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표 작업이 느린 미국의 선거에서 드디어 하원 의원 투표 결과가 나왔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아직도 개표 중이기는 하지만, 공화당이 일단 218석을 먼저 확보해서 다수당이 되었다. (참고로 공화당은, 지난 2년 동안 221석으로 다수당이었다.) 아직 9석의 향방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공화당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아슬아슬한 우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2년 동안 하원 소수당의 원내 대표가 될 하킴 제프리스(Hakeem Jeffries) 의원은 각오를 묻는 인터뷰에서 "민주당은 과격주의(extremism)에 맞서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traditional American values)를 지키겠다"고 대답했다. 과격주의에 맞서 전통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말은 공화당이 민주당을 공격할 때 사용하던 표현인데, 이 말이 민주당의 리더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미국의 정치 지평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더 나은 나라가 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통령 당선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연일 발표하고 있는 2기 내각 인선을 보면 아찔하다. 백신 음모론을 신봉하고 기존의 과학, 의학 지식을 부정하는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Robert Kennedy Jr.)에게 미국의 의료 정책을 총괄하게 하겠다고 했고, 아동 성매매, 마약 복용, 뇌물 수수 등의 다양한 혐의를 받고 있는 맷 게이츠(Matt Gaetz)를 검찰총장에, 그리고 러시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발언을 꾸준히 해서 "러시아의 자산(Russian asset)"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털시 개버드(Tulsi Gabbard)를 국가정보국장에 임명하겠다고 했다. 트럼프의 대통령직 인수위는 후보들의 문제가 더 나올 것을 우려, 연방수사국(FBI)의 의례적인 후보 조사도 건너 뛰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가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한 폭스뉴스 진행자 피트 헤그세스(Pete Hegseth)는 보수 기독교, 극우주의와 관련 있는 타투로 논란이 되었고, 그가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도 제기되었다. (이미지 출처: New York Post)

물론 이들이 과연 의회의 인준을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맷 게이츠의 경우, 공화당 의원들도 절대 안 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가 이런 사람들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의 생각과 다음 4년의 미국 정부가 어떤 모습일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오터레터(Trump, Part II)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트럼프는 이번 행정부를 명망이나 능력이 아닌 자신에게 대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뽑은 인물로 구성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셈이다. 이들은 트럼프의 말에 노(No)를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트럼프 1기와는 완전히 다른, 훨씬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게 거의 모든 매체의 예측이다.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원내대표가 언급한 "과격주의"는 바로 그렇게 가드레일이 없이 달리게 될 트럼프 2기 정부다. 민주당은 그런 과격 세력이 미국의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 하지만, 그 결과—'패배의 해석'에서 이야기한 것처럼—민주당은 많은 유권자들 눈에 '보수당'으로 보이는 건 피할 수 없다. 민주당이 지키겠다는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게 보이겠지만, 현 시스템 자체를 불신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구체제(ancien régime, 구질서)의 수호자로 인식된다.

최근 뉴욕타임즈의 보수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스(David Brooks)가 자기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칼럼을 내놨다. 브룩스는 오터레터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그의 이번 칼럼은 자기 목소리로 녹음한 것이다. (요즘 뉴욕타임즈가 오디오 콘텐츠를 많이 밀고 있다). 제목은 "어쩌면 버니 샌더스의 말이 맞다(Maybe Bernie Sanders Is Right)."


데이빗 브룩스는 미국 유권자들이 다시 한번 트럼프를 선택하기까지 미국 사회의 변화를 이렇게 요약한다.

미국은 지난 40년 동안 정보화 사회(Information Age)에 살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이 서로 의견이 충돌하면서도 동의했던 한 가지는, 후기 산업화 사회에서 사람들이 직업을 가지려면 대학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전망이었다. 그 가정하에 미국은 제조업을 해외로 이전했고, 정보화에만 초점을 맞췄다. 이민 정책도 교육을 받은 미국인들이 국내에서 값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도록 세워졌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서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경쟁에서 낙오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린에너지를 사용하는 사회로 바뀌려고 했지만, 제조업과 교통은 여전히 화석연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는 사실은 조금 다른 얘기지만, 완전히 무관한 얘기는 아니다.)

데이빗 브룩스 (이미지 출처: Wikiquote)

현재 미국에서 대학 학위의 소지 여부는 정치적 성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 미국 사회에서 트럼프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그리고 수적으로 우세한 노동자 계급(a multiracial, working class majority)을 단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대학 학위는 단순히 지지하는 정당만 결정하지 않는다. 고졸 학력자는 대졸 학력자보다 비만이 될 확률이 높고, 더 일찍 죽는다. 마약에 중독될 가능성도 높고, 친구의 숫자도 더 적다.

한때 미국 사회의 중추 역할을 했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직장과 수입을 잃고, 자긍심도 상실하게 되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 이들이 트럼프를 보며 기대하게 되었다는 게 브룩스의 설명이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트럼프는 옳은 질문에 대한 틀린 답이다(Trump is the wrong answer to the right question)." 하지만 브룩스는 그들의 울분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지난 20, 30년 동안 이들은 좋은 직업을 찾을 수 없었고, 괜찮은 직업을 가졌던 이들도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해 왔다. 무엇보다 미국 사회가 자기네가 믿고 있는 가치를 무시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 30년 동안 미국을 이끈 사람들은 명문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면 더 나은 사회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들은 불필요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고, 금융위기를 일으켰다. 그렇다면 사회는 이들에게 맡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브룩스는 카멀라 해리스가 성차별, 인종차별 세력에게 패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말한다. 민주당은 파란색 버블 안에 갇혀서 노동자 계급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을 존중하지 않은 게 잘못이라는 거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민주당이 정책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은 데이빗 브룩스의 변신, 혹은 반성이라고 할 만큼 눈에 띈다. 왜냐하면, 그가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말이 귀를 기울일 때가 된 것 같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데이빗 브룩스는 보수 칼럼니스트다. 그는 트럼프 브랜드의 공화당은 좋아하지 않지만, 바이든이나 오바마의 정책보다는 밋 롬니의 정책에 더 끌리는 전형적인 온건 보수 성향이다. 오바마의 경제 정책도 마음에 들지 않는 그가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소개하는 버니 샌더스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작은 변화가 아니다. 그는 샌더스가 주장하는 정책들은 싫어한 사람이지만,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disruption)가 필요하다고 하는 그의 주장에 비로소 동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Disruption은 한국어로 번역하기 까다로운 단어다. '붕괴, 파괴'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기존의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이 들어서는 상황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파괴적 혁신'이라는 번역도 많이 사용한다.

버니 샌더스를 다시 생각하게 된 건 브룩스의 친구들 중 샌더스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트럼프 지지자로 돌아선 것을 보면서라고 한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둘 다 결국 포퓰리즘이지만, 유권자들이 원한다면 트럼프 버전과 샌더스 버전이 경쟁하게 해야 한다는 게 브룩스의 생각이다.


온건 보수로 유명한 데이빗 브룩스가 샌더스 브랜드와 같은 포퓰리스트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이제 판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해도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의 두 번째 승리를 보면서 이제 민주당은 더 이상 포퓰리즘을 묶어두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버니 샌더스 (이미지 출처: Fox News)

'패배의 해석 ③'에서도 전망했지만, 이는 민주당이 내홍을 겪을 것을 의미한다. 어쨌거나 민주당은 현 시스템을 지키려는 정당이고, 낸시 펠로시 같은 강력한 리더의 지도력 아래 질서 정연하게 움직여 온 조직이다. 그런 조직에서 버니 샌더스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고 자기의 주장을 물밑에서 조용하게 주장할 샌더스도 아니다. 그의 주장은 얌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거가 끝난 직후 샌더스가 작정하고 포문을 열었다. 샌더스는 대선 패배를 두고 "노동자 계급을 내팽개친 민주당이 노동자 계급에 버림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라며, 민주당 지도부를 겨냥해 그동안 참았던 불만을 쏟아냈다. 그는 2016년에 블루칼라 백인 노동자들이 떠났지만 2024년에는 히스패닉과 흑인 노동자들도 등을 돌렸다면서, "민주당 지도부는 현 상태(status quo)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미국 유권자들은 분노했고, 변화를 원한다. 그들이 옳다"고 했다.

이 공격에 아플 사람들은 바이든과 해리스, 그리고 펠로시일 거다. 펠로시는 샌더스의 발언이 나온 직후에 한 인터뷰에서 "나는 샌더스를 깊이 존중하지만, 민주당이 노동자 계급을 내팽개쳤다는 그의 말은 존중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받아쳤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의 집권 4년 동안 민주당이 노동자 계급을 위한 경제 정책을 얼마나 열심히 추진했고, 성과를 냈는지 이야기했다.  

낸시 펠로시의 주장은 맞다. 노동자 계급에 돈이 돌아가게 하는 것을 막은 게 공화당이지, 민주당은 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동원했다고 할 수 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후가 가장 진보적인 정책을 폈고, 이게 앞으로 미국의 모습을 바꿀 거라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샌더스의 시각은 다르다. 그는 "낸시 펠로시는 나의 친구"라면서도 "국민 2,000만 명이 시간당 15달러 이하를 받으며 일하고 있지만, 연방 상원은 지난 2년 동안 미국의 최저임금을 상향 조정하는 법안을 추진하지 않았다"며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샌더스의 진짜 비판은 따로 있다.


'버니 샌더스의 시간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