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복스(Vox)에서 발행한 'How war became a crime'을 우리 말로 옮긴 것입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읽으실 수 있어요.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했지만 읽기 쉽게 쓰인 글이라 어렵지 않으실 거예요!


1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탄생시킨 베르사이유 조약은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내는 헌장(charter)으로 시작했다. 국제연맹규약(Covenant of the League of Nations, 1919년에 서명–옮긴이)이라는 이름의 이 헌장이 만들어낸 단체는 국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무엇보다 회원국들이 "영토 보존(territorial integrity)과 연맹의 모든 회원국이 가진 현존하는 정치적 독립성을 외부적 침략으로부터 지키고 존중하도록" 요구했다.

규약의 10조에 들어있는 이 약속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슨의 작품이다. 윌슨은 1919년 파리 강화회담(Paris Peace Conference)에서 국제연맹규약의 초안을 만드는 위원회의 의장이었다. 역사학자인 존 밀턴 쿠퍼는 자신의 책 'Breaking the Heart of the World: Woodrow Wilson and the Fight for the League of Nations (세계의 위기: 우드로우 윌슨과 국제연맹의 향한 싸움)'에서 그 10조를 "윌슨이 규약 초안에 기여한 뛰어난 업적"이라고 했다.

윌슨 대통령이 넣은 조항은 결국 국제연맹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헨리 캐벗 러지 상원의원(공화당, 매사추세츠주) 같은 사람들은 그 조항이 미국으로 하여금 미국과 무관한 분쟁에 말려들어 다른 나라를 지켜주는 싸움을 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러지 의원은 10조를 "이 조약에서 가장 중요한 조항"이라고 하면서 "뛰어난 미국의 젊은이들"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를 지키는" 말도 안 되는 "잡일"을 맡아서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윌슨 대통령이 주장하던 국제연맹의 헌장은 미국의 헌법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미국 내에서도 많았다.

결국 러지 의원과 같은 회의론자들이 이겼고, 미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는 결국 국제연맹의 실패에 큰 원인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국제연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이를 창피하게 실패로 끝난 실험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실험이 전부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국제연맹규약의 10조를 떠올린다. 러시아의 침공은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존과 정치적 독립을 분명히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어떤 국제법도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는 것을 막지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는 그 10조가 애초에 세웠던 원칙을 증명하는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러시아의 침공이 이토록 충격적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바로 국가에 의한 영토 정복 행위에 대한 반대가 하나의 강한 규범(norm, 규범은 사람들이 '정상'으로 여기는 것을 가리킨다–옮긴이)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규범은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한 이상주의적 실험으로 시작되었다. 국제연맹규약 10조가 그런 예인데, 그보다 더 이상주의적인 노력도 있었다. 흔히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d Pact)이라고 알려진 '국가 정책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포기하는 조약(Treaty for Renunciation of War as an Instrument of National Policy, 1928년에 서명)'이다.

켈로그-브리앙 조약 서명식 (1928). 이후로 10년 넘게까지 63개국이 이 조약에 가입했지만 현재는 국제법상 효력을 상실한 상태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이런 규범이 사라졌다는 증거가 아니다. 현재의 위기는 오히려 이 규범이 원래의 의도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 규범을 위반하자 국제사회는 엄청난 (그러나 비군사적인)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있다.

과거 정복 전쟁의 작동 방식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의 타니샤 페이잘 교수는 국제연맹규약 10조가 "정복에 반대하는 규범"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페이잘은 자신이 쓴 책 'State Death: The Politics and Geography of Conquest, Occupation, and Annexation (국가의 소멸: 정복과 점령, 합병의 정치학과 지형)'에서 폭력에 의해 나라(state)가 소멸하거나, 국가(country) 전체가 전쟁을 통해 영구적, 혹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사례들을 살펴본다. 가령 1795년에 폴란드가 무너지고 그 결과로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 러시아 제국에 의해 분할된 예가 그렇다. (폴란드인들은 그로부터 한 세기 이상 주권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렇게 폭력적인 정복을 통한 국가의 소멸은 꽤 흔했다. 실제로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이 존재하는 건 그들의 선조 격인 나라들(독일은 프로이센, 이탈리아는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이 하노버 왕국이나 시칠리아 왕국 같은 작은 국가들을 정복,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일되기 전 이탈리아의 모습.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정복 전쟁의 결과로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정복 전쟁은 법적으로 제도화되었고 전쟁을 위한 정당한 이유였다. 예일 대학교의 우나 해서웨이와 스캇 샤피로는 그들이 함께 쓴 책, 'The Internationalists: How a Radical Plan to Outlaw War Remade the World (국제주의자들: 전쟁을 금지하려는 과격한 계획은 어떻게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나)'에서 20세기 이전만 해도 전쟁을 둘러싼 일반적인 생각(규범)은 정복 전쟁을 허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법학자이나 국제법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 후고 그로티우스의 글을 인용한다. 그로티우스는 분쟁을 해결하는 마지막 방법으로서 영토 정복을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로티우스는 전쟁은 소송(lawsuit)과 비슷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전쟁은 잘못에 대한 배상을 받으려는 의도였고, 그 방법 중 하나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소유한 재산(여기에는 영토도 포함된다)을 압수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폭력을 사용할 내재적(inherent, 타고난)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연합해서 국가(states)를 구성하면 그 권리를 국가에 양도했다. 따라서 국가는 방어할 권리의 연장선 위에서 잘못을 배상받기 위한 전쟁을 수행할 권리와 잘못에 대한 배상으로서 재산을 빼앗을 권리를 갖는다.

저자 샤피로는 내게 "그로티우스는 국가들에게 전쟁할 권리가 있음을 방어해주려는 목적으로 사회계약론을 만들었다"라고 통렬하게 말했다. 이런 종류의 전쟁도 그 이유를 문서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정당화는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설득력 있을 필요는 없었다.

네덜란드 델프트에 있는 그로티우스의 동상

그로티우스는 정복을 옹호하는 태도를 가장 잘 요약해서 표현해주었지만, 사실 그의 주장은 20세기 이전의 유럽과 다른 대륙에 널리 퍼져있던 전통을 반영한 것이었다. 해서웨이와 샤피로는 전 세계의 정치인들이 전쟁을 시작하는 이유를 밝힌 "전쟁 선언문(war manifesto)"들을 모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는데, 그중 많은 선언문들이 "전쟁은 다른 수단을 동원한 소송"이라는 그로티우스의 논리와 일치한다.

최초의 사례 중 하나가 149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가 프랑스의 샤를 3세를 상대로 한 전쟁을 자신의 아내를 훔쳤다는 이유로 정당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샤피로에 따르면 "히브리어 성경이 전쟁 선언문이다. 성경이 가진 기능 중 하나가 이스라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정복의 감소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변화가 생겼다. 페이잘은 "폭력에 의한 국가의 소멸은 특히 1945년 이후로 감소했다"라고 말한다. "특정 국가의 영토를 빼앗으려는 시도 자체는 그만큼 줄어들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작은 나라를 상대로 성공한 정복 전쟁은 감소하고 있다."

물론 (정복 전쟁이) "극적으로 감소했다"는 말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폭력에 의한 국가 소멸은 여전히 일어난다. 북베트남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정복한 것도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페이잘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소멸은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독일이나 예멘의 예처럼) 자발적인 통일, (소비에트 연방이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예처럼) [자발적인] 해체가 폭력에 의한 국가 소멸보다 훨씬 더 많다."

페이잘은 이런 변화를 만들어낸 공로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국가 정복에 반대하는 규범을 처음 만들었던 국제연맹규약에 있다고 한다. 1945년 이후 세계 최강대국(hegemons) 두 나라 중 하나(미국)가 이 규범을 선언하고 이를 집행(강제)한 것이 영토 정복을 금기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해서웨이와 샤피로는 또한 국제 규범들이 정복 전쟁의 감소에 공헌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 변화의 기원을 국제연맹이 아닌 1928년에 체결된 '국가 정책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포기하는 조약(Treaty for Renunciation of War as an Instrument of National Policy, 부전조약不戰條約이라고도 부른다–옮긴이)'에서 찾는다. 미국의 국무장관 프랭크 켈로그와 프랑스의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이름을 따서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라도 불리는 이 조약의 본문은 아주 짧아서 여기에서 모두 소개할 수 있다.  

제 1조
조약의 체결국은 각국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 간의 분쟁을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을 규탄하며,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이를 국가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함을 엄중히 선언한다.

제 2조
조약의 체결국은 어떤 종류의, 혹은 어떤 기원을 가진 분쟁이나 갈등이 국가들 사이에 발생해도 평화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해소하거나 해결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전쟁은 어떻게 범죄가 되었을까? 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