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이상무 ③
• 댓글 3개 보기정치인들은 소비 심리가 위축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전 국민에게 1인당 15~40만 원의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지급했고, 9월에는 2차로 10만 원을 추가로 지급하기로 한 것도, 필요할 때 돈을 과감하게 풀어야 소비가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경기도지사 시절에 직접 배웠기 때문이다. 이런 정책은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트럼프 행정부는 소비 경기 부양을 위해 국민 1인당 1,200 달러 (약 165만 원)를 지급했다. 선진국들은 그렇게 소비를 활성화하는 데 GDP의 10% 이상을 사용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에 에너지 위기가 닥쳤을 때 유럽 국가들이 이에 대응하는 데 사용한 액수가 GDP의 3%에 달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이제 정치인들은 나쁜 뉴스가 들리면 돈을 푼다.

"그뿐 아니라, 나쁜 뉴스가 없어도 만약에 대비해서 돈을 많이 쓴다. 현재 세계에서 부유한 나라들은 평균적으로 GDP의 4%가 넘는 재정적자를 기록하고 있고, 이는 1990년대, 2000년대와 비교해 훨씬 더 높은 수준이다." 각국 정부가 약간의 위태로운 조짐만 보여도 이렇게 돈을 쓰니 경기가 침체에 빠지지 않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설명이다.
선진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고정환율제를 선호하던 개발도상국에서도 변동환율제가 점점 흔해지고 있고, 그런 나라들의 정책 입안자들도 경제 위기를 피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있다. 2000년부터 2022년 사이, 이들 국가 중에서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사례는 5건에서 34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이들 나라에서 국내 채권 시장이 정착하면서, 국가가 적절한 금리에 자국 통화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세계 시장의 변동에 영향을 덜 받게 되었다.
한국에 IMF 구제금융 사태를 몰고 온 동남아시아 연쇄 외환 위기를 떠올려 보면 그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은 외환 보유량도 적었을 뿐 아니라, 외환관리 능력도 떨어졌는데, 대규모 국제 펀드들이 단기 투자금을 회수하고, 뒤이어 주식 대량매도, 환투기 등이 이어지면서 채무 불이행(디폴트)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혹한 조건의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요즘 개발도상국 경제는 팬데믹, 원자재 가격 급등, 미국 금리 상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도 과거 한국에서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중국을 제외한 신흥시장 GDP에서 국가채무의 디폴트 비율은 2019년 0.6%에서 2023년 1.2%로 증가했다. 1987년 신흥시장 채무의 디폴트 규모는 GDP의 11.7%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아주 낮은 수치다.

'오전 10시 정책'
1910년 8월 미국 로키산맥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산불이 일어났다. 아이다호주와 몬태나주에 걸쳐 무려 1만 2,000제곱 킬로미터의 면적을 태운 이 화재를 미국에서는 'Big Burn'(대화재)이라고 부른다. 고온과 가뭄으로 바짝 마른 삼림에 낙뢰와 사람들의 부주의로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강풍으로 여러 개의 산불이 합쳐져 초대형 산불이 된 것이다.
당시 미국의 삼림청(US Forest Service)은 창설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경험도 인력도 부족한 기관이었다. 엄청난 재난에 충격을 받은 초대 삼림청장 기퍼드 핀초(Gifford Pinchot)는 전면적인 산불 억제 정책을 수립한다. '모든 산불은 무조건 진화한다'는 그의 원칙은 화재가 보고된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진화를 완료해야 한다고 해서 '오전 10시 정책'(10am Policy)이라고도 불린다. 이 정책은 이후로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산불 관리의 기본 원칙이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면서 생태학자, 산림과학자들은 이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조금의 산불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바짝 마른 풀과 나뭇가지가 축적되었고, 한 번 산불이 발생하면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그 규모가 커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후 미국 삼림청은 화재를 무조건 진압하는 대신 계획, 관리된 화재를 통해 주기적으로 "축적된 화재 연료"를 태우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다.)
이코노미스트가 우려하는 지점도 다르지 않다. 팬데믹 기간에 OECD 국가들의 실업률이 9%를 넘지 않은 것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었고, 이를 통해 사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좋은 일이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세대가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습관을 평생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듯 직장을 잃고 생계에 위협을 느껴본 사람들은 평생 소비를 주저하게 되기 때문에 이런 세대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은 국가 경제에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데는 비용—많은 경우 국가의 부채—이 들고, 경제적으로 무책임한 행동에 대가를 치르지 않고 반복되면 나중에 피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쳤을 때 그 규모는 국가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질 수 있다.
이는 한 국가의 정책 실패 때문만도 아니다. 이코노미스트의 기사가 현재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로 예를 든 이집트와 파키스탄은 외국의 도움 때문에 문제가 더 커진 경우에 해당한다.

이집트는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겪고 있고, 외부 충격에 취약한 경제 구조를 갖고 있는데, 무리한 인프라 투자를 강행하면서 위험을 키우고 있다가 전 세계적으로 금리가 오르면서 국외 자본이 대거 이탈하면서 금융 위기에 직면했다. 그런데 이집트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이니셔티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중국의 직접 투자를 받아 섬유종합도시, 신행정수도 등의 인프라 건설에 나서고 있다. 또한 카슈미르 지역의 영토 분쟁으로 인도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파키스탄의 경우, 중국이 인도를 견제하는 데 유리한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많은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서구 선진국들이 대출을 꺼리는 동안 중국의 자본이 들어온 것이다.
문제는 이런 나라들이 장기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런 서구의 요구는 돈을 대가로 한 내정 간섭이라는 생각—이는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에 거부하고 있다가, 이런 조건을 내걸지 않은 중국 자본을 만난 것이다. 고질적인 문제는 고쳐지지 않고, 그 규모가 커진 셈이다.
중국이 그렇게 너그러운 대출을 해주니 IMF와 같은 기관도 채무국을 디폴트까지 밀어붙이는 대신 조금씩 대출을 해주면서 병든 경제를 죽지만 않게 살려두고 있고, 그 결과 심각한 문제를 고칠 기회를 놓친다. 정작 채무 불이행에 들어가는 나라는 드문데, 그럴 위험에 처한 나라들은 59개국으로 사상 최다인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가 이런 '연명 정책' 때문이라는 거다.
궁극적으로 국제 정세가 불안하다는 뉴스가 나와도 주식시장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투자자들의 믿음 때문이다. 각국의 정치인과 규제 당국, 그리고 중앙은행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위험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이는 조금의 화재도 허용하지 않았던 20세기 초반의 미국 삼림청이 했던 실수처럼, 결국 일어나게 될 사태의 크기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결국 우리가 듣는 뉴스와 달리 경제가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현실 사이의 격차는 문제가 없거나 해결된 게 아니라, 지연된 것일 수 있다. 트럼프가 관세를 올려도 시장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두고 나오는 해석도 그렇다. 관세에 대비해서 미국의 수입업자들이 재고를 충분히 확보한 경우도 있고, 트럼프가 기대하는 것처럼 수출하는 나라에서 수출 가격을 낮춰서 손해를 끌어안은 경우도 있지만, 두 경우 모두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고, 궁극적으로 그 부담은 미국의 시장과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관세 인상에 따른 영향을 시장에서 느낄 수 있기까지는 약 6~18개월이 걸린다. 실제로 트럼프 1기인 2018년, 중국을 상대로 시작한 무역 전쟁의 결과로 미국 내 제조업체들이 원자재와 부품 비용의 상승, 그리고 중국 시장 수출 감소라는 어려움을 겪게 된 건 2019년이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앞의 글에서 인용한 미국 외교협회 브래드 세트서에 따르면 트럼프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된 무역수지 적자는 관세를 통해 해결될 것 같지 않다. 트럼프의 관세는 미국 경제를 해치고, 소비 심리를 줄이지 않으면 다행일 뿐, 미국 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
무료 콘텐츠의 수
테크와 사회,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냅니다.
유료 구독자가 되시면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