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의 새 책 '티핑 포인트의 설계자들(Revenge of the Tipping Point)'은 미국의 은행강도 이야기로 시작한다. 은행강도는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지만, 실제로 미국에서는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흔한 범죄였다. 특히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으로 은행에 집과 땅을 뺏긴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훔치는 사람을 응원하며 경찰에게서 숨겨주면서 은행강도는 민간 영웅(folk hero)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본격적인 부흥기에 들어가면서 은행강도는 점점 뜸해졌다.

유행이 지난 줄 알았던 은행강도가 다시 빈번해지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말이었다. 그때부터 빠르게 증가한 은행강도 1980~90년대에 절정에 달한다. 글래드웰의 책은 주로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유명한 사건들을 이야기하지만, 미국 내 타 지역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빌의 탐사 보도는 그중에서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일어난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1980년대 마이애미는 범죄로 악명이 높았다. (미국의 많은 범죄 영화, 드라마가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에는 이 지역(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에서만 한 해에 평균 450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특히 은행강도가 급증했다. 한 도시에서 하루 최소한 하나, 많게는 다섯 개의 은행, 혹은 현금 수송 차량이 털린다는 건 경찰이 손의 거의 쓰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지역 경찰이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연방수사국(FBI)이 나섰다.

1980년대 플로리다주 은행의 현금 수송 차량
이미지 출처: Sun Sentinel

FBI는 은행강도 전담팀을 설치한 후 모든 은행강도에 대응하기보다, 그중에서도 유독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2인조 강도, 마이클 플랫(Michael Lee Platt)과 윌리엄 매덕스(William Russell Maddox)를 체포하는 데 주력했다. 전직 군인이었던 이들은 다른 강도들과 달리 산탄총과 기관총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며 경비원들을 살해하는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플랫과 매덕스가 출몰하는 지역에서 수사망을 좁히던 FBI 요원들은 1986년 4월 11일, 용의자들이 타고 있다는 제보를 받은 차량을 발견하고 추격을 시작했다. 플랫과 매덕스는 FBI를 따돌리기 위해 빠르게 달리다가 운전 미숙으로 나무를 들이받고 멈췄다. 추적하던 여덟 명의 요원은 플랫과 매덕스가 탄 차를 둘러싸고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 순간, 용의자들은 차 안에서 소지하던 반자동 소총으로 요원들에게 먼저 발포했다.

5분 동안 무려 145발이 오고 간 총격전 끝에 용의자들은 사살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FBI 요원 두 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섯 명이 부상당했다. FBI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날로 기록되었고, 그후로 많은 분석과 연구가 된 유명한 케이스가 되었다. (유튜브에도 여러 개의 분석 영상이 있다.)

범인과의 총격전에서는 FBI 요원들의 전술적 실수도 없지 않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화력에서 밀렸기 때문이라는 게 요원들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해도 겨우 여섯 발을 쏘고 다시 장전해야 하는 리볼버 권총으로 한 번에 30발을 쏠 수 있는 반자동 소총으로 공격하는 상대를 제압하는 건 무리였다는 거다.

이 뉴스가 전국에 퍼지면서 FBI 요원들이 "우리는 화력에서 밀렸다(We were outgunned)"라고 한 말이 많은 경찰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천하의 FBI가 화력에서 밀렸다면 일개 도시의 경찰들은 어쩌란 말인가?' 대부분의 경찰서에서 지급하는 총기는 FBI 요원들이 가진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사건이 있고 난 뒤 몇 달이 되지 않아 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에서는 총기 제조업체들에 문의를 시작했다. 경찰서에서 사용하는 총기를 업그레이드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도시의 경찰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의 신생 업체

그때까지 미국의 경찰들이 사용하던 권총은 콜트(Colt)나 스미스 & 웨슨(Smith & Wesson)처럼 1800년대 중반에 설립된 전통적인 미국 제조업체의 제품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경찰서들이 낸 제안 요청에 응답한 업체 중에 이름이 낯선 신생 총기 제조업체가 있었다. 총기를 제작한 지 5년도 되지 않은 오스트리아의 글록(Glock)이었다.

이 회사를 설립한 가스톤 글록(Gaston Glock)은 엔지니어 출신 사업가였지만, 1963년에 회사를 설립한 후 칼이나 커튼봉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어 팔았다.

오스트리아의 글록 본사 건물
이미지 출처: Glock

그러다가 1983년, 오스트리아군이 차세대 권총을 발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총은 처음이었지만, 군용칼과 야전삽을 납품한 경험 덕분에 군수품 제작이 낯설지는 않았다. 글록은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고, 사내 엔지니어들과 의기투합해서 완전히 신개념을 권총을 설계, 제작하는 데 성공한다.

세상을 바꿀 제품이 그렇게 무경험자들에게서 탄생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총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는 엔지니어들이었기에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온 총기가 가진 '멋'이라는 건 전혀 없었고, 부품의 절반은 플라스틱이었다. 게다가 오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권총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던 안전장치(safety lever)도 없앴다.

글록의 디자인 철학은 '단순성'에 있었다. 부품의 숫자를 줄이고, 불필요한 기능을 없애는 대신 오작동이나 불발 가능성을 크게 줄였다. 경찰이 총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은 생사가 갈리는 극도로 위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총을 사용하는 사람은 큰 스트레스로 인해 안전장치를 풀지 못하는 등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 글록은 그런 상황에서도 사용자가 실수 없이 총을 쏠 수 있고, 잔고장이 나지 않아 "믿을 수 있는" 권총이라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웠다.

글록이 오스트리아군에 납품한 최초의 권총
이미지 출처: Reddit

하지만 외국의 신생 업체가 만든 플라스틱 덩어리 같은 총을 본 미국인들은 미심쩍게 생각했다. 플라스틱 총이 나왔다는 소문에 언론에서는 "금속탐지기에 걸리지 않는 위험한 총기가 등장했다"며—이는 사실이 아니다. 글록 권총은 100% 플라스틱이 아니기 때문에 금속탐지기에 걸린다—대중의 공포를 자극했고, 정치인들은 리비아의 테러리스트들이 글록을 사들이고 있다고 경고했다. 뉴욕 경찰은 글록 권총에 대해 아예 소유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등장만으로도 미국이 공포에 빠진 상황에서 글록을 미국 경찰서에 납품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가스톤 글록은 경찰을 설득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민하던 그가 내린 결론은 '정치인들이 글록을 싫어해도 경찰만 좋아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군수물자 납품 경험이 많은 그는 경찰관들의 행동을 잘 이해했다. 그는 남부 조지아주 스머나(Smyrna)에 세운 글록 제조공장 근처에 있는 스트립클럽에 경찰관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그곳에서 총기를 소개하고, 공짜로 술과 스트리퍼의 공연을 즐기게 한 것이다. 파티에 다녀온 경찰관들은 글록의 장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글록은 새로운 총기를 구입할 여력이 별로 없는 중소도시의 경찰서들에는 기존에 사용하던 권총을 가져오면 좋은 가격을 쳐주겠다고 하는 보상판매 마케팅을 벌였다. 글록은 오래되고 느린 권총을 사격과 재장전이 모두 빠른 신제품 권총으로 교체해 주면서 미국의 경찰 무기 시장을 사실상 장악했고, 억만장자가 되었다.

경찰이 선호하는 권총이 되자, 일반인들도 글록을 찾기 시작했고, 1990년대를 지나면서 스카치테이프나 버버리 코트, 제록스 복사기처럼 '글록'은 권총을 부르는 대명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권총을 꺼내면 예외 없이 글록이었다.

영화 '도망자'에서 경험 많은 보안관이 번쩍이는 권총을 꺼내는 젊은 요원에게 (쓸데없이 폼잡지 말고) "글록을 쓰라"고 말한다.

마지막 편, '총기회사 성공기 ③'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