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제인 캠피온
• 댓글 남기기이 글은 영화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의 결말에 중요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제인 캠피온(Jane Campion) 감독의 영화를 오래 기다려온 사람이라면 먼저 영화를 보기 권한다. 하지만 제인 캠피온이라는 감독의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거나 이 영화를 볼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이 글을 먼저 읽으면 좋다. 마음을 바꿔 영화를 보게 될 수도 있고, 이 영화에서 어떤 걸 기대하고, 어떤 걸 기대하면 안 되는지 알면 더 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영화를 이미 본 사람이라면 편안하게 읽으면 된다.
누가 이 영화를 볼까?
이걸 보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를 (적어도 '피아노' 하나는) 좋아했고, 활동을 완전히 중단한 줄 알았던 이 감독이 새로운 영화를 들고 나타났다는 사실이 반가웠던 사람들이 있다. 이 작품이 캠피온의 히트작 '피아노'를 넘어서는 작품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해도 그 이후에 나왔던 어떤 작품들보다도 좋은 건 사실이다.
순전히 배우들 때문에 보는 사람들도 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커스틴 던스트는 물론이고, 영화를 좀 아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제시 플레먼스의 얼굴을 예고편에서 보고 '이건 봐야겠다'라고 결정했을 거다. 게다가 이 세 명 외에도 깜짝 놀라게 할 주연 배우가 하나 더 등장한다. 코디 스밋맥피(Kodi Smit-McPhee)다. 이들 배우의 연기를 즐기기 위해 이 영화를 선택한 사람들이 아마 가장 크게 만족한 부류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부영화'를 기대한 올드팬들이다. 이 영화에 가장 실망한 사람들이 아마 이 부류가 아닐까 싶다. (정통 서부영화를 좋아하시는 우리 아버지도 이 영화를 시작했다가 실망하셨을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아직 여쭤보지는 못했다.) 이 사람들은 '파워 오브 도그'가 서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서부 영화가 맞다. 배경이 1920년대 몬태나주이고, 주인공들의 직업이 카우보이라서만이 아니다. 뉴욕타임즈 평론가 마놀라 다지스의 말처럼 '수정주의 서부영화(revisionist Western)'이고, 미스테리적인 요소가 들어있지만, 선과 악, 혹은 약자와 강자가 대결하고 승패가 분명하게 결정 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서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배우들의 연기 대결
반복하지만 이 영화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주인공 네 명의 연기 대결을 관전하는 거다. 제인 캠피온은 1967년에 나온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이 네 사람을 캐스팅했을 때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이 배우 네 명은 자신들에게 꽤 익숙한 연기를 하지만 서부 영화라는 배경에서 그걸 해내야 한다는 점은 큰 도전이었을 것 같다.
가령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맡은 역은 똑똑하지만 말로 상대를 찌르는 '날카로운 혀(sharp tongue)'를 가지고 있고 사고가 느린 주위사람들을 조종하는 데 능한(manipulative) 인물이라는 점에서 BBC의 히트작 '셜록'에서의 캐릭터와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연기를 다른 영화에 가져왔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어디에서 들어본 듯한 멜로디가 새로운 변주곡으로 재탄생한 것에 더 가깝다.
의도했다고 보지는 않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눈에 띈 게 카우보이 차림의 컴버배치가 걷는 모습이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확하게(methodically) 걷는 그의 자세는 제대로 훈련받은 연극배우의 대사만큼이나 또렷하다. 존 웨인을 비롯해 헐리우드 서부영화 속 배우들이 어슬렁거리며 걷는 모습과 비교되어 낯설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준다.
제시 플레먼스는 어떤가? NBC 방송국의 인기 드라마 '프라이데이 나이트 라이트(Friday Night Lights)'로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플레먼스의 연기를 내가 직접 확인한 건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의 이 장면에서였다. 처음에는 그저 얼빠진 표정의 단역인 줄 알았는데 갈수록 소름 끼치는 연기로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유튜브 영상 밑의 어떤 댓글처럼 "아주 예의 바른 소시오패스(a very polite sociopath)"를 완벽하게 해낸 플레먼스는 찰리 카우프먼의 넷플릭스 영화 '이제 그만 끝낼까 해(I'm Thinking of Ending Things)'에서 수수께끼 같은 남자친구에서 다시 한 번 그 솜씨를 보여줬다.
'파워 오브 도그'에서 형 필(컴버배치)과 함께 농장을 운영하는 소심한 동생 조지 역을 맡은 플레먼스는 극 중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로즈와 결혼하는데 (로즈 역의 커스틴 던스트와 실제 부부 사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캐릭터들 간에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배우들의 연기 경쟁에 불이 붙는다. 특히 로즈에게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다 자란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가 있는데, 섬세하고 가냘파 보이는 피터와 거친 상남자 필은 마치 아프리카 평원의 가느다란 가젤와 사자의 관계처럼 보인다.
단순하지 않은 악역
이 영화는 시작부터 악당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동생 조지를 말끝마다 "뚱보(fatso)"라 부르고 "하도 멍청해서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살찐 머저리"라는 폭언을 대수롭지 않게 하는 형, 필이다. 극의 중반을 넘으면서 관객은 그가 거친 외모와 달리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수재였음을 알게 되는데, 이유는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지만, 필은 그 사실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1967년에 나온 원작 소설에서는 어떻게 묘사됐는지 모르지만 캠피온은 필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기고 있음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발견하는 건 이 영화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피터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약점이 투명하게 드러나있지만 필만은 단단한 껍질에 싸여있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이 고용한 무식하고 거친, 그리고 자신을 철저하게 따르는 카우보이들 사이에서는 전혀 드러날 일이 없는 그의 내면세계는 동생 조지와 로즈, 피터 앞에서만은 분노의 형태로 쏟아져 나온다. 왜일까?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특정 성격이나 태도를 볼 때마다 남들보다 유난히 민감하게 화를 내는 사람들, 특히 가족 구성원을 상대로 쉽게 분노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분노의 궁극적인 대상이 자신인 경우가 많다. 자신이 싫어하는 자신의 성격, 고치려고 애쓰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 그래서 남들에게 숨기는 자신의 단점을 다른 사람, 특히 가족 구성원에게서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 필의 분노도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자기혐오 아닐까?
간단하지는 않다. 필에게는 그런 자기혐오 외에도 속물적 근성, 그리고 평범성(mediocrity)에 대한 혐오가 복잡하게 섞여있는 것 같다. 하지만 컴버배치의 연기는 그 복잡함을 뭉뚱그리지 않고 켜켜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번 연기가 컴버배치에게 아카데미 주연상을 안겨줄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행사장에서는 분명히 보게 될 것 같다.
똑똑하고 잔인한
'파워 오브 도그.' 좀 뜬금없이 들리는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한 궁금증은 영화 마지막 부분에 풀린다. 기독교의 구약성서 시편 22편에 나오는 구절(Deliver my soul from the word; my darling from the power of the dog")에서 가져온 것이다.
한국어 성경에는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라고 번역되는 이 구절(20절)의 개는 "the dog"이라는 단수로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성경 버전인 킹 제임스 버전(KJV)이 그렇게 번역했을 뿐 현대 버전들에서는 "the dogs"라는 복수로 번역한다. 사실 선행 구절인 16절을 보면 "개들이 나를 에워쌌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뒤에서도 복수로 번역하는 게 더 정확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개, 즉 악당은 한 명이기 때문에 KJV의 단수 번역은 유용하다.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든 필은 약자를 괴롭히는, 그것도 언어폭력과 심리적 방법을 동원해서 괴롭히는 나쁜 사람, 즉 불리(bully)다. 필이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지능과 날카로운 혀만으로도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동생의 아내 로즈를 돈을 보고 결혼한 "골드디거(gold-digger)"로 단정해버리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근거 없는 확신일 뿐이다. 그의 날카로운 말이 칼날이라면 이런 그의 자신감은 그가 쥐고 있는 칼자루다. 그리고 그가 휘두르는 칼에 주위 인물들은 심각한 내상을 입는다. 필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세 사람이 상처를 입는 모습이 이 영화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그렇게 똑똑하고 잔인한 사람들이 가끔 빠지는 함정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 약자 중에서 칼을 품고 있는 사람, 혹은 자신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놓치는 실수가 그거다. 자신에게 대들지 못하고 그저 베풀어주는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모두 자신에게 굴복하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지만 예외는 등장한다. 그러나 오만함 때문에 그 예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제인 캠피온
이 영화에 등장한 네 명의 배우들은 이름값을 한다. 따라서 이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제인 캠피온의 영화를 오래 기다려온 사람들은 과연 만족할까? 이 질문은 각자 답해야겠지만, '캠피온의 팬'이 누구인지는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낯선 뉴질랜드 감독의 작품 '피아노(The Piano, 1993)'가 전 세계에서 큰 호응을 얻은 건 1993년의 일이다. 캠피온은 이 영화로 '페미니스트 영화인'이 되었고, 먼저 만든 '스위티(Sweetie, 1989)'도 뒤늦게 한국에 들어왔던 걸 기억한다. 하지만 1993년에 태어난 여성이 캠피온의 '피아노'를 보면서 감동하며 페미니즘 영화라고 생각할까? 이 질문에 "당연하지"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오늘 밤 '피아노'를 다시 보기 바란다. (마침 이 영화도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다.)
한 언론 기사의 제목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피아노는 페미니스트 영화의 고전일까? 25년이 지난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제인 캠피온은 이 영화로 각본상을 받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결국 두 명의 성폭행범 중 차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 (The Piano: A feminist classic? 25 years on it doesn’t look like it. In Jane Campion’s Oscar-winning screenplay the female lead character is left to choose the lesser of two evils, both rapists)." 주인공 에이다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가 선택하기 전에 선택을 당했고, 당시에는 열정적 사랑으로 보였던 장면은 2020년대의 눈으로는 많이 다르게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가 처음 나온 당시에도 의견은 분분했다. 하지만 대본을 쓰고 감독한 사람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최소한 '남자 중심의 시각'이라는 비판을 어느 정도 피했을 거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파워 오브 도그'는 제인 캠피온이 '피아노' 이후에 만든 영화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피아노'를 뛰어넘는 작품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하지만 여기에서 '피아노'는 내 기억 속의 '피아노'일 뿐이다. 2021년에 다시 '피아노'를 꺼내 보면 '파워 오브 도그'보다 더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한때 우리가 좋아했던 작품에는 불행한 일이지만, 사회로서는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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