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넷플릭스
• 댓글 71개 보기살다 보면 세상이 우리 눈앞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잘나가던 기업이 고꾸라지고,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의 스타트업이 나타나 시장을 장악하고, 때로는 아예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미국에서 '아마존'이라는 기업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아마존은 온라인에서 책과 물건을 살 수 있는 많은 옵션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아마존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는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사야 할 물건이 있을 때 우리는 오프라인 가게를 찾기 전에 온라인 매장을 확인한다.
그런 아마존이지만, 세상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미국에서 아마존이 성공하는 모습을 본 다른 나라에서는 그 나라 버전의 아마존이 빠르게 등장했다. 중국의 알리바바, 징동닷컴, 한국의 쿠팡, 일본의 라쿠텐 같은 회사들은 자기 나라 소비자의 온라인 구매 패턴을 바탕으로 재빨리 판매망을 구축하고 아마존과 경쟁하거나 진출을 막았다. 물리적인 상품의 이동 경로를 확보해야 하는 산업이 가지는 한계와 각국의 견제가 아마존의 세계 정복을 저지한다.
온라인 콘텐츠 시장은 다르다. 콘텐츠를 사용자에게 빠르게 보낼 전송 네트워크(CDN)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기는 해도, 그 시장에서 배달(delivery)의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게 콘텐츠다. 따라서 사용자가 보고 싶은 콘텐츠를 가진 기업은 배달망을 소유한 기업보다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그 시장의 승자는 넷플릭스와 유튜브다. 지난 몇 년 동안 다양한 경쟁자가 등장했고, 지금도 지역적으로는 그 둘과 경쟁하는 서비스들이 잘 싸우고 있지만, 이들을 꺾을 수 있는 서비스는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서 사용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면 모를까—사용자의 눈을 뺏는다는 점에서 틱톡이 중요한 경쟁자가 되지만, 틱톡은 이들과 다른 게임을 하는 기업이다—현재와 같은 미디어 소비 패턴에서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양분하는 지배구도는 변하기 힘들다.
미국의 동영상 콘텐츠 기업의 세계 시장 점령은 많은 나라에서 마치 외래종의 침투처럼 경계하고 불안해하지만, 한국만은 다르다. 특히 넷플릭스의 경우, 한국은 미국을 제외하면 이 기업의 세계 점령을 유일하게 반기는 나라다. 2012년 '강남스타일'이 유튜브라는 글로벌 서비스를 타고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것처럼, 넷플릭스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가 세계 시장에 쉽게 진출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넷플릭스를 파이프라인이라 부르는 것도 좋은 비유는 아니다. 넷플릭스의 대규모 한국 투자가 없었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작품들이 생겨나 전 세계로 퍼지는 것이기 때문에, 넷플릭스는 한국 콘텐츠의 생산과 배달을 모두 도와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넷플릭스는 한류 바이러스가 퍼지게 도와주는 '숙주'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넷플릭스라는 활동력이 강한 숙주를 만난 K 콘텐츠는 앞으로도 계속 잘나갈 거다'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최근 넷플릭스에 등장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중증외상센터'를 보면 웹소설에서 웹툰, 그리고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로 이어지는 행복한 K-콘텐츠의 사이클을 완성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들리는 얘기는 전혀 다르다. K-콘텐츠가 넷플릭스와의 공생관계를 통해 세계 시장의 주류가 된 것처럼 느끼는 건 착시 현상이라는 거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최근에 나온 '애프터 넷플릭스'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콘텐츠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며 온도와 풍향을 측정해 온 저자 조영신 박사가 쓴 이 책은 한국의 콘텐츠 시장을 잘 아는, "그 바닥 사람들"에게서는 들을 수 있지만 언론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속얘기를 들려준다.
여기에서 내가 꼭 밝혀야 할 게(full disclosure)가 있다. 나는 저자와 오랜 친구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유학하던 시절, 같은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이다. 서로 전공은 다르지만 각자 큰 아이의 나이가 같은 바람에 자주 어울리다가 친해졌다. 저자가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잠시 연락이 끊겼다가, 2014년 '뉴욕타임즈 혁신 보고서'를 함께 번역하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가 미디어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고, 글을 쓰게 된 것은 저자 조영신 박사와 그의 인맥을 통해 접하게 된 많은 친구들과 교류하면서부터다.
그 이후로 다시 10년 넘게 교류하고 있지만, 조영신 박사와의 대화에는 '친구 모드'와 '업계 모드,' 두 개가 존재한다. 친구로서 이야기하면 따뜻하고 재미있지만, 업계의 이야기를 할 때는 싫은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막연하게 들은 얘기, 숫자에 기반하지 않은 분석이나 전망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심지어 미디어 종사자 중에도—"좋은 게 좋은"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을 듣는 사람이 많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책 '애프터 넷플릭스'에는 그런 그의 태도는 물론, 평상시의 말투까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에는 '한국 콘텐츠 비즈니스의 글로벌 생존 해법'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지만, 콘텐츠 업계의 전문가들만을 위해 쓴 책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의 초고가 완성되었을 때 받아 읽으면서 금방 몰입했다. 19세기 이집트의 면화 재배와 미국의 남북전쟁 이야기로 시작하는 1부는 넷플릭스가 등장하면서 한국 미디어업계에 시작된 골드러시와 팬데믹 특수를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는 게 이 대목까지다.
하지만 2부에서부터 K-콘텐츠의 해부가 시작된다. 저자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콘텐츠 강국 한국"의 위상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상대적인지, 다소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진단한다. 넷플릭스는 한국 콘텐츠를 구매하지만, 그 외의 다른 스트리밍 서비스는 왜 냉담한지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시장에서는 다 알고 있는 한국 콘텐츠의 한계를 '국뽕'에 취한 우리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사업자별로 개별 전략이 있으니 그들의 셈법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가성비 있고 글로벌 시장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국 콘텐츠에 환호한다면 셈법과 상관없이 구매할 이유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분명 우리 콘텐츠에 한계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콘텐츠의 제작 방식과 수익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영화, 드라마 업계를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 가장 낯선 대목인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고 유익한 대목이기도 하다. 저자가 "상단은 막혀 있고, 하단은 열려 있다"라고 표현하는 드라마의 수익 배분 방식을 이해하면 넷플릭스가 (미국을 제외하고) 수급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한국 콘텐츠가 왜 더 크게 성장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이 책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건 표지에서 약속한 것처럼 한국 콘텐츠 비즈니스의 "글로벌 생존 해법"을 제시하는 3부 때문이다. 1, 2부가 일반인에게 K-콘텐츠 산업을 설명해 줬다면, 3부는 업계 사람들에게 하는 제언이다. 하지만 '아시아(Asia) 시장'을 넘어 '아시안(Asian)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2장까지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해법이라, 안도감까지는 아니라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게 해준다. 그 대목에서 깐깐한 저자의 K-콘텐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
'애프터 넷플릭스'의 저자가 오터레터 구독자 열 명에게 직접 책을 보내주시기로 했어요!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로 의사를 표해주시면 한국 시각으로 금요일 오전에 추첨해서 발표하겠습니다. 국내 주소로만 발송이 가능하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