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빈(李艺彬)은 중국 서부 간쑤성(甘肃省)에 있는 주취안(酒泉)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빈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그저 힘들었다는 것이다. 주취안은 간쑤성에서도 고비 사막에 위치한 곳으로, 여름에는 아스팔트가 녹아 옷에 묻을 만큼 뜨거운데, 그렇다고 겨울이 따뜻한 곳도 아니다. 무엇보다 주취안은 일 년 열두 달 건조한 지역이다.

게다가 이빈은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국의 역사를 후퇴시켰다는 문화혁명이 1966부터 1976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힘든 시기를 중국에서도 가장 살기 힘든 변방으로 취급되는 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이빈이 힘들었다고 하는 건 빈말이 아니다. 주취안에는 철강 제품을 만드는 큰 공장이 있었고, 주변에는 아주 가난한 농촌 마을들이 있었다.

이빈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덜 힘든 일을 하며 살았다. 가무단(歌舞團)을 이끌고 그 지역의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정부에서 승인한 공연—프로파간다 공연—을 하는 게 그의 직업이었다. 이빈이 네 살 반이 되던 때, 아버지는 이빈에게 이제부터 악기를 하나 배워야 한다고 하며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는 자기 딸이 농장이나 공장에서 힘든 일을 하며 사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시장에 갔다가 뙤약볕 아래에서 옷을 팔고 있는 여자아이를 봤다. 아버지는 이빈에게 "저 애 보이지? 쟤는 아빠가 옷을 파는 걸 돕고 있는 거야. 바이올린 연습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너도 저 애처럼 뙤약볕에서 일해야 하는 거야." 이빈은 끔찍하게 더운 그곳에서 일하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빈이 바이올린 연습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니다. 학교가 있는 날은 2시간, 주말과 휴일에는 4, 5시간을 연습하는 걸 좋아할 아이가 있을까? 이빈은 바이올린 연습을 하면서 의자 두 개에 고무줄을 묶어 놓고 고무줄놀이를 하기도 했고, 보면대(악보대)에 만화책을 놓고 읽으면서 연습하기도 했다.  2시간 내내 연습했다고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는 연습한 흔적이 목에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엄마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 되면 목을 오랫동안 꼬집어서 빨갛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빈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음감도 좋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이빈에게 자상하고 인내심이 많은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건으로도 뛰어 넘을 수 없는 난관이 두 사람 앞에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빈의 어린 시절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였다. 중국 공산당은 1960년대 부터 모든 서양음악을 금지했다. (이 이야기는 '흠집 난 카세트테이프'에도 등장한다.) 서양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던 이빈의 아버지는 늦은 밤에 일어나 러시아 라디오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음악을 몰래 듣곤 했다.

악기를 구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혁명 기간에 바이올린, 피아노 같은 악기들을 부수고 불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표를 세우면 반드시 해내고 마는 성격의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두 대 구할 수 있었다. 하나는 근처 마을의 학교 창고에서 압수된 채 보관 중이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른 악기와 함께 불태우려던 걸 몰래 빼돌린 것이었다. 의외로 악기보다 구하기 어려운 건 악보였다.

이빈의 아버지가 이끌던 가무단에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몇 명 있었는데, 이들은 음악학교를 다니지 않고 혼자 악기를 배운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은 악보책을 몇 권씩 갖고 있었는데, 한 권에 80~90페이지나 되는 이들 악보책의 원본이 되는 책도 필사본이었다. 전부 인쇄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방식대로 손으로 복사해 퍼진 것들이었다. (흥미로운 건, 그런 악보로 유명한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연주해도 그걸 한 번도 들어 본 적 이웃들은 그저 악기 연습 정도로 생각했단다.)  아버지는 그런 필사본 악보책을 일일이 빌려서 밤을 새워가며 펜과 잉크를 사용해 옮겨 적었다. 이빈은 아버지가 악보를 필사하는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손이 무척 빨랐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중요한 얘기를 할 게 있다며 이빈을 불렀다. 이빈은 야단맞는 줄 알고 긴장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이빈에게 산시성(陕西省)에 있는 시안음악학교(西安音乐学院)에 지원하라고 했다.

중국 공산당을 설립한 마오쩌둥이 1976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문화대혁명은 끝났고, 1년 뒤에는 그동안 닫혀있던 음악학교들이 다시 문을 열면서 학생들을 받기 위해 오디션을 열고 있었다. 시안음악학교가 있는 산시성은 간쑤성과 함께 중국 북서부에 속하지만, 그들이 살던 주취안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다. 게다가 시안은 중국에서 가장 큰 대도시 중 하나다. 간쑤성 사막에서 태어나 자란 이빈에게는 완전히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이빈의 아버지는 딸이 사막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가길 바랐다. 시안에서 음악학교를 나오면 큰 오케스트라에 입단할 수도 있고, 대학교에 입학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이제 아버지에게 이빈의 음악학교 입학은 반드시 이뤄야 하는 일생일대의 목표가 되었다. 아버지가 이빈에게 이 이야기를 한 건 이빈이 7살 때였다. 시안음악학교는 중학교 과정으로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4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이빈은 11살 반이 되던 1981년, 비로소 오디션을 받을 자격이 생겼다. 하지만 일단 멀고 먼 시안까지 가는 여비부터 마련해야 했다. 두 사람의 기차표와 숙박비, 식비 등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집안 물건들을 팔았고, 친척들의 도움도 받았다. 이빈의 할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재산이 좀 있었는데, 자식들에게 분배되지 않고 남아있던 유산의 일부를 이빈의 아버지가 끌어오는 과정에서 형제들과 다투게 되었고, 그때의 반목은 오래 지속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오디션을 받으러 갈 여비를 만들 수 있었다.

당시 열차로 주취안에서 시안까지는 36시간이 걸렸다. 이빈에게는 태어나서 해보는 가장 먼 여행이었다. 그 기차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찐빵이었다. 달걀과 밀가루를 섞어 만든 갈색의 찐빵은 달걀 향이 났고, 아주 폭신폭신했다. 아버지는 집에서는 비싸서 거의 먹어 본 적 없는 귀한 찐빵을 12개 들이 한 상자를 사서 딸에게 전부 줬고, 이빈은 여행 중에 매일 아침 2개씩 먹었다.

도착을 6시간 정도 남겨 놓고 창밖을 내다보니 온통 초록색이었다. 이빈과 아버지는 열차의 창문을 열었다. 난생 겪어 보지 못한 습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두 사람은 너무 신기해서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었다. '이런 공기를 마시고 산단 말이야?' 철로 주변부터 저 멀리 언덕까지 모두 초록색이었다. 그렇게 나무가 많은 건 처음 봤다.

역에 내리니 장사하는 사람들이 난생처음 보는 과일들을 팔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석류와 감이었다. 역시 난생처음 호텔에 들어간 이빈은 이렇게 멋진 도시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두 사람이 묵게 된 호텔은 음악학교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빈처럼 부모와 함께 오디션을 보러 온 아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이들이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빈과 아버지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옆 방에 묵고 있는 여자아이는 시안에서 가까운 또 다른 큰 도시에서 왔다고 했다. 그 아이는 좋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오케스트라의 단원이라고 했고, 오케스트라의 레파토리를 다 알고 있었다.

그 가족과 이야기를 하던 이빈의 눈에 책 한 권이 보였다. 악보책이었다. 인쇄된 악보책. 이빈은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인쇄된 서양 악보를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다. 문화혁명 이후로 허용된 악보는 서양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 중국 악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눈에도 낯설었던 것 같다. 이빈의 아버지는 악보책을 잠깐 봐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고 책을 살펴봤다.

오디션은 세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번째 라운드가 끝나자 떨어진 아이들이 빠져나갔고, 두 번째 라운드에서 떨어진 아이들까지 집으로 돌아가자 호텔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빈은 두 라운드를 모두 통과해 살아남았다. 이빈을 포함해 오디션의 마지막 라운드에 들어간 지원자는 15명이었고, 그중에서 단 6명만이 합격증을 받게 될 것이었다.

남은 15명 중 14명이 최종 오디션을 마쳤고, 이빈은 마지막 15번째로 심사장에 들어갔다. 여섯 명의 심사위원이 앉아있는 커다란 방이었다. 앞의 두 번과 달리, 마지막 오디션에서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연주하게 되어 있었다. 이빈은 피아노 반주와 함께 연주해 본 적이 없었지만 자신이 있었고, 협주곡도 자기가 좋아하는 곡이었다. 특히 기술적으로 까다로운 부분이 있어서 연주 실력을 발휘할 기회도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연주를 시작해서 악보 첫 장을 끝내기도 전에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손뼉을 크게 짝짝 치더니, "됐어요! 가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빈이 솜씨를 보여줄 기회도 주지 않고 오디션을 중단한 것이다. 이빈은 심사위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중 한 사람—두툼한 이중턱을 가진 교사였다—이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그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이중턱도 같이 흔들렸다. 그 교사가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아냐, 아냐, 아냐. 어림도 없어. 더 안 들어도 돼"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이빈은 겁에 질린 채 심사장을 나왔다. 아버지의 꿈이 산산조각 난 것이다.


'오디션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