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는 지난해 선거 기간 전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내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세계는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이상 우크라이나는 항전을 계속할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현재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미국이 지원하는 돈과 무기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즉, 그의 취임은 전쟁의 끝을 의미한다.

어떤 방식이든 전쟁이 끝나는 것을 환영하는 사람이 많다. 전선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은 명목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죽고 다치는 군인과 그 가족에게는 비극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국민들 사이에도 전쟁을 끝내자는 여론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

아래 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2023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계속 싸우자는 여론이 소수로 돌아섰다.

출처: Gallup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부가 계속 싸우려는 이유는 전쟁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런 전쟁이 또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지금 러시아와 휴전에 들어가면 블라디미르 푸틴은 몇 년의 재정비를 거친 후 다시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이 전쟁은 2022년 2월에 러시아의 "특별 군사작전"으로 시작된 게 아니라, 2014년에 크름반도의 점령으로 시작된 것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를 얻기 위해 이런 싸움을 하는 게 아니다. 본인이 여러 차례 강조한 것처럼,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독립 국가가 아니라, 러시아의 일부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개입으로 당장 휴전이 성립된다고 해도 푸틴은 언제든 우크라이나를 재침공해서 이번에 이루지 못한 목표를 달성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의 무기 공급 중단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정전, 혹은 휴전 협정을 맺게 된다면 우크라이나로서는 푸틴이 다시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 이상의 안전 조치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이다. NATO는 회원국 하나가 침략당하면 회원국 모두가 침략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대응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러시아는—훨씬 막강한 상대인 NATO와 싸울 각오를 하지 않는 한—우크라이나를 침략할 수 없다.

게다가 푸틴이 애초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가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도 이런 푸틴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트럼프도 "바이든이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바람에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현재 회원국들 사이에서도 합의가 되지 않은 사안이고, 무엇보다 트럼프가 반대한다. 고립주의를 선호하는 트럼프는 미국이 NATO에서 탈퇴하기를 원하는데, 그게 미국 내 여론 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까지 가입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경우 바이든이 지원한 것 이상의 지원—병력 포함—을 해야 한다. 그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이다.

또 다른 옵션도 있다. 6.25전쟁이 휴전되었어도 한국에서 떠나지 않는 미군에서 보는 것처럼,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군의 주둔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후 미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할 일은 없다고 못 박았다. 사실 미국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점령 이후로 우크라이나에 군사 고문단 형태로 소수의 미군을 파견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대규모 침공을 저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들이 우크라이나군에 전수한 현대적 전술, 교리였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따라서 미군이 군사 고문단 수준을 넘어서는 규모의 실제 병력을 보내지 않는 한, 전쟁 억지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2022년 2월부터 2025년 2월까지의 전선 변화. 왼쪽 위 지도를 보면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점령하고,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현재(오른쪽 아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25%를 장악하고 있다.
출처: BBC

트럼프는 지난 12일, 푸틴과 통화를 마친 후 "양측이 협상을 즉각 개시하는 데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J.D. 밴스 부통령과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정전 협상을 이끌게 된다고 했다. 이 발표를 하는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평화 협상 과정에서 우크라이나가 동등한 일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Do you think Ukraine is an equal member of the peace process?)"

듣기에는 단순한 질문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맞서 싸운 전쟁을 끝내려는 자리에 우크라이나가 협상의 일원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훨씬 더 깊은 것을 묻고 있다. 바로 트럼프가 생각하는 우크라이나의 미래, 더 나아가 국제 관계에 관해 그가 가진 태도를 끌어내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답했다.

"음...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저는 그들이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죽고 있으니 평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즉답을 피한 것 자체가 우크라이나가 협상의 일원이 되지 못한다는 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 말을 들은 기자들이 일제히 추가 질문을 큰 소리로 던졌다. 민감한 사안을 건드린 것을 직감한 트럼프는 "저는 그 전쟁은 하면 안 되는 전쟁이라고 (예전에) 말했습니다. 저는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 생각입니다"라고 둘러댔지만, 곧바로 "우크라이나는 평화 협상 테이블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퍼졌다.


한편 이 뉴스가 나올 때까지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철저하게 트럼프에 감사한다는 태도를 지키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협상은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고, 그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심 강하고 미성숙한 트럼프의 기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순간, 우크라이나의 미래가 사라질 수 있다.

젤렌스키가 트럼프가 선거에서 패하기를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떤 미국인의 말처럼 그는 "개인적인 분노를 억누르고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전쟁 이전부터 젤렌스키를 비웃고, 조롱하고, 그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는데,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개인적인 수모를 참아내는 성숙함"은 국가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보여준다는 게 그 미국인의 말이었다.

그 미국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우리나라가 부끄럽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이미지 출처: 젤렌스키의 X 계정

하지만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협상장에서 배제하기로 한 이상 젤렌스키는 계속해서 감사하다는 말만 할 수는 없다. 젤렌스키는 "주권국으로서 우리가 배제된 합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발표했고, 즉시 트럼프와 긴 통화를 한 후, 그 결과를 소셜미디어에 짧게 공유했다. (내가 굵게 강조한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저는 트럼프 대통령과 길고 자세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는 트럼프 대통령이 공통된 기회와 진정한 평화를 어떻게 함께 이룩할지에 진정한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I had a long and detailed conversation with President Trump. I appreciate his genuine interest in our shared opportunities and how we can bring about real peace together.)

트럼프 대통령과 저는 외교, 군사, 경제와 관련한 많은 문제를 논의했고, 트럼프 대통령께서는 푸틴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제게 전해주셨습니다. (We discussed many aspects—diplomatic, military, and economic—and President Trump informed me about what Putin told him.)

우리는 미국이 가진 힘에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다른 파트너들이 함께한다면 러시아가 평화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We believe that America’s strength, together with Ukraine and all our partners, is enough to push Russia to peace.)"

함께(together)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사용한 것을 보면, 젤렌스키가 트럼프의 생각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대신, 겉으로는 감사하며 자존심을 세워주고 물밑으로 협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위의 얘기를 포함한 메시지의 전체를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언론이 몇 시간 전에 속보를 전했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평화 협상에 포함시키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도 당연히 참석해야 한다"라면서, "그들도 이 작업의 일부 아닌가. 우리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그리고 다른 파트너들도 참여해야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분명한 태도 변화다.


우크라이나가 협상 테이블에 있다고 해서 국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2014년 이후로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나가는 것"이 정전의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을 누누이 해왔다. 물론 러시아는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협상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트럼프의 국방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폭스뉴스를 진행하던 시절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깃들기를 원하지만, 2014년 이전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목표라는 것을 인정하고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이런 협상은 없다. 협상은 양쪽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주장하면서 시작하는 게 맞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지적하는 것처럼 트럼프는 자신의 협상 능력을 과시하면서 상대방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을 요구한 후에 협상에 들어가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의 국방부 장관은 미리 카드를 보여주고 시작하려는 것이다. 헤그세스는 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기 생각이었을 뿐이며, 트럼프 행정부의 공식 의견이 아니었다고 발을 뺐다.

하지만 이미 미국의 생각은 드러났고, 푸틴은 유리한 고지에서 협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통령이 된 후로 전쟁을 수행하며 전력 질주를 해온 젤렌스키는 트럼프와 푸틴이라는 높고 험난한 고지를 남겨두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