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회사 성공기 ①
• 댓글 남기기한국에 사는 지인들에게서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미국은 총기 문제가 심각한데 어떻게 그런 나라에서 사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미국인들은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서울이 초토화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나라에서 살면서 두렵지 않으냐고 묻는다." 서로 다른 위협이지만, 둘 다 엄연한 위협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오래 살면서 잠재적 위협을 매 순간 걱정할 수는 없다. 한국인들이 북한의 위협을 알면서도 일상 생활을 하듯, 미국에서도 누군가 총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도 일상 생활을 한다.
그런 답을 들은 사람들은 보통 이런 추가 질문을 한다. "미국은 정말 총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거냐?" 이 질문도 자주 받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답한다. "한국이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날, 미국도 총기 문제를 해결하게 될 거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두 문제는 해결되기 힘들다. 모든 사회 문제가 해결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도, 미국 사회도 많은 문제를 해결해 왔고, 지금도 해결하려 애쓴다. 인류 사회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문제는 다른 문제보다 해결하기 힘든 게 사실이고, 같은 문제를 갖고 있어도 유난히 해결이 힘든 사회가 있다.
미국과 호주는 둘 다 영어를 사용하고, 백인이 다수이고, 넓은 국토를 가진 "신대륙"이지만, 호주는 총기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다. 온 나라를 놀라게 한 끔찍한 총기 난사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996년 4월 28일, 29세의 마틴 브라이언트가 호주 남부 포트아서(Port Arthur)의 카페와 상점에서 AR-15 자동소총을 난사해 35명이 숨지고 15명을 다치게 한 일이 발생하자, 호주 정부와 국민은 자동, 반자동 공격용 소총, 펌프식 산탄총을 일반인이 소지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법으로 금지했다. 사건이 일어난 해에 일사천리로 통과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소유한 총기 70만 정을 이유를 묻지 않고 사들여서 호주 사회에서 총기를 사실상 없애버렸다. 그 이후로 총기로 인한 사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5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총기 난사 사건'은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은 3년 후인 1999년에 일어났다.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 폭탄 테러, 2001년의 9/11 테러와 함께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사건이지만, 호주와 달리 미국에서는 그로 인한 대대적인 총기 단속 입법이 없었다. 아니, 미국에서의 총기 난사는 오히려 그 이후로 크게 증가해서 지금은 한 해에만 600건이 넘는다.
비슷한 비극을 겪은 두 나라는 왜 이렇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까?
미국에서는 헌법이 총기 소유를 보장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모호한 문구라서 해석이 분분하지만, 진보적인 정치인도 총기 소유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대통령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와 러닝메이트 팀 월즈도 "나는 총기 소유자"라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버니 샌더스도 지금은 생각을 바꿨지만, 총기 규제 자체에 반대했던 사람이다.) 이는 단순히 법 조항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역사,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은 식민지 시절부터 영토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원주민과 싸웠고, 이후에는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렀고, 그 후에는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항상 총을 갖고 있어야 나와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문화적으로 자리 잡았다. 건국 이전부터 가졌던 이런 정서가 수정 헌법 2조로 들어갔기 때문에, 총기 규제는 단순히 법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미국인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한국에서 대학 입시에서 시험 성적 외의 다양한 능력을 반영하려 해도, 결국 그 능력조차 점수화되고 그걸 키워주는 강사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공정한 경쟁'과 '좋은 대학=성공한 인생'이라는 문화적 가치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총기에 대한 문화적 가치가 여전히 존재한다. 호주가 규제에 성공한 것은 미국과는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호주처럼 총기를 규제하는 대신, 학교에서 총기 난사에 대비한 훈련을 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북한의 공격에 대비한 한국의 민방위 훈련과 비슷한 형태다.

물론 미국에서 그런 여론이 형성되는 데는 총기회사들과 그들의 지원을 받는 전미총기협회(NRA)의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총기 소유에 호의적인 여론만 만드는 게 아니라, 대형 참사가 일어난 후 여론이 규제 쪽으로 바뀌어도 정치인들이 관련 입법을 하지 않도록 꾸준하고 철저한 로비를 해왔다.
아래의 표를 보면 그 효과를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호신용으로 볼 수 없는—그리고 총기 난사범들이 주로 사용하는—자동, 반자동 소총의 일부를 10년간 금지하는 '연방 살상용 무기 금지법(Federal Assault Weapons Ban)'을 통과시켰다. 이 법이 총기 난사를 막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증가는 분명하게 억제했다. 하지만 10년 후 2004년에 이 법을 연장, 혹은 영구화하자는 여론이 일었을 때 총기회사와 총기협회는 강력한 로비를 통해 이를 저지했고, 이 법은 효력을 상실했다.
아래 표에서 회색으로 표시한 기간이 살상용 무기 금지법이 살아있던 시기다. 법의 만료와 함께 20년 동안 총기 난사 사망자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왼쪽)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망자의 증가는 금지했던 무기의 생산 증가율(오른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AR-15는 미군이 수십 년 동안 주력 자동소총으로 수십 년 동안 사용하던 M-16의 민간 버전으로,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총이자, 총기 난사범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소총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총기회사들은 또 다른 이익을 챙긴다. 일반인이 소유할 수 있는 총기의 화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이에 대응하는 경찰과 각종 수사기관들(이를 통틀어 'law enforcement'라 부른다)도 무기를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총기회사들은 경찰과 범죄자 사이에 일어나는 '군비경쟁'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거다.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탐사보도 센터(Center for Investigative Reporting)가 운영하는 매체 '리빌(Reveal)'은 미국의 총기업계가 어떻게 민간인과 경찰, 양쪽을 무장시키면서 돈을 벌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시리즈 기사를 발행했다. 아래는 그 기사에서 나온 내용의 일부를 요약, 설명한 것이다.
1966년 텍사스 대학교
'계정 해커 이야기'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미국의 경찰특공대(SWAT)를 보면 군대와 구분이 힘들 만큼 엄청난 무기와 장비를 갖추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연방수사국(FBI) 같은 조직을 제외하면 도시별로 경찰이 운용되는데, 이들이 처음부터 화력이 강한 총기로 무장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총기 소유가 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80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각 도시의 경찰이 총을 소지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도 아니었고, 경찰서에서 공식적인 총기를 지급하지도 않았다. 경찰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곤봉, 리볼버 권총, 산탄총(샷건)을 사비로 구입해서 들고 다녔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찰의 무장을 표준화할 필요가 대두되었고, 개인이 아닌 경찰서 소유의 무기를 근무시간에 들고 다니는 시스템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지급하던 총기는 경찰 개인이 구입해서 들던 것과 다르지 않은 리볼버 권총과 산탄총 정도였다. 거대한 범죄 조직과 전쟁을 벌이는 게 아니라면 그 정도로 충분했다.
하지만 경찰의 가벼운 무장이 한계에 부딪히는 사건이 1966년에 일어난다.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Austin)에서 일어난 '텍사스 대학교 시계탑 총기 난사 사건'이다. 해병대에서 근무하고 전역한 후 이 대학교 공대에서 공부하던 범인은 어느 날 어머니와 아내를 죽이고—총기 난사 범인 중에는 본격적인 범행 전에 부모나 배우자처럼 가족을 먼저 살해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조준경이 달린 소총을 비롯한 다양한 총기를 손수레에 싣고 학교 본관 28층 시계탑 전망대에서 무차별적으로 지상에 있는 학생들을 조준 사격해서 살해했다.
군복무 중에 뛰어난 사격 솜씨로 표창을 받고 저격수 훈련까지 받았던 범인은 경찰과 장시간 대치할 각오로 탄환은 물론, 물과 식량까지 준비하고 올라간 상태였다. 그런 그가 28층 높이에서 총알을 내리꽂으니 출동한 경찰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경찰관 세 명이 건물 구조를 아는 민간인 한 명과 시계탑으로 올라가 범인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러기까지 90여 분 동안 15명이 숨졌고, 31명이 다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학교 내 총기 난사 사건이었고, 2007년 재미 한국인 조승희가 버지니아 공대에서 범행을 저지르기 전까지 최대의 피해자를 낸 학교 총격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에서는 경찰 또한 중화기로 무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서 킹 목사, 로버트 케네디, 말콤 엑스 등 정치인과 운동가들이 암살당하고, 시위와 폭동이 전 미국을 휩쓸면서 많은 도시가 불에 타는 등 사회가 극도로 불안해졌기 때문에, 경찰의 강경 진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이런 분위에서 '법과 질서'를 외친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중무장한 범인을 제압할 수 있는 경찰특공대가 탄생하게 된다.
SWAT(Special Weapons and Tactics, 특수 화기 전술)으로 불리는 미국 경찰특공대의 역사를 보면 텍사스 대학교 시계탑 총기 난사 사건이 경찰특공대 탄생의 계기라고 설명하지만, 초기 임무는 시위, 폭동의 진압이었다. 경찰특공대가 처음 등장한 후 미국 각 도시에서 유행처럼 경찰 내 중무장 조직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과 여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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