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 부족과 회복탄력성 (2)
• 댓글 남기기컴퓨터 칩 부족을 보도하는 한 기자는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운다"는 마크 앤드리슨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우고 있다면, 그 이빨은 (컴퓨터) 칩이다(If software is eating the world, chips are the teeth)." 컴퓨터와 스마트폰처럼 애초부터 칩이 있어야만 기능할 수 있는 제품을 넘어, 과거에는 컴퓨터 없이 작동했던 많은 것들이 칩을 탑재하면 기능이 향상되고 있다. 따라서 세상은 점점 더 많은 컴퓨터 칩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칩을 만들 수 있는 반도체 제조업체가 대형화하면서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애플을 비롯해서 많은 기업들이 반도체를 직접 설계한다고 하지만, 반도체를 설계하는 것과 만들어내는 것, 더 나아가 경쟁력 있는 가격에 만들어내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패브리스(fabless: 공장 없는)라고 불리는, 설계만 할 수 있는 기업들은 오히려 늘었지만 제조할 수 있는 기업은 극소수다. 설계와 제조를 모두 할 수 있는 (이런 기업을 IDM: 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라 부른다) 인텔이나 AMD 같은 회사들도 갈수록 대형 제조 전문 업체에 생산을 위탁하고 있다.
경쟁력있는 극소수의 대형 업체들만 생존이 허용되는 이 반도체 제조 경쟁에서 현재 살아남은 기업은 약 5개 정도이지만, 그나마 시장 점유율이 10%를 넘는 기업은 대만의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와 삼성전자뿐이다. 하지만 시장 점유율 55%에 다가가고 있는 TSMC는 흔히 '파운드리(foundry)'라 부르는 반도체 제조업의 원톱이다. "세계가 대만 하나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생산이 한 곳에 집중되면 공장은 커지고 규모의 경제가 만들어진다. 그만큼 효율적으로 되고, 제품의 단가는 떨어지고, 새로운 플레이어의 진입은 힘들어진다. 반도체 제조업은 그렇게 변화해왔다.
취약한 고리
테슬라는 생산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새로운 제품을 발표하면 많은 사람이 구매 예약을 하지만, 정작 언제 제품을 인수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근 CEO 일런 머스크는 "테슬라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는 공급망(supply chain)에서 가장 느린 부문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가장 느린 부문은 컴퓨터 칩이다. 칩 수급이 힘들어지자 테슬라는 이를 우회하기 위해 소프트웨어를 다시 쓰고 있다.
좀 엉뚱한 비유지만 이 상황은 경주마(racehorse)의 품종 개량과 아주 흡사하다. 현재 전 세계에서 활약하는 경주마들은 500kg의 체중에 기수의 체중을 더한 무게를 버티고 빠른 속도로 달리지만, 그 발목은 놀랄만큼 가늘다. 짐수레를 끄는 말과 달리 경주마는 속도에 초점을 맞춰 개량한 품종이기 때문에 '경주 성능'이 뛰어나지만, 발목이 취약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우리는 경기 중에 발목에 큰 부상을 입은 경주마를 안락사시켰다는 기사를 종종 접하는데, 현대 수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넘기 힘든 물리학적 한계 비슷한 것이 부상당한 경주마의 치료에도 존재한다고 한다. 한 번 부러진 경주마의 발목뼈를 접합하는 데는 경주마의 체중이 큰 장애가 된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가장 안정적인 부품 공급이 아니라, 가장 낮은 가격, 가장 효율적인 생산을 목표로 발전해왔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에 내재하는 리스크가 현실화한 셈이다.
여기에서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개별 기업들의 결정이다. 인텔은 팬데믹 이전인 2019년에 충분한 여유 자금이 생겨 200억 달러를 들여 미국 내에 반도체 생산 공정을 만들기로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260억 달러를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 사용했다. 이는 기업의 장기적 계획보다 단기적으로 주가를 올리는 주주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결정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Toyota Way
1980, 90년대에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들어봤을 단어가 저스트인타임(JIT: Just In Time) 생산 방식이다. 흔히 린 프로덕션(lean production)이라고도 불리는 이 방식은 일본의 자동차 기업 토요타가 만들어낸 생산방식으로, 서구의 기업들처럼 필요한 부품을 많이 구매해서 창고에 쌓아두는 대신 당장 필요한 부품만을 필요한 시점에 주문함으로써 보관 비용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미리 사둔 부품을 소진해야 하는 부담이 없기 때문에) 빠르게 설계를 변경하고 새로운 제품으로 피봇(pivot)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1980년대 토요타의 무서운 성장을 보면서 그 비결을 연구한 서구의 경영학자들과 기업들이 한 입으로 "저스트인타임"을 외치며 혁신을 시도했고, 그 결과 1981년부터 2000년 사이에 미국 기업들은 한 해 평균 2%의 재고를 줄였다는 연구가 있다.
그 시기는 또한 전 세계가 글로벌화(globalization)에 뛰어들던 시기이기도 하다. 원래 토요타가 저스트인타임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인구와 공장이 밀집된 일본의 지리적 특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요타에 부품을 납품하는 하청업체의 공장들이 토요타 공장 주변에 모여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방식이다. 그런데 글로벌화의 물결과 저스트인타임 생산방식이 만나 부품공급망을 전 세계로 확산하는 결과를 낳으면서 안정적이고 정확한 글로벌 물류 시스템이 필수적으로 된 것이다.
화물선의 크기가 커지고,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올해 초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수에즈 운하를 막아버린 사태, 그리고 그로 인해 아시아의 생산기지와 유럽 시장을 연결하는 "취약한 고리"가 끊어진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전문가들에게는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을 뿐이다.
대만의 TSMC가 만드는 반도체에 전 세계가 의존하는 구도는 수에즈 운하에 대한 의존보다 더 심각하다. 수에즈 운하가 막히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가느라 시간과 비용이 발생하지만, 칩 공급의 경우 1, 2주일 더 걸리면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산을 TSMC에 몰아서 가격을 낮추는 린 프로덕션 시스템은 팬데믹이라는 충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자동차 업체들은 팬데믹으로 경기가 둔화할 것으로 보이자 재빨리 칩 주문을 취소했는데, 경기가 생각보다 빨리 회복되는 것을 보고 다시 주문을 넣었지만 반도체 생산라인은 스위치만 켜면 되는 게 아니었다.
회복탄력성과 탈세계화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글로벌 칩 부족 사태에 가장 영향을 적게 받은 자동차 기업이 토요타라는 사실이다. 저스트인타임을 전 세계에 소개하고 부품 재고를 줄이는 데 앞장섰던 토요타지만 자동차에 들어가는 칩만큼은 충분하게 확보하고 있었다. 덕분에 미국 자동차 기업들이 공급 물량을 맞추지 못해 허덕일 때 토요타는 별문제 없이 완성차를 출고할 수 있었다.
메르스의 직격탄을 맞았던 한국이 코로나19 방역에 성공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토요타의 선견지명 역시 비슷한 사태를 먼저 겪은 경험에서 온 듯 하다. 1999년 대만 지진으로 인한 반도체 생산 차질, 2011년 쓰나미로 인한 일본 자동차 공장들의 가동 중지, 같은 해 태국 홍수로 혼다 자동차의 생산이 중지되는 등의 일련의 사태를 통해 일본의 기업들은 린 프로덕션만큼 중요한 것이 재난 발생 시에도 생산을 유지할 수 있는 여력, 즉 회복탄력성(resilience)임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투자 전문가이자 경제학자인 모하메드 엘 에리언(Mohamed El-Erian)은 향후 세계 경제는 회복탄력성을 (린 프로덕션보다) 앞세울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각 국가가 부품의 조달을 위해 지금처럼 경쟁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와 협력하기보다는 자국 내에서, 혹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우방들과만 공급망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 색채가 묻어 있다. 글로벌화의 후퇴가 불러오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이는 최근 중국과 미국에서 발표하는 내용만 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이든은 "공급망(supply chain) 위기를 다시 겪지 않도록 미리 막아야 한다"면서 "어떤 경우에는 회복탄력성을 만드는 것은 특정 요소(부품)를 우리나라 내에서 생산하는 것을 의미하며,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우리와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우방, 파트너와 일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해서 "공급망을 볼모로 잡히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는 '중국'이라는 단어만 등장하지 않았을 뿐 모든 내용이 중국을 겨냥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공급망의 위기를 불러온 1위 부품이 컴퓨터 칩이기 때문에 바이든의 말은 '반도체 생산 설비를 미국에 세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바이든은 이를 위해 우리 돈으로 57조 원에 해당하는 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대규모 반도체 생산설비가 부족한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반도체 공급의 해외 의존을 끝내기로 하고 14차 5개년 계획에서 앞으로 6년 동안 1천 600조 원을 테크 부문의 발전에 투자하고, 그 중 상당 부분이 칩 생산시설 확충에 들어간다. 중국 내에서 필요로 하는 칩의 70%가 자국산으로 해결되는 것이 목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저스트인타임' 혹은 린 프로덕션이 반드시 글로벌화를 의미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토요타의 방식이 마침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던 생산, 경제의 글로벌화와 맞물려 세계 경제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린 프로덕션의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효율성보다 자국 내 생산을 통한 회복탄력성을 키우기로 한 시점은 하필 중국과 미국이라는 세계 경제의 대국이자, 정치외교적 경쟁국가의 탈동조화(decoupling)와 맞물리면서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계가 '탈세계화(deglobalization)'로 향하고 있다는 경고로 읽힌다. 물론 이는 글로벌화된 세상에서 가장 이득을 누리고 있는 대만의 TSMC 같은 기업들에는 큰 위기 신호일 수 있다.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계획이 결실을 거두는 5, 6년 후에도 TSMC가 현재의 위상을 지킬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생산량은 많아도 자국 내 시장이 크지 않은 한국에게도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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