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의 거물 하비 와인스틴(Harvey Weinstein)의 성범죄가 알려지면서 미국 연예계의 미투 운동으로 이어졌을 때 그 모든 일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와인스틴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많은 젊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진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 여성들 역시 와인스틴의 힘을 빌려 영화에 출연하는 등의 이득을 챙겼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일은 "거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와인스틴 범죄의 피해자 중 일부가 대가로 흥행 영화에 출연해서 성공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개인 간의 거래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그걸 거부할 힘이 여성들에게 있었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이익을 옹호해 주고, 빅테크의 사랑을 받은 변호사 조슈아 라이트가 했던 행동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가 기업들에서 연구비 명목으로 돈을 챙기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그들을 위해 일을 해주기만 했다면 그는 지금도 여전히 잘 나가는 교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가 얻게 된 영향력을 제자를 비롯한 젊은 여성들에게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게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

멀린스 기자는 미국의 기업과 정부 사이의 관계를 파헤친 'The Wolves of K Street'의 저자다. (이미지 출처: Simon & Schuster)

월스트리트저널의 브로디 멀린스 기자는 라이트 교수가 접근해서 관계를 가졌던 여성들을 만나 그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이트 교수는 조지 메이슨 대학교에서 법대 대학원 1학년의 필수 과목인 계약법(Contract Law)을 가르치면서 마음에 드는 여학생들을 찾았다. 이 여학생 중 상당수는 반독점법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 했다.

라이트 교수는 반독점법을 강의만 한 게 아니다. 학생들이 관련 단체나 로펌의 인턴에 지원하고 싶으면 소개시켜 주었고, 취직자리를 알선해 줄 수도 있었다. 멀린스 기자에 따르면 더 중요한 건, 그가 이런 기회를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와인스틴과 라이트가 가졌던 힘의 실체가 그거다. 좋은 영화, 좋은 인턴 자리를 마련해 줄 힘보다 더 무서운 게, 그 기회를 여성들에게서 뺏을 수 있는 힘이다. 이는 한국의 대학 내 성폭력 문제와 관련해서도 항상 지적되는 것으로, 피해자들이 "교수, 학교, 학계, 전공 분야로부터 배제돼 향후 진로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이들이 가해자를 고발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엘리스 도어시

조슈아 라이트는 여러 여학생에게 접근해서 성관계를 가졌고, 이들의 관계는 학생들이 졸업한 후에도 이어졌다. 그 여학생 중에 엘리스 도어시(Elyse Dorsey)가 있다. 도어시는 23살 때 대학원에서 커리어 카운슬러로 소개해 준 라이트 교수를 만났고, 라이트는 도어시에게 연구 조교직을 제안했다. 멀린스 기자는 학교에서 조슈아 라이트 교수의 조교가 되는 건 엄청난 행운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한다. 반독점법 분야의 스타 교수와 함께 연구를 진행하고 그가 발표하는 논문에 이름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와 친해진 도어시는 자기가 이혼을 진행 중에 있다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라이트는 자기도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 2010년 어느 날, 라이트는 일 때문에 캘리포니아에 가면서 도어시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라이트 교수는 호텔 방을 하나만 예약해 두었다. 미국 동부에서 서부까지 날아온 도어시에게 같은 방에 묵자는 라이트 교수는 앞으로 도어시의 커리어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몇 해 동안 지속되었다. 라이트가 만나던 학생은 도어시만이 아니었고, 그는 그렇게 만나던 학생들에게 미국 FTC와 법무부, 그리고 유명한 로펌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줬다.

조지 메이슨 대학교 캠퍼스 (이미지 출처: 조지 메이슨 대학교)

하지만 그의 이런 행각은 곧 드러났고, 이를 알게 된 그의 아내는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라이트는 이혼 후에도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많은 여성과 관계를 이어갔다. 도어시와 관계가 소원해졌던 2021년, 라이트는 도어시에게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펠로우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며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는 그 펠로우 자리는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메타)에서 펀딩을 받도록 약속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도어시가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펠로우가 된 후 약속된 펀딩은 없던 일이 되었다. 다른 여학생을 만나기 시작한 라이트 교수가 도어시와의 관계를 끝내겠다며 약속을 깬 것이다. 도어시는 비로소 자신이 이용당한 사실을 깨달았고, 라이트 교수를 고소하게 된다. 도어시는 학생이던 시절에 라이트가 자기에게 접근했고, 영향력을 이용해 펠로우십 봉급을 막았다고 주장했고, 라이트는 합의하에 이뤄진 관계이므로 허위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조사와 결과

문제가 커지자 조지 메이슨 대학교는 소송과 관련한 자체 조사를 시작했고, 라이트는 펀딩을 약속했던 구글에 부탁해서 도어시에게 8만 5,000달러를 지급하게 했다. 도어시는 메타와 아마존에도 문의했고, 메타는 약속했던 금액을 지급했지만, 아마존은 달랐다. 아마존은 라이트 교수가 도어시와의 관계를 밝히지 않고 펀딩을 요구한 것은 부적절하다며 그와의 협력을 중지했다. 구글과 메타는 이후에도 라이트와의 관계를 이어가면서 그에게 컨설팅 비용을 계속 지급했다.

로비스트들이 모인 워싱턴 DC의 K 스트리트 (이미지 출처: Politico)

학교의 조사가 진전되면서 상황이 나빠지자, 라이트는 교수직에서 물러나서 로펌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동료들은 학교가 인재 하나를 잃게 되었다고 아쉬워했지만, 이를 계기로 여성들이 나서서 라이트 교수가 자기들에게 부적절하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미투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알려지자 빅테크 기업들도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던 구글과 메타, 퀄컴은 여성들의 고소 내용을 바탕으로 "즉각적으로 라이트와의 관계를 단절한다"고 발표했다.

순식간에 돈과 영향력을 모두 잃게 된 라이트는 자기를 고소한 여성들을 무고죄로 고소했고, 여성들의 증언을 기정사실화하고 그들의 미투 운동을 지지한 조지 메이슨 대학교를 상대로도 소송을 시작했다. 이 소송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브로디 멀린스 기자는 라이트의 피해자였던 한 여성의 말을 인용해서 여성들의 입장과 심정을 대변했다. "라이트와의 관계에서 벗어난 게 너무나 좋다. 이제 내가 커리어에서 쌓게 되는 업적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 나는 나의 힘으로 학회에 초청받고, 나의 힘으로 논문을 쓴다. 조슈아 라이트의 영향력이 아닌, 나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 있는 남성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서 자신의 실력과 노력의 결과물을 의심받던 시간이 끝난 것이다. 🦦

조슈아 라이트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미지 출처: The Interce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