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왕용민의 우비 입력기는 언어적, 기술적 문제를 극복하고 중국을 컴퓨터의 세계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라질 뻔한 중국의 글자, 한자를 지켜냈다. 하지만 그런 우비 입력기는 지금은 1980년대와 같은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고, 첫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수십 개의 다른 입력 방법과 힘겨운 경쟁을 하고 있다.

우비 입력기는 사라진 게 아니다. 아직도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다른 입력 방법을 사용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사용하는 쿼티 키보드와 물리적으로 똑같이 키보드를 사용하지만 우비와는 다른 방식이고, 한자를 현대화의 길로 이끈 우비 입력기는 대중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왜일까?

우선 경쟁 상황을 이야기해 보자. 왕용민이 한자를 분석해서 우비 입력기를 만들던 시점에 같은 목표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던 다른 많은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왕용민이 가장 먼저 훌륭한 입력기를 들고나왔기 때문에 스타가 되었을 뿐, 다른 엔지니어들이 작업을 포기한 게 아니다. 그런데 우비 입력기가 나오면서 한자 입력에 대한 접근법을 완전히 바꿨고, 그렇게 문이 열리자 우비의 뒤를 이어 1,000개가 넘는 새로운 방법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우비의 접근법

정확하게 무엇을 바꿨다는 얘기일까? 왕용민이 우비 입력기를 통해 보여준 것은 키보드의 키와 그것을 눌렀을 때 입력되는 것, 혹은 모니터에 보이는 글자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한글이나 영문 타자를 할 때는 ㄱ(기역)을 누르면 ㄱ이 찍히고, A를 누르면 A가 찍힌다. 즉 기계적인 입력이다. 하지만 그런 기계적인 일대일 입력이 불가능한 한자의 경우 자판에서 내가 누르는 키가 화면에 나타난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사용자가 이런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만화 '심슨가족'에서 한자 기계화의 어려움을 풍자한 장면. 키보드와 입력 내용이 일대일로 대응해야 한다면 모든 글자가 키로 존재해야 한다. (이미지 출처: Twitter)

그렇게 해서 쏟아져 나온 다른 방법에는 기발한 것도, 황당한 것도 있었다. 가령 칼 도(刀)라는 글자가 영문의 D를 닮았다면 D를 누르면 刀를 비롯해 비슷한 모양을 가진 한자가 화면에 등장하고, 사용자는 그중에서 刀를 고르는 입력기도 있었다. 이 방식으로는 나무 목(木)을 표시하려면 T를 누르면 된다. 그러면 木, 七, 水처럼 T를 닮은 글자들이 화면에 뜨고 사용자는 그 중에서 木을 고르면 된다. 심지어 한자에 일일이 숫자를 부여해서 누르게 하는 방식도 있었다. 개 구(狗)=4303, 불 화(火)=9080... 식으로 정해 놓으면 숫자 키패드만으로 한자를 입력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암기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들이 등장하면서 표준 입력기가 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졌다. 경쟁의 기준은 당연히 '어떤 입력기가 더 쉽고, 더 빠르냐'였다. 새로운 입력 방식을 소개하는 컨퍼런스장에서 서로 다른 입력기의 제작자들 사이의 논쟁이 물리적인 싸움으로 번져 행사장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입력기가 중국에서 얼마나 뜨거운 이슈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기억해야 할 게 있다. 우비 입력기는 물론이고 우비와 경쟁하는 다른 대부분의 입력기도 1) 키보드에서 키를 누른 후 2) 화면에 뜨는 글자 중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고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글 키보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자 입력키를 눌렀을 때 컴퓨터가 같은 발음을 가진 한자들을 보여주고 원하는 글자의 번호를 누르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비 입력기에서 GGH를 연이어 눌렀을 때 컴퓨터가 제안하는 글자들 (이미지 출처: 유튜브 캡처)

따라서 다양한 입력기들 사이의 경쟁에서 핵심은 사용자가 입력하려는 한자가 무엇인지를 입력기, 즉 컴퓨터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예측해서 보여주느냐에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글자를 파악해서 제일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지만, 경쟁하는 기업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입력을 완료한 글자 다음에 나올 글자를 예측해서 먼저 제안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가령 北(북)이라는 한자를 입력하는 순간, 입력기는 北京, 北方 등 많이 사용하는 단어를 제시함으로써 사용자가 北 다음에 오는 글자를 따로 키보드를 두드려 찾는 수고를 덜어주고, 그렇게 해서 입력 시간을 줄여준다.

이런 방식은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요즘은 '자동 완성(autocomplete)'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인이 사용하지만, 중국은 이를 1980년대부터 개발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네덜란드의 홍수 관리 기술처럼 다른 나라에서는 고민할 필요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씨름한 결과, 다른 나라들보다 앞선 기술을 갖게 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 볼 수 있는 자동 완성(autocomplete) 기능

입력기 경쟁의 시작

다른 입력기들이 우비 입력기를 위협하게 된 배경에는 1980년대 중국 정부가 시도한 정책 변화가 있다. 바로 한어병음(漢語拼音, Hànyǔ pīnyīn, 한위핀인) 정책이다. 흔히 줄여서 '핀인(pinyin)'이라고 부르는 이 표기는 중국어의 발음을 로마자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통일된 표준 발음 기호다. 예를 들어 베이징(北京)을 핀인으로 표기하면 Běijīng으로, 국제음성기호가 들어가 있어서 중국의 성조를 모두 반영하기 때문에 각 글자가 가진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글을 배우기 시작하는 유치원생들부터 한어병음 표기법을 배우게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설명하겠지만, 문제는 한어병음 정책의 시작과 왕용민의 우비 입력기 등장은 똑같이 1980년대로 시기가 겹친다는 사실이다. 한자 입력기를 개발하는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정부의 결정으로 모든 국민이 익히게 된 한어병음 표기법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사용법을 익히는 데 시간과 노력이 드는 우비 입력기와 달리, 이미 어릴 때부터 배우게 되는 한어병음 표기법에 따라 원하는 단어의 소릿값을 영문 자판으로 입력하고, 그 결과로 제시되는 글자들 중에서 선택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한자를 소리나는대로 표기하는 한어병음, 혹은 핀인 (이미지 출처: Mandarin Learning Tips Blog)
한어병음을 이용한 입력기 (이미지 출처: Yabla Chinese)

왕용민은 한어병음을 이용한 입력기 사용에 강하게 반대한다. 단순히 우비 입력기와 경쟁하는 제품들이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비롯해 한어병음을 이용한 입력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우려는 이들 입력기가 (한자의 구성 요소를 분석해서 만든 우비 입력기와 달리) 한자를 순전히 소리와 그에 대응하는 글자의 덩어리로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컴퓨터 자판이 보편화된 이후 사람들의 손 글씨가 엉망이 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다른 언어권의 글자들과 달리 획이 많고 복잡하게 생긴 한자는 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한어병음을 사용한 입력기에 익숙해진 세대는 한자를 눈으로 고르기만 할 뿐, 직접 쓰지 못하게 될 위험이 크다. 궁극적으로 모든 한자 입력기가 비슷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만, 우비 입력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각 글자의 구성요소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위험의 정도가 다르다. 이런 이유로 중국 문화의 핵심인 한자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비 입력기가 더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중국인 중에서 우비 입력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수십 가지의 서로 다른 입력기를 사용해도 대부분은 한어병음 표기를 로마자로 입력하고 한자를 고르는 방법을 기초로 한 입력기들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그래도 결국에는 빠르고 편리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승리한 거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빠르게 익힐 수 있는 것과 타자를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다른 얘기다. 한어병음을 이용한 입력기는 별도의 학습 과정이 없이 영어(로마자) 알파벳 타자만 할 수 있으면 바로 사용 가능하다는 점에서 학습은 빠르지만, 타자 속도가 가장 빠른 것은 아니다.

중국에는 컴퓨터 타자 속도를 겨루는 대회가 있다. 한국에서도 과거 한때 있었을 법한 대회이지만, 중국의 대회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참가자들이 사용하는 입력기가 제각각이기 때문. 각 참가자는 자기에게 맞는 입력기로 연습하고, 대회에 참가할 때 자신이 어떤 입력기를 사용할 것인지 밝힌다고 한다. 따라서 우승자가 사용한 입력기가 어떤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 건 당연하고, 이런 이유로 입력기를 만든 기업들은 이런 대회를 홍보의 기회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 대회는 자동차 경주대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우승자뿐 아니라, 우승자가 어떤 제조사의 자동차를 타고 참여했느냐에도 관심이 있다. 타자 속도가 가장 빠른 사람이 선택한 입력기라면, 그리고 그가 그걸로 우승했다면, 그걸 본 다른 사람들도 그 입력기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IMSA)

그런데 이런 대회에서 우비 입력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우승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실제로 우비 입력기가 한어병음에 기반한 입력기보다 더 빠르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즉, 왕용민이 개발한 입력기는 한자의 구성 원리에만 충실한 게 아니라, 그 어떤 입력기보다 빠른 속도로 타자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훌륭한 입력기가 왜 외면받을까? 우비 입력기 학습에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도 하나의 요인이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요인이 하나 더 있다. 중국 정부가 우비 입력기보다 한어병음에 기초한 입력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한자의 교육과 보존에 유리한 우비 입력기를 마다하고 다른 입력기를 선호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들어보면 중국과 중국 인터넷의 미래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이유다.


마지막 편 '자동 완성 ④ 쿼티 효과'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