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로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는 글을 참 잘 쓴다. 작가가 글을 잘 쓴다고 하면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책을 좀 읽어 본 사람이라면 모든 작가가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성실한 독자는 책이 쉽게 읽히지 않아도 내용이 좋고 배울 게 많으면 읽는다. 게으른 독자는, 혹은 성실한 독자라도 머리를 쉬고 싶을 때는 쉽게 읽히는 책을 집어 든다. 그런데 글솜씨가 뛰어난 작가는 새로운 지식과 관점을 풍부하게 전달하면서도 독자가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유발 하라리가 그런 능력을 가진 드문 작가다.

유발 노아 하라리 (이미지 출처: ynharari.com)

미디어는 그런 작가가 전문 분야에만 머무르게 놔두지 않는다.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볼 줄 알고, 그걸 뛰어난 말솜씨, 글솜씨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하면 온갖 컨퍼런스와 TV 프로그램에 초대된다. 뛰어난 과학자가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연예인들과 잡담을 나누는 건 그 때문이다.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런 "나들이"가 그들의 연구를 방해하지 않는 한 반드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코스모스(Cosmos)'로 유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도 심야 토크쇼에 출연하는 등, 대중적인 접점이 넓었던 학자다. 천문학, 물리학, 뇌과학 같은 학문을 접할 기회도 관심도 없는 대중에게 이런 학자들이 토크쇼,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해 그들이 아는 지식과 전문가로서의 사고법을 보여주는 건 궁극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 역시 학자들의 비판을 많이 받는다. 그가 예능쇼에 출연하는 건 아니지만, 그가 쓰는 책이 전문가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대중 친화적이어서 동료 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고, 역사학이 아닌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발언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게 곱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정당한—비판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린 독자라면, 하라리의 책은 여전히 읽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새롭게 내놓은 책 'Nexus(넥서스, 연결)'도 그렇다.

왜 표지에 비둘기가 등장하는지는 내용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위의 표지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석기 시대부터 인공지능까지, 정보 네트워크의 간략한 역사'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부제는 적절하지 않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다름 아닌) 역사학자의 서평이 뉴욕타임즈에 실렸다. 이 학자는 하라리의 새 책이 간략한 역사라기 보다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박식한 사람이 커피를 마셔서 흥분한 상태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을 열정적으로 들려주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서평을 읽기 전에 그가 출연한 인터뷰를 몇 개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정말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비행기에서 방해받고 싶지 않은 여행자라고 해도 유발 하라리 같은 사람이 옆에 앉아 있다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을까? 얘기를 하지 않는 미용사를 찾아다니고,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남들과 눈도 마주치기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도 하라리가 옆에 앉아 있다면 계속해서 커피를 권하며 얘기를 들을 것 같다. 아래의 글은 그의 인터뷰 몇 개를 정리한 것이다. 여기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에서 그의 인터뷰를 직접 들어볼 수 있지만, 여기에 정리한 내용은 그가 한 말을 모두 옮긴 게 아니고, 필요하면 적당한 설명도 붙였다.

말하자면, 커피를 잔뜩 마시고 빠른 속도로 말하는 똑똑한 사람 옆에 앉아서 들은 내용을 최대한 쉽게 풀었다고 보면 된다.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하라리가 인터넷 세상에서 확산되는 정보와 관련해서 자주 강조하는 게 있다. 테크기업들은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를 더 자유롭게 접할 수 있게 되면 세상은 더 나아질 거라고 주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게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데,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면 더 현명해지는 것도, 더 진실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게 하라리의 생각이다.

"제가 실리콘밸리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얘기가 인쇄술의 발달 얘깁니다. 인쇄 기술이 발명되었기 때문에 과학혁명이 가능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더 많은 정보가 퍼지면 세상은 더 나아진다는 주장인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구텐베르크가 유럽에 인쇄술을 보급한 후에 17세기 유럽에서 아이작 뉴튼 같은 사람을 중심으로 과학혁명이 등장할 때까지 근 20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유럽 역사 최악의 종교 전쟁과 마녀사냥이었습니다. 인쇄물을 통해 유럽에 퍼진 건 과학 지식이 아니라, 극단적인 종교적 주장과 마녀사냥 매뉴얼이었습니다. 당시 베스트셀러가 그런 것들이었어요."

그러면서 하라리는 15세기에 가장 인기 있었던 문서를 하나 소개한다. '마녀 잡는 망치 (Malleus Maleficarum)'라는 소책자다. 그는 유럽 최초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던 이 책을 이야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마녀사냥의 역사를 바로잡는다. 하라리에 따르면 원래 유럽의 '마녀(witch)'들은 사탄이 들어간 악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녀 잡는 망치 (Malleus Maleficarum)'의 표지 (이미지 출처: Britannica)

마녀는 기독교와 무관한 오래된 유럽 문화의 일부였다. 그가 설명하는 유럽의 마녀는 한국 문화 속 무당과 비슷하게 들린다. 소를 잃어버린 사람이 찾아가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보거나, 사랑에 빠지게 하는 약을 얻을 수 있는 게 마녀였고, 한국 문화 속 무당처럼 그저 지역마다, 마을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었지, 기독교적인 의미의 사탄처럼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악의 세력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랬던 마녀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마녀 잡는 망치'라는 책자의 인기였다는 게 하라리의 설명이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신학 교수이자, 지역 재판관이었던 하인리히 크레이머(Heinrich Kraemer)였다. 그는 아직 마녀사냥이라는 게 존재하기 전에 자기 혼자의 판단으로 마녀라며 사람들을 체포하곤 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당시 기준으로도 너무 황당했고, 지역 교회도 크레이머의 주장을 인정하기 힘들어서 그가 마녀라며 체포한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고, 크레이머를 교구에서 내쫓았다.

교회의 처분에 분개한 크레이머는 당시 막 소개되고 있는 정보의 신기술을 활용하기로 했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해서 퍼지고 있던 유럽의 인쇄술을 이용해 '마녀를 잡는 망치'라는, 마녀사냥 매뉴얼을 쓴 것이다. 하라리가 소개하는 이 책의 내용을 보면 황당하지만 적어도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하다.

가령, 아침에 잠을 깼다가 자기의 성기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가 그렇다. 이 남자는 마을의 마녀가 자기의 성기를 가져갔다고 확신하고 찾아가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마녀는 그의 윽박에 못 이겨 훔친 그의 성기를 숨긴 곳을 알려준다. 그 남자는 마녀가 실토한 대로 나무 위에 올라가 새집을 봤더니 그 마녀가 훔쳐다 놓은 남자의 성기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 남자는 그 새집에서 자기 성기가 아닌, 가장 큰 성기를 골랐다. 마녀는 "그건 마을 신부의 것이니 당신 걸 가져가라"고 했다.

'마녀 잡는 망치' 속 삽화 (이미지 출처: History Collection)

웃기고 황당한 이야기지만, 크레이머의 책은 인류 역사에서 정보의 신기술을 통해 퍼진 최초의 음모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이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은 마을에 같이 살던 마녀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사탄이라는 중앙의 명령을 받는 악의 세력이었고, 사냥해서 죽여야 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마녀 잡는 망치'를 통해 하라리가 묻는 것은 '과연 정보의 빠른 이동이 사회를 더 낫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혜택을 보게 되었다고 해도, 그건 사회가 엄청난 대가를 치른 후였다는 거다.


우리가 사는 현대로 돌아와 보자. 요즘 미국 정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민주당 지지자들과 공화당 지지자들은 서로 대화를 하지 못하고 극한 대립으로 치닫기 일쑤다. 그런데 이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 브라질, 인도, 필리핀 어느 나라를 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하라리는 각 나라는 자기만의 이유가 있겠지만, 21세기에 들어서 모든 국가가 동시에 비슷한 문제를 겪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하라리가 지적하는 문제의 핵심은 '대화의 붕괴'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결국 대화(democracy, in essence, is a conversation)"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인터넷의 발달로 인류 사회의 정보 공유와 아이디어의 전파는 사상 유례없이 빨라졌고, 그 비용도 저렴해졌다. 그렇다면 그 어느 때보다 대화가 잘 되어야 하는데, 소통의 기술이 가장 발달한 시점에서 모든 나라에서 대화가 불가능해진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라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 수메르의 점토판을 예로 든다. 문자와 제국, 그리고 민주주의 사이에는 흥미로운 관계가 있다는 거다.

고대 수메르의 문자가 기록된 점토판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

'하라리의 이유 있는 걱정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