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은 대법원 ➃ 대법원의 자기 모순
• 댓글 3개 보기앞선 세 개의 글에서 왜 보수 대법관들이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불만을 갖고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를 언급한 3편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불만은 21세기에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결정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미국 연방 대법원이라는 존재의 특성에 기인한 중요한 원칙 때문이다.
선례구속의 원칙(Stare Decisis)
흔히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의 3부라고 하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는 각각 의회, 법원, 정부(대통령)로 대표된다. 그런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이들 중 사법부(the judiciary)를 가리켜 "가장 덜 위험한 부(the least dangerous branch)"라 불렀다. 정부는 군을 통제할 수 있고, 의회는 예산을 집행할 수 있어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사법부/법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법부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는 모두가 그 권위를 인정하는 정당성에 있다.
특히 최상급 법원인 연방 대법원의 경우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국가의 운영과 국민의 삶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대법관들의 경우 의회나 대통령과 달리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고 대통령이 지명하고 의회가 인준해서 임명될 뿐 아니라, 마치 왕처럼 종신직이다. 대통령과 의원들의 경우 국민이 직접 선택했고, 임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다소 무리한 정책을 펴도 어느 정도 눈을 감아주고 적어도 임기 동안은 정당성을 인정받지만 대법원은 다르다. 매 판결은 국민에게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다소 역설적이지만, 의회나 정부보다 여론에 더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대법원이 개별 판결을 여론에 따라 내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 판결이 대법원 판사들 개인의 신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국민에게 분명하게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법관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법을 해석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 "대법관의 구성에 따라 판결도 달라진다"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선거를 통해 구성되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작동 방식인데, 대법원은 선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원칙이 선례구속의 원칙(Stare Decisis, 미국에서는 '스타리 디사이시스'라고 발음)이다. 이는 대륙법과 달리 판례를 중시하는 영미법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비슷한 사건으로 내려진 판결이 있을 경우 이전에 내려진 판결과 완전히 다른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국민들은 이미 내려진 판결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판결이 법이라면 그걸 따르기만 하면 내 권리와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다고 믿고 그 판례/법을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되고 개인의 삶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특정 법원이나 판사가 이미 나온 판례에 동의할 수 없어도 가급적 뒤집지 않는 거다.
대법원이 뒤집은 판결
그동안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게 아니다. 보수 대법관이 우세였던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대법원은 거듭거듭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인정(uphold)했다. 그렇게 무려 49년 동안 존재하면서 여성의 중요한 권리로 자리 잡았다. 이 판결이 나온 후에 태어난 아기가 49세가 되었다면 이미 한 세대가 만들어지고, 그들의 자녀도 성인이 되었을 만큼 이 판결은 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1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대법원장인 존 로버츠는 보수 대법관들의 편에 서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부적절한 판결이었다고 하면서도 이미 존재해온 판례를 뒤집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법관이지만 보수 일변도의 판결을 피해 판결의 일관성과 대법원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데 힘써온 로버츠 대법원장은 자신이 쓴 별개의견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는 보수 대법관 5명의 시도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사건을 종결하기 위해 더 많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다면, 더 많은 결정을 내리지 않을 필요가 있다(If it is not necessary to decide more to dispose of a case, then it is necessary not to decide more).
로버츠 대법원장은 '사법 소극주의(judicial restraint, 법원 판사들은 헌법에 의해 허용되는 법률을 수정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를 강조하면서 위와 같은 간결한 수사법을 사용한 것이다. 굳이 할 필요가 없다면 하지 않는 것이 대법원이라는 기관이 정당성을 유지하는 데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게 선례구속 원칙의 정신이고, 바로 그런 이유로 과거의 보수 대법관들도 로 대 웨이드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버츠는 다른 보수 대법관 다섯 명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뉴욕타임즈는 이를 두고 "로버츠가 대법원을 잃었다"라고 표현했다) 투표로 선출되지 않은 대법관들은 '사법 쿠데타(judicial coup)'라는 비판을 감수하며 미국인들의 삶을 바꾸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전례 없는 사태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가령 연방 대법원이 1857년에 내린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의 경우 "노예로 미합중국에 들어온 흑인과 그 후손은 그가 노예이든 노예가 아니든 미국 헌법 아래 보호되지 않으며, 미국 시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연방 법원에 제소할 권리가 없다"라고 결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남북전쟁 후 미국은 수정헌법 13, 14, 15조를 통과시키며 이 판결을 뒤집고 흑인들의 시민권을 인정했다. 1896년에 내려진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대법원은 당시 미국의 인종 분리 정책("separate but equal")이 합헌이라고 판결했지만, 1954년에 내려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에서 58년 동안 지켜져 온 판례를 뒤집었다.
대법원의 자기모순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빼앗는 판례 뒤집기 결정이 흑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판례 뒤집기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을까?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결정을 준비해온 보수 진영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들은 이번 결정이 여성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았던 태아의 권리를 찾아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임신 중지 반대단체에서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대법원도 그런 사명감으로 판단을 할 수는 없다. 그건 법관 개인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결문을 쓴 새뮤얼 알리토 판사는 여성이 임신을 중지할 권리가 미국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고, 법으로 명시되어있지도 않기 때문에 헌법으로 보호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3편에서 설명한 원전주의(originalism)에 입각한 주장이다.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역시 같은 논리로 실체적 적법절차에 근거했던 다른 판결들도 모조리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는 "그런 케이스들이 올라오면"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보수 진영에게 사건을 구성해서 올려 보내라는 도그휘슬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토머스 판사는 대법원이 "잘못 내린" 결정으로 그리스월드, 로렌스, 오버게펠 판례를 상세하게 언급했지만 정작 러빙 대 버지니아 판결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러빙 판결은 흑인과 백인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버지니아주의 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이다.
토머스가 말한 '그리스월드'란 1965년에 나온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Griswold v. Connecticut) 판결로, 부부가 피임을 결정하는 것을 주 정부가 간섭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즉, 피임을 하는 것을 헌법 상의 권리로 인정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1960년대에 코네티컷을 비롯한 많은 주에 있던 임신을 막는 약이나 도구는 금지하는 법을 무효화시킨 판결이다. 그리고 '로렌스'란 2003년에 나온 로렌스 대 텍사스(Lawrence v. Texas) 판결로, 그때까지도 미국 곳곳에 남아있던 "비정상적 성관계"를 금지하는 시대착오적 법을 일시에 무효화시킨 판결이다. 마지막으로 '오버게펠'은 2015년에 나온 오버게펠 대 호지스(Obergefell v. Hodges) 판결로, 동성결혼은 미국에서 합법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클래런스 토머스 판사 본인이 백인 여성과 결혼한 경우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시니컬한 비난을 받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역시 미국의 역사나 법에 특별히 명시되지 않았음에도 대법원이 (흑인과 백인 간의 결혼을 금지한 버지니아의 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사용한 수정헌법 14조의 적법절차 논리가 이 판결에 사용되었다. 즉, 대법관들은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논리를 취사선택할 뿐이라는 거다.
로 대 웨이드 무효 결정이 나오기 하루 전에 나온 결정에서도 비슷한 모순이 보인다. 공공장소에서 총기를 휴대하는 것을 금한 1백 년 넘은 뉴욕주의 법이 위헌이라는 판결로, 대법원은 이 문제는 각 주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두 판결이 이틀에 걸쳐 연속으로 나오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여성의 선택권은 각 주가 알아서 할 만큼 하찮은 문제이고, 공공장소에서 총을 차고 다니는 건 너무나 중요해서 연방 대법원이 주의 전통과 법을 무시하고 결정을 내려주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시작된 싸움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미국 정치는 앞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복잡해졌다. 앞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추가로 글을 연재하겠지만, 승세를 잡았다고 판단한 공화당은 내친김에 임신 중지를 모든 주에서 불법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민주당에서는 거꾸로 임신 중지를 보장하는 법을 연방법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둘 다 오는 11월 선거에서 승리해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11월 선거의 중요성이 크게 더해졌다. 가파른 인플레이션으로 바이든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떨어진 상황이라 민주당의 패배가 분명했지만, 대법원의 판결로 민주당 지지세력이 단결하고 중도 유권자까지 더해지면서 한 번 붙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공화당에게 뺏길 거라 생각했던 상원을 지킬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든은 11월 선거에서 승리해서 임신 중지권을 성문화 하겠다며 이 이슈를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는 데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 태도로는 실망한 지지자를 끌어모을 수 없다는 비판도 많다.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의원은 임신 중지를 불법화하는 주에 있는 연방정부 소유의 땅을 그 주의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치외법권으로 설정하고 임신 중지를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자는 급진적인 방법을 제시했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선거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상원에 있는 필리버스터 룰을 바꿔서 법을 통과시켜 여성의 선택권을 성문화 하자"고 요구했다. 진보적인 의원들의 요구에 밀린 바이든도 결국 샌더스의 방법에 손을 들어준 상황이다. 당내에서도 반대하는 의원들이 있기 때문에 실현될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는 11월 선거는 2020년 선거만큼이나 뜨거운 선거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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