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회학자 티보 르 텍시에가 스탠퍼드에 보관된 비디오 자료에서 찾아낸 장면은 놀라웠다. 비디오에서 짐바르도는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에게 재소자들을 최대한 가학적이고 거칠게 다루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그의 지시를 받은 학생들은 처음에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한 참여자는 "제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다면 저는 그냥 재소자들과 노래를 부르거나 카드놀이를 하고 싶은데요"라고 했다.

그렇다면 짐바르도는 왜 재소자를 괴롭히라고 강요했을까?

그가 이 실험을 준비한 배경에는 그가 가진 어젠다가 있었다. 미국의 교도소는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가 많기로 유명한데, 당시에는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고 있었다. 러다이트의 진실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1960, 70년대는 미국 사회가 진보적 어젠다에 귀를 기울이고 중요한 법이 통과되던 시기다. 짐바르도는 미국의 교도소 시스템을 개혁해야 하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평소에 폭력적이지 않던 사람도 그 시스템 안에서는 돌변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실험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짐바르도는 실험을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재소자 역할을 하는 참가자가 체포되는 경험부터 시작하게 했다.
이미지 출처: New Scientist

짐바르도는 공동 연구자였던 데이비드 재피(David Jaffe)와 함께 교도관 역할을 맡은 참가자들이 가학적 행위를 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특히 재피는 교도소장 역할을 맡아서 교도관들에게 "더 터프하게 하라"고 다그쳤다. 녹화된 비디오에는 재피의 말을 들은 참가자가 자기는 그런 성격이 아니라고 호소하는 모습도 보인다. 재피는 "어쩔 수 없어. 그래도 계속해서 습관이 되어야 해"라고 말했고, 참가자는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교도관 역할을 맡은 참가자들이 가학행위를 거부하자 짐바르도와 재피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이잖아? 그럼 미국의 형법 제도가 변해야 한다는 걸 알 거 아냐? 그러니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협조해야지"라고 다그쳤다.

이렇게 문제가 있는 실험으로 미국 사회에 어떤 경종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조작된 실험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얇은 껍데기 이론' 즉, 인류의 문명과 도덕성은 인간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본성을 감싸고 있는 얇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쩌면 짐바르도가 노렸던 효과와는 정반대의 결과일지 모른다. 정부와 경찰이 그런 가정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시민을 상대로 가혹 행위를 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마지막 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경찰의 군대화는 미국에서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미지 출처: Responsible Statecraft

텍시에가 짐바르도의 연구에 문제가 있음을 밝혀내기 훨씬 전인 2001년에는 두 명의 심리학 교수가 BBC와 함께 짐바르도의 실험을 똑같이—이번에는 윤리규정을 지켜가며—진행하기도 했다. BBC는 흥미로운 실험을 재구성해서 리얼리티 쇼를 만들려는 생각이었고, 연구자들에게는 논문을 쓸 수 있는 기회였다. 논문은 나왔지만, 실험은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연구와는 완전히 달랐다.

교도관의 가혹 행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문명과 도덕성은 얇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기회만 되면 동물적인 본성—프란스 드 발은 이 표현에도 동의하지 않겠지만—을 드러낼 거라 믿는 걸까?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스루라인(Throughline)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 이 글은 이 에피소드의 내용을 많이 참고했다.) 스루라인은 이 에피소드를 위해 이 주제와 관련된 책을 쓴 두 명의 저자를 초청했다.

미국의 철학자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과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럿거 브레그먼(Rutger Bregman)이다. 한국에는 남자들의 맨스플레인을 지적하는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로도 잘 알려진 솔닛은 재난이 발생한 지역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돕고 커뮤니티를 지키는지 이야기한 책 'A Paradise Built in Hell (지옥에 들어선 천국)'을 썼고, 브레그먼은 'Humankind: A Hopeful History (인류: 희망적인 역사)'를 썼다. 브레그먼은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다가 짐바르도의 실험 조작을 밝혀낸 티보 르 텍시에의 글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럿거 브레그먼의 이름이나 얼굴(아래)이 왠지 낯익게 느껴진다면, 아마도 그가 2019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 경제 포럼(다보스 포럼)에서 했던 발언을 기억하기 때문일 거다. 그는 포럼의 패널로 참여해서 그곳에 모인 갑부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지적해서 큰 화제가 되었다. 브레그먼은 최고의 갑부들이 휴양지에 모여 인류 사회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두고 "당신들이 20세기 중반처럼 제대로 세금만 내도 여기에서 논의하는 많은 문제가 해결될 텐데, 그 세금 얘기는 쏙 빼놓고 자선사업만 얘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가난은 인성 부족이 아니라 금전 부족입니다'라는 그의 TED 토크도 추천한다.
레베카 솔닛과 럿거 브레그먼 
이미지 출처: The Guardian, Wikipedia

솔닛은 서구에서 얇은 껍데기 이론의 근원처럼 이야기하는 토머스 홉스(1588~1679)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이야기하게 된 배경을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홉스가 살던 시대, 특히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영국은 내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귀족들은 정부 구성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피나는 전쟁을 벌였고, 그걸 목격한 홉스가 인간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하지만 솔닛은 영국이 기독교 사회라는 것에도 주목한다. "기독교가 가진 근본적인 믿음은 인간이 신 앞에서 타락해서 낙원에서 쫓겨났고, 예수와 교회를 통해 속죄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기독교 자체가 하나의 '얇은 껍데기 이론'이죠. 인간은 죄를 지어 더럽기 때문에 신의 은총을 통해 깨끗해져야 한다고 믿으니까요."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이나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들이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다.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니 무슨 짓을 못 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무신론자들은 "신이 감시한다고 믿어야만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과 신을 믿지 않아도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 중에 누구를 더 신뢰하겠는가?"라고 묻는다.

솔닛은 더 나아가 '얇은 껍데기 이론'이 당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만들고 있던 서구 국가들에 유리한 논리를 제공해 줬다고 주장한다. 서구를 기준으로 문명이 없는 "미개한" 사람들을 통제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서구 철학은 홉스만 낳은 게 아니다. 브레그먼은 홉스 이후에 등장한 프랑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홉스와 정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음을 이야기한다. 루소는 유명한 교육서 '에밀(Émile)'에서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건강했는데, 사유 재산이 발생하고 문명을 만들면서 그 선한 본성이 변질되어 악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홉스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내놨다. 홉스에게 문명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되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루소에게는 문명이야말로 인간의 타락을 부른 주범이다.

토머스 홉스(왼쪽)와 장자크 루소의 초상
이미지 출처: Britannica, Biography

브레그먼이 보기에 홉스와 루소로 대표되는 이 논쟁은 단순한 철학적 탐구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만들어가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교육을 생각해 보죠. 만약 우리가 아이들은 근본적으로 게으르고 이기적인 존재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학교를 위계질서에 근거한 시스템으로 만들 겁니다. 하지만 만약 아이들은 천성이 호기심이 많고 창의적인 존재라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주는 대신, 스스로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것을 찾아 탐구하게 할 겁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원들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게으른 존재라고 믿는 사장은 그들을 사내 물건을 훔치지 않는지,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겠지만, 직원들이 근본적으로 협력적인 존재이고, 회사를 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사장은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일하는 환경을 만들려고 하겠죠."

브레그먼은 이런 생각은 마치 사회의 자성예언과 같아서 그 사회가 채택한 견해가 그 견해에 일치하는 사회를 만들어 내게 된다고 주장한다. 망치를 들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이는 것처럼, 총이라는 살상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자기를 죽이고 물건을 뺏으려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2005년, 미국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쓴 뉴올리언즈를 수색하는 주방위군
이미지 출처: CODEPINK - Women for Peace

마지막 편, '얇은 껍데기 이론 ③'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