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패러독스
• 댓글 67개 보기내가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이야기가 깊숙하게 진행되면, 아니 그보다는 상대방이 알아들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조심스럽게 꺼내는 책이 하나 있다. 약 10년 전, 잘 알고 지내던 한 출판사 대표로부터 번역 제안을 받은 책이다.
그때만 해도 이런저런 한역과 영역 일에 경험이 꽤 있었지만, 단행본을 번역해 본 경험은 없었던 터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책과 관련해서는 '해보고 싶은 욕심'으로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 그 때는 몰랐고, 내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덥석 승낙했다. 그런데 그 책은 내 능력을 넘어서는 책이었다. 내 게으름에 대한 핑계이기도 하지만 책 자체가 사실은 학술서적이었고, 예문으로 등장하는 글들이 내가 읽지 않은 문학 작품들이었다. 결국 번역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반년이 되고, 일 년이 넘으면서 번역 작업은 무산되었다. (출판사가 외국 출판사에 번역 판권을 줄 때는 기한이 있다.)
순전히 내 잘못으로 한국에 아직도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서로밖에 소개할 수 없는 이 책은 'Letting Stories Breathe (이야기가 숨 쉬게 하기)'라는 제목의 책이고, 부제는 옮기기도 힘든 'A Socio-Narratology(사회적 서사학)'다. 그런데 내가 번역도 하지 않은–솔직히 고백하면 다 읽지도 않은–책을 가끔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 책의 도입부에 나오는 내용 때문이다. 저자인 아서 프랭크(Arthur W. Frank)는 이야기가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문학 작품 속 등장인물의 행동을 통해서 설명하면서, 사람들은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결정의 순간에 자신이 듣고, 읽고, 보아서 알고 있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내러티브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많고 다양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중에서 선택할 수 있지만, 알고 있는 내러티브의 숫자가 제한적인 사람들은 빈약한 선택지에서 고르는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의 선택이 원래 그렇듯,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에 기반해서 미래를 상상하고 행동의 계획을 세운다. 가령, 기독교인들이 이럴 때 "하나님의 뜻"을 찾아 따르겠다고 말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는 그 상황을 기독교의 내러티브를 통해 바라본다는 얘기다. 서사학이라는 걸 전혀 몰랐고,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내게는 눈이 열리는 경험이었다.
내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 책이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느냐고 묻고, 나는 안타깝게도 번역되지 않았는데 사실은 그게 내 탓이라고 털어놓는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 그 책을 번역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호모 픽투스 모험
그러다가 이번에 그 책과 아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원제는 'The Story Paradox,' 한국어 제목으로는 더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이다. 저자는 'The Storytelling Animal'이라는 책으로 주목받았던 조너선 갓셜(Jonathan Gottschall).
나는 이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난 후에 이야기가 가진 힘에 관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 비로소 생겼다는 사실에 기뻤다.
내가 번역하지 않은 책과 이 책은 분명 다른 책이다. 그런데 그 차이는 관점의 차이라기보다는 관심 영역의 차이다. 전자의 경우는 이야기가 독자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은 이야기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는 대목은 두 책이 아주 흡사하다.
저자 조너선 갓셜은 모든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설득하고 '구슬린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는 영향력 발생기(influence machine)이라고 주장한다. 인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이야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로 진화했는데, 문제는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해로울 때가 많다는 것. 저자는 이를 산소에 비유한다. 우리는 산소가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산소는 잘 알려진 것처럼 "유독성 환경 독소"로서 우리 몸을 지속적으로 손상시키고 노화를 일으키는데,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도 이야기다. 저자는 미국인들의 흑인, 성소수자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바뀌게 된 배경에는 허구의 인물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인기 시트콤 '윌앤그레이스(Will & Grace)'에 나오는 인물들이 실생활에서 동성애자를 접해보지 못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꿨고, 드라마 시리즈 '24'에서 능력 있는 흑인 대통령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수 있다는 거다.
갓셜은 이야기가 가진 사회적 힘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국가'를 꺼낸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이 당시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그의 희곡 '구름'은 노인(소크라테스)이 참된 철학자가 아니라 삿된 궤변술의 달인이라고 만방에 고하여 시민들의 마음을 돌려세웠다"라는 것이다. 플라톤이 훗날 시인을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문학작품을 쓰는 의미의 시인이 아니라, 이렇게 대중을 미혹하는 나쁜 이야기꾼을 몰아내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 책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21세기의 미디어 환경, 인터넷 환경에서 이야기의 역할을 점검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시인/이야기꾼을 몰아내고 국가, 혹은 철인왕이 전달하는 하나의 내러티브를 중요시한 플라톤과 플라톤의 '국가'가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를 만들기 위한 지침서"라고 비난한 20세기 철학자 카를 포퍼(Karl Popper)의 주장을 대비한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하고 있는 사람이 중국의 시진핑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런 서로 다른 모델들의 경쟁이 결국 "이야기나라"를 장악하려는 경쟁이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종교이고, 그중에서도 기독교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종교학자) 바트 어만(Bart Ehrman)의 설명을 가져와 소수, 약자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강력한 "입소문 스토리텔링"으로 서구를 장악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기독교가 그렇게 입소문에 유리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같은 틀에서 지평설(flat Earth theory)과 같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나 음모론이 쉽게 퍼지는 이유를 흥미롭게 설명하기도 한다. 지평설의 경우 미국 성인 중에서 2%가 믿고 있으니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도, 그렇게 황당한 주장을 인구의 2%나 믿는다면 하나의 이야기로서는 큰 성공을 거둔 셈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기후 변화와 같은 과학적인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힘들고, 이해를 시켜도 왜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지도 '이야기의 힘'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한다. 과학자들은 이야기를 (혹은 이야기가 가진 나쁜 영향력을) 거부하고 팩트를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설명은 비활성적(이 단어에 대해서는 책에서 잘 설명한다)이고, 대중에게 추상적으로 다가간다는 거다.
더 나아가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합리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의 '소셜 애니멀'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지만, 사람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이미 내린 결정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용도로 '합리화'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 작업에 동원되는 필수적인 도구가 바로 이야기다.
무엇보다 저자는 자신이 책에서 하고 있는 작업도 결국 이야기꾼의 작업이라는 아이러니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고, 그런 태도가 이 책을 돋보이게 한다. 내러톨로지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임에도 마지막 장까지 흥미롭게 독자의 눈을 끌고 가는 힘도 저자의 이런 세심함 때문 아닐까? 거기에 이런 글을 돋보이게 하는 노승영 번역가의 훌륭한 번역(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어의 새로운 표현까지 몇 가지 배우게 되었다)까지 더해져 앞으로 '이야기가 가진 힘'이 대화의 주제가 될 때 내가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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