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자랑
• 댓글 남기기지금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때 공화당을 이끈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밥 돌(Robert "Bob" Joseph Dole)이 98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인물에 대해서 알게 된 건 내가 미국 정치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빌 클린턴 집권기인 1996년, 빌 클린턴의 재임을 막는 공화당 대선후보로 등장했을 때다.
미국 언론이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마지막 남은 정치인이 세상을 떠났다"라고 전했을 만큼 옛날 세대의 정치인이었고, 1996년 당시도 그랬다. 젊은 민주당 대통령 빌 클린턴이 나이 든 공화당 후보 밥 돌과 대결한 그해의 미국 대선은 젊은 민주당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나이든 공화당 후보 밋 롬니와 대결한 2012년 대선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선거에서 패한 나이든 공화당 정치인이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그렇다.
보수정치의 상징과 같은 밥 돌은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1990년대에 나온 헐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처럼 그려진 정치인 중에 '밥(Bob)'이라는 이름을 가진 캐릭터가 있다면 작가가 밥 돌을 상상하며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주얼도 대개 비슷하다).
하지만 그런 보수적인 공화당 정치인 중에도 수준 차이는 존재한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 혹은 당의 이익을 떠나서 국가를 위한 결단을 내리는 정치인들은 민주, 공화당을 막론하고 존경을 받는다. 물론 그도 많은 (대개는 합당한) 비판을 받았지만 민주당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기념비적인 인권법(Civil Rights Act, 1964),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1965)을 추진했을 때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의원이다.
그런 밥 돌을 상징하는 게 하나 있다. 그의 오른팔이다. 존 매케인이 월남전에서 심한 고문으로 팔을 높이 들지 못하게 된 것처럼, 2차 세계대전 때 큰 부상을 입은 돌은 오른팔과 손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오른손이 어색해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펜을 쥐고 있었다.
뉴욕타임즈의 부고 기사
그런 밥 돌이 세상을 떠나자 뉴욕타임즈가 부고 기사(obituary)를 냈다. 워낙 뛰어난 글이기 때문에 시간이 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하지만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어서 그 부분만 번역해서 소개한다.
먼저, 글의 앞부분에는 밥 돌이 캔사스주의 작은 마을인 러셀(Russell)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태어난 해는 1923년으로 미국이 큰 기근과 대공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시절이다. 그의 가족은 수익이 끊기자 살던 집을 세로 주고 작은 지하실에 내려가서 살았다고 한다.
돌은 고등학교에서 학교를 대표해 미식축구와 농구, 육상선수로 뛰었고, 인기투표에서 "가장 잘생긴(best looking) 학생"으로 뽑히기도 했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그 꿈이 무너진다.
아래는 중반부 번역이다.
로버트 조셉 돌(Robert Joseph Dole)은 1923년 7월 22일 러셀에 있던 부모가 살던 집에서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솜씨가 좋은 재봉사였고 재봉틀을 팔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유제품 만드는 일을 했고, 나중에는 곡물 엘리베이터를 운전하는 일을 했다.
돌은 대학에 다니던 중 예비군(Army Reserve)으로 등록했고, 1943년에 현역으로 소집되었다. 그가 속한 소대는 1945년 4월 14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북쪽으로 약 65마일 떨어진 카스텔 다이아노 외곽에 위치한 산지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다. 돌은 동료 병사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내기 위해 다가갔다가 쏟아지는 파편에 맞았다. 파편이 그의 오른쪽 어깨와 팔을 산산조각 냈고, 목과 척추가 여러 군데 부러졌다.
소대원들은 그를 참호로 끌어내렸지만, 그는 그곳에서 피로 범벅이 된 전투복을 입은 채 무려 9시간 동안 처박혀 있고 난 뒤에야 치료를 위해 후송되었다.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그의 고향 마을 러셀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 중 하나였던 돌의 인생이 끔찍한 전환점을 맞은 것이다. 혼자서 식사도 못 하고 자신을 챙길 수도 없는 지경이 된 그는 이제 자신은 길에서 연필이나 팔면서 남은 인생을 살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전쟁 후 많은 상이 군인들이 그렇게 거리에서 구걸 비슷한 장사를 하면서 연명했다–옮긴이)
그는 회복에 3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고, 7번 이상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러셀로 돌아온 그는 근력을 회복하기 위해 도르래에 웨이트(역기)를 연결한 기구를 만들어서 연습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찾아와 응원했고, 치료를 돕기 위해 함께 동전을 모았다.
고향 마을 러셀은 캔자스 대초원의 작은 점과 같은 곳에 불과하지만, 돌의 인생에서 이 마을은 신화에 가까운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그는 선거운동을 할 때마다 러셀은 고귀하고 작은 마을의 미덕을 지키는 곳으로 묘사했고, 돌 자신은 그런 마을의 미덕을 의인화한 인물로 소개했다.
훗날 밥 돌은 그 (자신이 부상에서 회복하던) 시절과 이웃들의 도움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다. 그는 1976년, 러셀을 방문한 포드 대통령과 함께 시내에 몰려든 1만 명의 지지자들이 앞에서 전쟁 후 자신을 지지해준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청중은 조용해졌다. 결국 포드 대통령이 일어서서 손뼉을 쳤고, 청중도 따라서 박수를 보냈다.
돌은 감정을 추스르며 이렇게 말했다. "오래전 일이죠."
그렇게 밥 돌과 고향 마을 러셀의 이야기는 그의 기원 이야기(origin story)에 빠지지 않는 존재가 되었고, 심지어 (대선에 출마했던) 1996년에도 돌은 그때의 이야기만 나오면 목이 멨다. 대선 후보의 이미지 메이커들은 그의 연설문을 준비하면서 고향 마을 이야기를 넣곤 했는데, 돌은 그 대목은 건너뛰거나 짧게 줄여서 언급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전국적인 인기를 끄는 정치인들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 미국 정치판에서 자기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 도움을 받아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한 밥 돌은 마치 역사책에서나 존재할 법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리고 오늘 그 역사책의 한 장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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