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껍데기 이론 ③
• 댓글 남기기2005년 여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Katrina)는 미국 역사에서 최악의 재난 중 하나로 꼽힌다. 미국 동부 바다에서는 매년 6~7개의 허리케인이 발생하고, 그중 한두 개가 미국의 동부 해안을 덮치기 때문에 낯선 자연재해는 아니지만, 카트리나는 특별했다. (트럼프가 아메리카만으로 이름을 바꾼) 멕시코만을 지나면서 카테고리5(풍속 280km/h)가 되었고, 육지에 도달했을 때도 카테고리3(200km/h)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속 200km로 달리는 차에서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놓을 수 있다면 느낄 수 있는, 끔찍한 풍속이었다.
하지만 카트리나가 최악의 허리케인으로 기억되는 건 그 규모와 상륙지점 때문이었다. 마치 저격수가 겨냥한 것처럼 정확하게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의 최대 도시 뉴올리언즈에 도착한 것이다.

뉴욜리언즈는 홍수에 취약한 지역이었다. 도시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해수면 위에 있던 넓은 지역이 20세기에는 해수면보다 낮아졌는데 (아래 그림에서 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주가 가능했던 건 바닷물을 막아주는 제방 덕분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지어진 뉴올리언즈의 제방은 처음부터 설계에 하자가 있었을 뿐 아니라, 예산 부족으로 유지 보수 작업이 오래도록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문가들이 제방의 붕괴 위험을 경고했지만, 부자 감세와 정부 예산 삭감으로 악명 높았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뉴올리언즈 제방의 정비 사업 예산을 크게 삭감해서 이미 인재(人災)가 예고된 상황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당시에도 정치인들은 전문가의 지적을 듣지 않았고, 제방은 기록적인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상륙과 함께 무너졌다. 하지만 부시를 "미국 현대사에서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불리게 (물론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의 얘기다) 만든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8월 29일,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즈에 상륙한 즉시 제방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도시의 80%가 물에 잠기고 있었지만, 부시 대통령은 텍사스로 3일간의 휴가를 떠났다. 연방 재난관리청(FEMA)은 너무나 느렸고, 대응책 지휘는 중구난방이었다. (세월호 당시의 박근혜 정부를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나는 2014년 세월호 뉴스를 보면서 대통령의 무관심부터 관계 당국의 무능까지 2005년의 카트리나 때의 부시 행정부와 너무나 닮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홍수에 대비해 대피령을 내렸지만 도시에는 10~15만 명이 남아있었다. 왜일까? 당시 뉴올리언즈의 빈곤율은 28%로, 미국 대도시 평균을 크게 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피령이 내린다고 해서 당장 떠날 수 없는 경우가 흔하다. 가족을 모두 차에 태우고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고, 그렇게 해서 주변 지역으로 간다고 해도 호텔, 모텔에 장기간 머무를 돈도 없다.
여기에서 뉴올리언즈의 빈곤율이 높은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이 도시의 흑인 인구는 67.3%로, 흑인 비중이 가장 높은 대도시 중 하나였다. 미국 빈곤층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을 생각하면 뉴올리언즈의 높은 빈곤율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사람들은 공화당의 부시 행정부가 이 사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가 뉴올리언즈 인구의 대다수가 가난한 흑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참고로, 이 재해로 2,000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는데, 그중 대다수가 가난한 동네의 흑인들이었다.
배경 설명이 길어졌지만, 뜨거운 여름, 물에 잠긴 대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외부와 단절된 채 목숨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은 문명과 도덕성은 얇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었다.
레베카 솔닛에 따르면 뉴올리언즈가 물에 잠기자 연방 정부와 뉴올리언즈 시장, 그리고 언론 매체들은 일제히 '재난 전설(disaster myth)'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재난 전설은 솔닛의 책에서도 언급되는 개념으로, 대규모 재난이 발생한 후에 등장하는 근거 없는 소문이나 고정관념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재난 지역이 무법천지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언론에서는 확인도 하지 않고 도시가 완전히 혼란(chaos)에 빠졌고, 약탈과 성폭행이 벌어지고 있으며, 총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고 보도했다.
그런 언론 보도를 접한 정치인들은 현장을 확인하지도 않고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같은 내용을 반복하며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드넓은 지역이 침수되어 접근이 힘드니 실제 상황을 확인할 방법도 없었고, 시장을 비롯한 정치인과 언론이 같은 얘기를 하니 사람들은 그걸 사실로 받아들였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소문이 "질서를 유지할 경찰이 사라지면 인간은 악한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라는 선입견에 잘 들어맞았고, 그런 믿음을 더욱 강화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재민을 수용할 장소를 찾던 시와 주, 연방정부는 뉴올리언즈의 돔구장인 슈퍼돔(Superdome)을 사람들에게 개방했는데, 물, 음료를 비롯한 생필품의 공급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화장실 청소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시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자 시설은 삽시간에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환경으로 전락했다. 여기에 "혼란을 틈타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졌고, 이를 언론이 증폭하면서 뉴스로만 사태를 접하는 외부에서는 슈퍼돔 주변에는 수백 구의 시체가 널려있다고 믿고, 시신을 보관할 냉동 트럭을 보내기도 했다.

주와 연방 정부의 재난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않자, 위기에 처한 시민들은 각자 물과 음식, 의약품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도시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상황에서는 신용카드는커녕 돈도 소용이 없었다. 식료품점 안에는 음식이 있었지만, 문은 잠겼고, 점원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해진 사람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약과 음식을 꺼내야 했다.
언론에서 "약탈자들(looters)이 판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방송 기자들은 헬기를 타고 도시 상공을 다니면서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은 약탈자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백인이 식료품점에 들어가면 음식을 찾는 사람이고, 흑인이 들어가면 약탈자라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정부의 재난 지원은 전혀 없고,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물건을 훔치자 정부는 경찰과 주 방위군을 보내 이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구호물자보다 경찰 병력이 먼저 도착한 것을 보면서, 정부에게는 사람의 생명보다 사유재산을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피하기 힘들었다.
카트리나 재해 중에 살인과 약탈 행위가 정말로 심각했을까? 당시 뉴스에서 가장 많이 나오던 "슈퍼돔에서 살인과 강간이 횡행한다"는 뉴스는 근거가 없는 헛소문이었고,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범죄행위도 다르지 않았다. 흑인이 대다수인 이재민들을 보며 잠재적 범죄자, 약탈자라고 서둘러 결론을 낸 것이다.
실제로 살인이 일어나기는 했었다. 경찰에 의한 살인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총을 쏴서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재난 중에 정부가 무책임하게 쏟아낸 말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핑계로 총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위협했다. 책을 준비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조사한 솔닛에 따르면 그렇게 총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닌 사람들은 백인들, 특히 백인우월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의 총구는 흑인들을 겨냥했다.
'얇은 껍데기 이론'에 따르면 무정부 상태가 되면 사람들은 악한 본성과 폭력성을 드러내야 하는데,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자 제일 먼저 폭력성을 드러낸 사람들은 경찰이었고, 얇은 껍데기 이론을 믿고 흥분한 자경단과 백인우월주의자들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브레흐만(브레그먼)은 이렇게 말한다. "공포에 빠진 것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껍데기 이론을 철저하게 믿기 때문에 크게 겁을 먹었던 거죠." 솔닛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엘리트들은 일반 시민들이 (그런 상황에서) 악한 행동을 할 거라고 단정짓습니다. 그렇게 믿어야 자기들이 휘두르는 폭력과 권력 쟁취, 그리고 이기심을 정당화할 수 있으니까요."
이게 그들이 보는 얇은 껍데기 이론의 진실이다. 진짜 괴물이 있다면, 사람들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그걸 통치 철학으로 삼는 홉스같은 사람들이다.

재난 중에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살펴본 솔닛은 그들이 위기에 빠진 이웃을 돕고, 커뮤니티를 지키려고 노력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령 말릭 라힘(Malik Rahim) 같은 사람이 그렇다. 그는 도시가 침수되었을 때 이웃 한 사람이 울면서 자기를 찾아와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길거리에서 총을 들고 저를 보고 빨리 꺼지지 않으면 쏘겠다고 했어요." 그 이웃은 흑인이었고, 그에게 총으로 위협한 사람은 백인이었다. 프로퍼블리카(ProPublica)의 보도에 따르면 카트리나 재난 때 총을 쏜 사람들은 전부 백인들이었다고 한다.
끔찍한 재해를 겪은 후 많은 흑인이 뉴올리언즈를 떠났지만 (그 이후로 뉴올리언즈 인구에서 흑인의 비중은 줄었다) 말릭은 떠나지 않고 남아 "새로운 뉴올리언즈"를 만들기 위해 커먼 그라운드(Common Ground)라는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커먼 그라운드에서 하는 사업 중 하나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클리닉 운영인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흑인 운동 단체에서 하는 클리닉"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인종과 관계없이 누구나 찾는 클리닉이 되었다고 한다. 말릭은 카트리나 때 총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던 백인 남자가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커먼 그라운드의 클리닉을 찾아오는 것을 봤다.
"재난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망이 사라져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더 나은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아요."

브레흐만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 노인이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할아버지 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하나는 악하고, 탐욕스럽고, 시기가 많고, 거만하고, 분노한 늑대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롭고, 정직하고, 선하고, 너그러운 늑대란다. 누구나 이렇게 두 마리의 늑대를 마음에 가지고 있고, 그 둘은 항상 우리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지."
그 말을 들은 손자가 물었다. "그럼 둘 중에서 누가 이기나요?"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게 된단다." 🦦
무료 콘텐츠의 수
테크와 사회,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냅니다.
유료 구독자가 되시면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