가진 단점을 갖고 있었지만, 벌컨은 완벽하게 이성적인 존재라서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고 드러내지 않죠.
세상에 제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게 하나 있었다면 그건 저의 감정을 숨기는 일이었어요. 만약 제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제가 몰래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혹은 제가 게이임을 알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는 감정 통제를 철저하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게 당시 제가 저의 성정체성을 다루는 방법이었어요. 밖에서 보면 사교적이고 친절한 성격으로 보였겠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산 채로 묻히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양면을 조심스럽게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진행자: 그리고 미국의 흑인 중에는 성소수자들이 경험하는 게 흑인이 경험하는 것보다는 덜 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쓰셨어요. (피부색으로 정체성이 구분되는) 흑인들과 달리 성소수자는 원하면 정체성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쿠퍼: 네, 그런데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죠. 저주입니다.
진행자: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와 그런 사고방식에 대한 쿠퍼 씨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쿠퍼: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성소수자들이 그저 삶을 이어가기 위해 정체성을 숨기고 사회가 정한 틀 안에서 산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한 일입니다. 이 말은 '나'라는 존재에 핵심적인 어떤 것을 무효화하거나 항상 숨기고 살아야 한다는 얘기거든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말이죠.
저는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흑인들이 성소수자들이 경험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는 것을 보면 참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성소수자들의 경험과 흑인들이 경험한 것이 만나는 지점이 있거든요. 피부색이 밝은 흑인들은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살기 위해 가족과 인연을 끊고, 흑인들의 모든 전통과 유산을 거부하고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고, 흑인들은 그걸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 수 있기 때문에 흑인들 보다는 덜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쉬운 게 아니라, 끔찍한 겁니다.
쿠퍼가 이야기하는 피부색 밝은 흑인들이 백인으로 사는 것, 백인인 척하는 것을 패싱(passing)이라 부른다. 이에 관해서는 오터레터에서 세 편에 걸쳐 소개한 바 있다.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진행자: 마블 만화를 좋아하시죠. 어린 시절 마블 만화에 푹 빠진 너드였고, 나중에는 마블에서 일도 하셨습니다. 그곳에 취직하셨을 당시 마블은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였나요? 시간이 지나면서 꽤 높은 자리로 승진하셨는데요.
쿠퍼: 네, 저는 1990년부터 마블에서 일했어요. 저는 자라면서 항상 마블 만화를 읽었지만, 대학생 때 특히 열심히 읽었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마블을 가장 열심히 읽었을 때는 마블에서 일하기 전이었어요.
당시 마블 만화의 스토리텔링은 정말 뛰어났죠. 특히 '엑스맨(X-Men)' 만화는 많은 성소수자가 공감한 만화였습니다. 엑스맨들은 뮤턴트(mutant, 돌연변이)였기 때문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지만, 태어날 때부터 약간 다르죠. 뮤턴트들은 자라면서 자신에게 남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성소수자가 자라면서 자신에 대해 발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엑스맨 광팬이었죠.
진행자: 마블에서 일하시면서 참여한 만화 중 하나가 '알파 플라이트(Alpha Flight)'이었고, 그중에서 한 슈퍼 히어로 캐릭터가 커밍아웃하는 에피소드를 쓰셨죠. 그 캐릭터를 설명해 주시겠어요?
쿠퍼: 네, 물론 만화책에서는 에피소드라 부르지 않고 "호(號, issue)"라고 부릅니다만, 괜찮습니다. (디테일까지 정확하게 하고 넘어가야 하는 너드이지만, 이를 친절하게 알려주려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옮긴이)
진행자: 맞아요. 그렇군요. (웃음)
쿠퍼: 네, 그 캐릭터는 만화를 좀 아는 분들에게 익숙한 캐릭터에 비유하자면 플래쉬(Flash)처럼 빠른, '노스스타(Northstar)'라는 캐릭터입니다. 뮤턴트라서 초능력을 갖고 태어났고, 이런 능력은 청소년기에 드러나게 되죠. 그가 가진 초능력은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대학생 때 '알파 플라이트'를 읽었던 걸 기억합니다. 그때 막 새로 등장했기 때문에 첫 1, 2호였는데, 읽으면서 '흠.. 노스스타는 게이인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 만화 앞부분부터 이미 게이 캐릭터라는 씨앗이 심겨 있었죠.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나 제가 마블에 취직했는데 공교롭게도 '알파 플라이트'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제 상사는 바비 체이스(Bobbie Chase)였고, 저는 그 밑에서 부편집자로 일했는데요–사실 부편집자라는 게 대단한 일을 하는 자리는 아닙니다–그 팀에 새로운 작가를 채용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작가가 "이제 노스스타 캐릭터가 커밍아웃하게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며 제안을 하더라고요.
제 상사의 남동생은 게이였고, 본인이 이런 문제에 깨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작가가 캐릭터의 커밍아웃을 제안하자 말이 되는 얘기라며 동의했고, 게이인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노스스타가 커밍아웃하게 된 겁니다.
진행자: 게이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 것에 대해서 회사 측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쿠퍼: 아, (웃음) 상당히 시끄러웠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당시 마블의 사내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요,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일할 때만 해도 마블은 여러 봉건 영주가 영지(領地)를 나눠서 각자 운영하는 방식으로 돌아갔어요. 특정 만화와 캐릭터들을 한 팀에서 관리하고, 그 팀마다 보스가 있었어요. 제 상사였던 바비 체이스가 그렇게 '알파 플라이트' 시리즈를 담당하는 책임자였고, 결정권을 갖고 있었으니 작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결정한 거죠.
하지만 나중에 경영진이 그 사실을 알고는 (웃음) 폭발한 거죠. 정말 살벌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인쇄되어 발행되었으니 이미 늦었죠. 그런데 그 소동이 황당한 이유, 특히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서 황당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그 캐릭터가 옷을 벗거나, 키스를 하는 식의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그냥 노스스타가 펀치를 날리며 싸우던 중에 "나는 게이야! (I'm gay!)"라고 외친 게 전부예요. 그 말 딱 한 마디 넣었다고 난리가 난 거죠.
진행자: 아주 불쾌감을 주는 일을 하셨네요. (함께 웃음) 그런데 본인은 게이인데 회사 경영진이 게이 캐릭터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는 건, 결국 쿠퍼 씨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 아닌가요? (어이없는 웃음)
쿠퍼: 그렇죠.
진행자: 그런 반응을 어떻게 느끼셨나요?
쿠퍼: 저는 경영진이 그 얘기를 할 때 제가 그 방에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제 면전에서 해야 했으니까요. 게이 캐릭터는 사용하면 안된다는 말을 하려면 매일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이 듣는 데서 해야 합니다. 이건 중요하죠.
그런데 말이죠, 경영진이 그런 말을 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었죠. (웃음) 오히려 우스운 꼴이 만들어졌습니다. '알파 플라이트'에서 캐릭터가 커밍아웃한 호가 너무나 잘 팔려서 엄청난 수입을 올렸거든요. 그걸 본 경영진은 그럼 노스스타 캐릭터를 독립시켜서 별도의 시리즈를 만들어 돈을 벌자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 새로운 시리즈에서 게이는 언급하면 안 된대요. (웃음) 그렇게 해서 4, 5개의 짧은 시리즈가 나왔는데, 당연히 망했죠. 노스스타가 왜 인기를 끌었는데 독립 시리즈로 만들면서 성정체성을 언급하지 못하게 하니 될 리가 있나요.
좋은 기억은 아닙니다. 저는 마블을 사랑해서 입사했고, 제 꿈의 직장이었는데, 그 일로 회사에서 일하기가 어색해졌고, 마블에 대한 제 생각도 복잡해졌습니다. 마블과의 관계가 어색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그런 시도를 할 때는 눈에 띄지 않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 남자의 뒷얘기 ④'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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