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에덴 하우스는 장기 치료 커뮤니티로, 곳곳에 "사는 법을 아는 것이 삶의 답입니다(The answer to life is learning to live)" 같은 문구(표어)들이 붙어있는, 그런 장소였다. 작가가 이런 곳에 머물렀다고 말하면, 독자들에게 자기가 그런 진부한 문구들의 도움을 얻었다고 하면, 대개 과거를 회상하면서 독자들과 함께 웃으려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 붙어있는 표어들이 내 목숨을 구했다.

멍청한 문구, 명령형의 문구, 보기에 창피한 문구, 재미없는 문구...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살렸다.

(배경 이미지 출처: Psychology Today)

그중에는 내가 소리 내 반복한 것들도 있었고, 굳게 믿고 붙들었던 것도 있다. 마약 중독, 알콜 중독은 절대 낭만적이지 않다. 중독으로 바닥을 치면 그것만으로도 우스운 꼴이기 때문에 그걸 재미있게 묘사할 필요가 없다. 중독자가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않으면 회복될 가망이 없다.

에덴 하우스에서는 내가 가진 재주—말로 표현하고, 지적으로 사고하고, 긴 말로 상황을 무마하는 재주—가 전혀 쓸모 없었다. 나는 과거 비슷한 중독 치료소에서 카운슬러들의 사랑을 받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금방 파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덴 하우스에서는 그저 바보, 그것도 쉽게 우는 바보에 불과했다. 에덴 하우스는 포로수용소 같은 곳은 아니었지만, 운동기구와 영양 전문가가 갖춰진 고급 시설도 아니었다.  

만성적인 중독은 일종의 체념 상태나 다름없다. 만약 중독자가 언젠가는 마약을 다시 복용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알고 있다면, 왜 오늘 당장 복용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항상 그렇게 마약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면 상황이 달라진다. 하루를 버티고, 다음날 잠을 깨어 다시 하루를 버티게 되는 거다. 그런 희망은 절망에 빠져 질식하는 사람에게 산소와 같다.

내가 다시 넘어져 마약을 하게 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매주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부모님이 양육 보호 가정에 가서 쌍둥이를 데리고 주말마다 나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모님과 이야기하는 동안 아기들은 면회실 바닥을 기어 돌아다녔다. 카운슬러 중 한 사람—베스(Beth)였던 것 같다—이 면회실에 들어와서 에린과 메이건을 보고 "어머, 누구의 아기들이지?"하고 혼잣말을 했다.

"제 아이들이에요." 내가 대답했다.

당시 에덴 하우스에서 나를 담당하던 카운슬러는 매리언(Marion)이었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선글라스를 끼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덩치 큰 흑인 남자였다. 중독 치료가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나는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필요한 허가서들을 모두 작성했다. 하지만 결혼식에 가기 전날인 금요일 밤, 매리언이 나를 사무실로 불러서 결혼식에 가고 싶다면 갈 수는 있지만, 다시는 에덴 하우스에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매리언의 일방적인 통보에 분노했고, 그 얘기를 들은 우리집 식구들은 그렇게 멋대로 명령하는 곳에 있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하고 내 결정을 알리러 매리언의 사무실로 다시 갔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는 결혼식 참석을 포기하고 에덴 하우스에 남았다. 매리언이 그때 내게 무슨 말을 했길래 내가 생각을 바꿨던 걸까?

2006년 7월 어느날, 나는 미니애폴리스 남쪽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매리언을 다시 만났다. 그는 모터싸이클을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때와 변함없이 거울처럼 반사되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나는 매리언에게 그때 내가 화가 나서 다시 찾아간 건 기억나는데, 그때 그가 한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 내게 한 말이 기억나느냐고 묻는 내게 그는 그렇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다시 중독에 빠질) 위험한 순간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럼 두 딸아이와 함께 마약을 하지 그러시냐?'고 했죠."

데이비드 카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에덴 하우스에서 6개월을 보낸 나는 중독 치료를 마친 사람들이 다음 단계로 머무는 곳으로 이동했고, 그때부터 쌍둥이를 종종 만나서 직접 돌보기 시작했다. 애나는 나와 헤어졌지만, 나처럼 중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아이들은 생모인 애나에게 돌려보낸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회복자들의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며 프리랜서 기자 일을 시작할 무렵, 애나는 견디지 못하고 다시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89년 여름 어느날, 나는 애나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갔다. 집 안에 들어가니 쌍둥이는 젖은 기저귀를 찬 채로 배고파서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근처에 있는 세븐일레븐에 가서 기저귀와 분유, 새 젖병, 그리고 바나나를 몇 개 샀다. 내가 기저귀를 가는 동안 아이들은 굶주린 동물처럼 바나나를 먹고 우유를 마셨다. 나는 아이들을 다시는 애나 손에 맡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내가 머물 집이 필요하고, 아이들에게 입힐 옷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당시의 나는 좋은 사람이었고, 아이들을 키울 만한 능력이 되는 아빠였다. 따라서 아이들의 양육권을 회복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게 양육권을 되찾으려는 동안 내가 생각한 나 자신이었다. 그 버전에 따르면 나는 단지 덩치만 커다란 마더 테레사였고, 차분하고 희생적인 나와 달리, 애나는 정신 나간 여자였다. 그렇게 아이들의 양육권을 회복한 지 18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당시 양육권 회복을 도와준 변호사 바버라(Barbara)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바버라는 내 버전의 스토리를 듣더니 동의하기를 주저하면서 자기가 아는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때 데이비드 씨는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어요. 체중이 300파운드(136kg)에 육박하고 있었죠. 한겨울이어서 아주 두터운 방한복을 입고 계셨는데, 다 낡아 해진 그 방한복은 몸에 맞지도 않았어요. 제 사무실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데이비드 씨를 봤다면 노숙자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주 힘들어 보였고, 눈병으로 눈도 지저분했고, 제대로 씻지도 않고 계셨죠."

아무리 그런 꼴을 하고 있었어도 내가 아이들을 책임질 만했기 때문에 양육권을 회복한 거 아닐까?

"저는 데이비드 씨처럼 보이는 의뢰인을 받아 본 적이 없어요. 제 고객들은 은행이나 주택금융회사이지, 범죄자들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데이비드 씨가 어린 두 딸아이의 양육권을 되찾고 싶다고 찾아오셨을 때, 저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인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데려오게 되면 생활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를 데이비드 씨가 이해하고 있는 건가, 확신할 수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비만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마약 중독자가 자동차 광고에서 보는 것처럼 운전을 하면서 뒷자리에 앉아 웃는 아이들을 백미러로 바라보며 지혜의 말을 해주는 것 같은 멋진 아버지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거다.

내게는 차도, 아이들에 대한 양육권도 아직 없었다. 아이들의 엄마와는 결혼한 적도 없었고, 내가 친부임이 아직 법적으로 확인되지도 않았던 상황이다. 보험도 들지 않았고, 지난 몇 년 동안 납세기록도 없었다.

(이미지 출처: Car and Driver)

훗날 애나는 내가 두 아이를 잘 키워준 것을 항상 고맙게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애초에 내가 그 아이들을 빼앗아 갔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했다. 나는 애나의 주장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바버라 변호사에게 그 일을 물어봤다. 한동안 텍사스에 있는 어머니와 살다가 미니애폴리스로 돌아온 애나가 어떻게 마약 검사를 받게 되었을까? 애나가 아이들을 만나려면 검사에서 마약이 검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만 하도록 한 게 그 비결이었다. 그런데 검사를 해보니 코카인과 마리화나가 검출되었던 거다.

양육권을 놓고 다투는 상황에서 그건 아주 교묘한 전략이었다. 바버라에 따르면 애나는 검사를 할 때마다 마약이 검출되어 거듭 실패했을 뿐 아니라, 미니애폴리스에 돌아온 후에는 마리화나 딜러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만나는 약속을 거듭 어기게 되었고, 재판일에 나타나지도 못했고, 그러다가 변호사를 교체하게 되었고, 결국 나에게 양육권을 넘겨주는 데 합의하게 된 것이다.

뒤를 돌아보면 내가 아이들을 맡게 된 것은 나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내가 자기보다—아이들에게—더 나은 부모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는 애나의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이건 내가 당시의 기록을 뒤지다가 알게 된 사실로,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기 힘든 두 사람 중에서 그저 내가 조금 나았을 뿐이었다. 우선 둘 다 마약을 끊었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했지만, 내가 훨씬 더 심했다. 나는 마약을 끊기로 결정한 후에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는 건 내가 나에게 되뇌어 온 거짓말이었고, 나는 오래도록 그걸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해 본다면 나는 기절할 것이다. 그저 바람이 현실이 될 때까지 내가 믿고 의지하던 신화에 불과했다.

내 인생에서 참되고 좋은 것들은 모두 쌍둥이가 나와 합법적으로 함께 살게 된 날부터 시작되었다.

쌍둥이의 친모, 애나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만약 어떤 여성이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거나, 혼외의 자식을 낳거나, 아이를 혼자 키우며 고생하고 있으면 사회는 그런 여성에게 헤픈 여자(slut), 패배자(loser), 복지제도를 악용하는 게으른 여자(welfare mom), 사회의 짐(burden on society) 같은 딱지를 붙인다. 똑같은 조건에서 아이를 키우는 남자라면? 왕자로 등극한다. 아빠인데 엄마가 하는 일도 한다는 식이다. 왜 똑같은 일인데 남자가 하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할까?

아이들을 키우는 게—특히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게—쉬운 일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지만, 부모 중 한 사람이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도록 존재했고,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걸음마를 시작한 쌍둥이와 체중 100kg이 넘는 백인 남성으로 이뤄진 우리 가족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고, 그중에서도 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더욱더 놀랍게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부모가 어떻게 자기들을 돌봐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법을 안다. 집에 기저귀가 남아 있지 않아서 급한 김에 기저귀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했다가 맥도날드 매장에서 냄새가 진동하는 사고를 치면 여분의 기저귀를 항상 사다 놔야 한다는 걸 배우는 식이다. 아이들이 내 침대에 들어와 자게 내버려두면 매일 밤 아빠 침대에서 자겠다고 떼쓰는 아이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렇게 좌충우돌 하면서 우리 셋은 취침과 목욕, 기도와 자기 전 책 읽어 주기 같은—내가 자라면서, 혹은 TV에 나오는 장면에서 보고 배운—규칙적인 일상을 만들어 냈다.

아이들은 나와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배우기 시작했고, 나는 아이들을—미친 듯이, 깊이, 진심으로—사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의식(ritual)을 만들어서, 가령 밤에 자기 전에 불을 끌 때는 내가 만들어 낸 노래를 불렀다. 특별한 곡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딸들은 세상에서 제일 착해,

우리 딸들은 세상에서 제일 착해.

우리 딸들은 정말 착하고, 정말 사랑스러워.

나는 우리 아이들을 정말 사랑해. 우리 딸들이 최고야.

그러다가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같은—그러나 음정과 박자는 완전히 엉망인—방식으로 화려하게 끝낸다. (에설 머맨Ethel Merman에게는 무척 죄송하지만.)

우리 딸들은 세상에서.

제일.

차아아아악해애애애—

(이미지 출처: On Wisconsin Magazine)

나는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삶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았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어둡고 병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나는 내 과거를 살피는 일을 신나서 한다. 내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는 우리가 각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과거를 그렇게 보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붙잡혀있지 않을 수 있다.

내 중독의 내러티브는 내가 하는 기자 일에도 아주 흔한 교훈을 제공해 준다. 나쁜 것도 과하면 안된다(Too much of a bad thing is bad. 좋은 것도 과하면 안 된다는 말을 비꼰 것)는 게 그 교훈이다. 식사와 수면을 거르고 대신 술과 마약으로 버티다 보면 결국 직장도, 배우자도, 존엄성도 모두 잃게 된다. 중독을 극복하게 된 내러티브가 주는 교훈은 더 평범하다. 나는 마약과 술을 끊은 후에 좋은 직장을 얻었고, 배우자를 만났고, 아기도 낳았다. 무엇보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많은 중독자들이 회고록을 써서 자신의 실수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약을 빨고, 술을 들이키며 보낸 시간이 완전히 헛된 건 아니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충동을 따르면 나는 내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내 과거가 나를 지금의 행복한 자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쓴 것이다.

내 과거를 되짚는 2년 동안의 취재를 통해 많은 사람과 어색한 대화를 나눈 결과, 나는 환원적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통합(integration)—나의 과거와 현재,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통합—에 어느 정도 도달할 수 있었다. 카를 융(Carl Jung)은 우리가 자신에게 있는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을 모두 받아들이기 전에는 완전해질 수 없다고 했다. 내가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을 분출하며 저지른 모든 일들은 나의 (흔히 말하는) 모성적 행동을 통해 상쇄할 수 있었다. 흔히 '너 자신을 위해서' 회복에 힘쓰라고 하지만, 자식을 낳으면 복잡한 삶이 아주 단순하게 정리되는 효과가 있다. 바로 이런 질문이다:

네 안에 있는 괴물을 살려두기 위해 네 아이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을 파괴할 건가?

나는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지만, 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더 아슬아슬했다. 나는 지금 내가 누릴 자격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가짜라는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산다. 비결이 있다면, 그건 삶에 감사하고, 이 나들이가 너무 빨리 끝나지 않기를 희망하는 거다. 🦦


마지막 문장에서의 '나들이'는 놀이나 장난을 뜻하는 영어 단어 'caper'를 한국 문화에서 이해하기 쉽게 옮긴 것으로, 원래 caper는 비밀스럽고 금지된 장난, 놀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저자가 젊은 날의 행동을 빗대어 중의적으로 사용한 듯하다.

그의 caper는 2015년 2월 15일에 끝났다.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을 다룬 다큐멘터리 '시티즌포(Citizenfour)'를 주제로 한 패널 토론을 저녁에 진행한 후 뉴스룸에서 일을 하던 중 쓰러졌다. 뉴욕타임즈의 동료들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세상을 떠났다며 그를 추모했다.

사무실에서의 데이비드 카 (이미지 출처: Minn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