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낸시 펠로시는 바이든이 2020년에 당선된 후 약속한 것처럼 "징검다리 대통령"이 되어 다음 주자에게 자리를 넘겼다면 트럼프가 다시 당선되는 것은 피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바이든은 왜 마음을 바꿨을까?

2023년으로 돌아가 보자. 일찌감치 2024년 대선에 나오겠다고 선언한 트럼프의 인기는 점점 커지고 있었고, 카멀라 해리스는 존재감이 없는 부통령이었고, 수많은 여론조사가 민주당 정치인 중에서 트럼프를 상대할 만한 사람은 바이든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느 당이든 대통령이 직접 재선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기 전에 다른 정치인이 재선을 막겠다고 하는 일은 없다. 적어도 당선 가능한 수준의 경력과 인기를 가진 정치인이라면 그렇다. 적 앞에서 리더의 자격을 의심하는 정치인은 당내에서 지지를 받기 힘들다.

만약 바이든이 1968년의 린든 존슨이 그랬던 것처럼 재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면 민주당 내의 주지사, 상원의원 중에서 출사표를 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고, 그들이 요란스럽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유권자들은 낯선 이름들에 익숙해졌을 것이고, 경선에 승리한 후보는 인기 없는 바이든과 그의 정책의 굴레에서 벗어나 "변화를 불러올 후보"라는 타이틀을 트럼프에게서 빼앗아 올 수 있었다. 바이든과 마찬가지로 트럼프도 이미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이든은 민주당이 열린 경선을 할 수 없는 시일까지 버티다가 결국 토론회에서 무너져 사퇴했고, 그러면서 카멀라 해리스를 지목했다. 경선이 생략되면서 해리스는 깔끔하게—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후보가 되었고, 2016년의 힐러리 클린턴 같은 '당에서 점지한 후보'라는 이미지를 안고 선거에 임하게 되었다. 이번 선거의 패배는 결국 바이든의 탓이라는 원망이 나오는 이유가 그거다.

펠로시는 열린 경선을 했더라도 해리스가 후보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해리스가 열린 경선을 통해 후보가 되었으면 트럼프를 상대로 승리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왜일까?

왼쪽부터 카멀라 해리스, 조 바이든, 낸시 펠로시 (이미지 출처: Axios)

현대 미국 정치에서 대통령 후보 경선은 유권자들의 생각, "나라의 온도"를 측정하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은 개인의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때가 맞아야 한다. 그 시점에서 국가의 상황, 국민의 요구가 특정 정치인과 맞을 때 대통령이 결정된다. 트럼프의 4년을 보내기 전까지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선거가 보여주듯, 미국 유권자의 생각은 여론조사만으로는 알 수 없다. 여러 주를 돌며 표를 받는 경선(프라이머리, 코커스) 과정에서 비로소 어떤 후보가 그 시점에 유권자의 요구에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거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많은 사람이 2016년에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내의 끈을 활용하지 않고 유권자들의 결정에만 맡겼다면 그해 민주당 후보는 버니 샌더스가 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2016년의 공기

지금 돌이켜 보면 2016년의 미국 정치에는—지금도 완벽하게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특별한 변화가 있었다. 트럼프의 등장이 그 변화가 아니라, 트럼프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공기'가 있었고, 그게 나이 든 정치인 샌더스의 인기를 만들어 냈다.

많은 사람들이 샌더스를 민주당 정치인으로 착각하지만, 그는 민주당과 함께 움직일 때가 많을 뿐 스스로를 민주사회주의자라 부르는 사람이다. 그런 샌더스가 민주당 경선에서, 한 때 민주당 당원이었고 정치 경험이 없는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면, 공화당과 민주당을 신뢰하지 않는 심각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걸 감지한 사람이 주장했어도 몇 차례의 선거를 통해 확인하기 전에는 그저 많은 가설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번 선거로 그 가설은 비로소 검증된 것이다.

유세장의 버니 샌더스 (이미지 출처: Vox)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슈가 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쓴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1970년대부터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경선을 통한 대선 후보 선출 방식이 과연 좋은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전에는 대통령 후보는 최종적으로 당 중진이 결정했고, 경선은 그저 그들이 참고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구속력 없는 제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1960년대를 거치면서 민의가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뒷방("smoke-filled room")에서 소수의 중진이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에 불만이 쌓이면서 경선에서 얻은 표를 기계적으로 반영해서 후보 결정권을 일반 당원과 유권자들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궁극적으로 1970년대에 경선을 바꾼 변화가 일반 유권자에 힘을 실어줬고, 그 결과로 트럼프가 후보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2016년에 힐러리 클린턴, 2024년에 카멀라 해리스를 대선 후보로 삼은 민주당의 결정은 큰 틀에서 보면 일반 유권자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당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철학에 기반한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존재한다. 장점은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트럼프를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뽑기 힘들다는 것이다.

반시스템(Anti-System)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의 사회학자 트레시 맥밀란 코텀(Tressie McMillan Cottom)는 트럼프에게 재능이 하나 있다면 그건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아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겉으로는, 혹은 여론조사원들에게 다른 걸 원한다고 해도, 트럼프는 그들이 드러내지 않고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지지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트럼프에 두 번이나 패한 것은 바로 유권자들이 말하지 않는 생각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디어오늘에 쓴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민주당은 트럼프라는 위협을 유권자들이 제대로 이해한다면 해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해 표를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트럼프가 지지자들에게 의회를 습격하라고 명령한 것을 똑똑히 봤다. 그들은 트럼프가 의회를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한 게 아니라, 공격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 것에 가깝다. 의회가 작동하지 않는 미국 시스템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해리스가 "제도를 보호하자"고 했던 주장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지트 히어는 트럼프의 시대를 이해하는 방법은 미국이 진보와 보수가 나뉘는 게 아니라, 시스템에 찬성하는(pro-system) 진영시스템에 반대하는(anti-system) 진영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트럼프는 미국의 의회만 공격한 게 아니다.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비롯한 군사협력을 싫어하고, 경제협정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권력이 자기에게 있음을 항상 확인하고, 체감하고 싶어 하는 트럼프는 백악관에 있을 때도 모든 판단은 자기가 직접 내리고 싶어 했다. 그런 그에게 시스템은 자신의 결정권을 제약하는 존재이고, 따라서 시스템을 불신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The Seattle Times)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미국의 유권자들이 시스템을 불신하기 시작했고, 트럼프가 자기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대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눈이 맞은" 것이다. 하지만 2016년의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레비츠키와 지블랫이 이야기하는 '당의 개입'이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공화당 내에서는 당이 개입해서 트럼프의 후보 선출을 막으라는 요구가 많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지는 않았지만, 트럼프가 탈당해서 무소속 후보가 될 것을 염려한 공화당은 개입을 포기했다.)  

공화당에서 이런 일이 진행되는 동안 민주당은 전혀 다른 틀로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의 가설에 따르면 트럼프는 과격한 우익의 일부에게서 지지를 받는 후보였기 때문에 민주당의 집토끼를 지키고, 전통적인 레이건-부시의 공화당 지지자를 데려오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설이 완전히 틀렸음이 확인되었고, 민주당은 2016년 이후로 미뤄온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

그 변화는 전략의 변화가 아니라,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유권자들을 되찾아 올 수 있는 아주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자기 변신이어야 한다. 체제, 혹은 시스템의 수호자라는 타이틀을 버려야 한다면 당내 갈등도 심각할 것이고, 포퓰리즘을 끌어안는 후보에 대한 저항감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 작업에 뛰어들 정치인은 얼마든지 있다. 민주당이야말로 원조 포퓰리즘 정당이고, 권력은 인재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하다. 문제는 민주당이 다시 옛날처럼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과정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느냐다. 결국 민주당 지도부의 결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