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이르면 미국의 거의 모든 가정에 TV가 보급되어 있었다. 조언 쿠니가 보기에 이는 엄청난 기회였다. 각 가정의 거실을 교실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디너 파티에 초대되었던 지인 중 카네기 재단의 이사였던 로이드 모리세트(Lloyd Morrisett)는 그 아이디어를 듣고 재단에서 비용을 댈 테니 정말로 TV가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실험 연구를 해보자고 했다.

조언 쿠니는 몇 달 만에 보고서를 완성했다. 제목은 "The Potential Uses Of Television For Preschool Education"(TV를 사용한 취학 전 아동 교육의 가능성)이었고, 결론은 '가능하다'였다. (이 보고서는 여기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이들이 맥주 광고 속 노래를 외워서 따라 부른다면, 교육적인 내용도 익힐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조언 쿠니가 작성한 보고서

하지만 조언 쿠니는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 믿었다. 교육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적절한 커리큘럼을 만들고, 과학적인 교육 방법론을 사용해서 이 프로그램 제작을 후원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이게 교육 효과가 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세서미 스트리트가 성공한 장수 프로그램이 된 비결이었다.

조언 쿠니는 이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카네기 재단으로부터 100만 달러를 지원받았지만, 실제 프로그램 제작에는 총 800만 달러가 필요했다.지금 화폐 가치로는 6,2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850억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고, 이 정도의 지원을 할 수 있는 곳은 연방 정부였다.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은 과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추진했던 '뉴 딜(New Deal)' 정책과 비슷한 자신만의 큰 정책 목표를 만들었다.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라는 이름의 이 정책의 핵심은 미국에서 가난과 인종 차별을 없애는 것이었다. 존슨이 보기에 교육, 특히 가난한 흑인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야말로 가난과 인종 차별을 없앨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1960년대가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의 시대였다는 것도 존슨의 정책, 그리고 조언 쿠니의 '미디어를 통한 교육' 실험에 도움이 되었다.

그 후 오랜 노력 끝에 1968년 조언 쿠니의 팀은 미국 연방 교육부로부터 400만 달러의 자금 지원을 받게 되었다. (트럼프와 공화당 정치인들이 교육부 폐지를 주장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지원이 세금 낭비라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금액의 절반이 채워진 것이다. 나머지 400만 달러는 카네기 재단과 포드 재단, CPB를 비롯한 다양한 단체의 후원으로 충당되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미국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에 9억 6,250만 달러를 요청했다는 기사

조언 쿠니는 'TV를 통한 교육'이라는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교육학자, 심리학자, 소아과 의사 등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났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는 것과 실제로 아이들이 보고 배울 만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지금이야 아동용 교육 TV 프로그램이 흔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세서미 스트리트와 같은 프로그램은 없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선례가 없었다.

그래서 제작팀은 다시 교육학, 심리학, 소아의학의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예술가, 음악가들까지 모두 초빙해서 연구와 논의를 진행했다. 훗날 조언 쿠니는 "당시 세서미 스트리트는 TV 역사상 가장 많은 연구를 거쳐 제작된 프로그램이었다"고 회상했을 만큼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세서미 스트리트의 제작팀은 '아동용 텔레비전 워크숍' (Children's Television Workshop, 지금은 Sesame Workshop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이라는 비영리단체였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흑백 TV로 미군 방송(AFKN)을 통해 세서미 스트리트를 가끔 봤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나중에 미국에서 화질 좋은 컬러 TV로 다시 보게 되면서 이 프로그램의 무대인 '세서미 스트리트'가 의외로 낡고 칙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모든 아동용 프로그램들이 밝고 깨끗한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서미 스트리트의 낡은 동네는 더욱 눈에 띄었다.)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가 되었지만, 그래서인지 이 프로그램이 원래는 대도시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흑인 아동을 교육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종종 간과되곤 한다. 세서미 스트리트가 다소 낡아 보이는 것은 이 프로그램의 시청자가 될 뉴욕의 가난한 동네 아이들이 TV를 보면서 자기와 동일시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배경이 밝고 깨끗한 교외의 부유한 동네였다면, 그 아이들은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세서미 스트리트는 가상의 거리이지만, 할렘(Harlem)이 그 모델이 되었다. 뉴욕시 맨해튼 북부의 할렘은 20세기 초, 남부의 극심한 인종차별을 견디지 못한 흑인들이 미국의 대도시로 이주한 '대이동(Great Migration)' 시기에 정착한 동네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이렇게 아주 구체적인 시청자와 목적을 가진 프로그램이었다.
세서미 스트리트 촬영 세트와 1960년대 맨해튼 할렘의 모습
이미지 출처: Smithsonian Magazine, AAIHS

문제는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느냐였다.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만드는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보지 않는다면, 아무리 교육적인 내용이라 해도 그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조언 쿠니는 에블린 데이비스(Evelyn Payne Davis)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뉴욕의 흑인 커뮤니티에서 오래 활동하면서 지역 사람들을 잘 알고 있던 에블린 데이비스는 첫 방송을 앞둔 세서미 스트리트의 홍보 대사가 되어 지역 에너지 회사가 지원한 버스를 타고 할렘의 교회와 유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촬영을 마친 파일럿 에피소드를 보여주며 세서미 스트리트가 곧 방영된다고 알렸다.


출연진은 어떻게 정해졌을까? 세서미 스트리트의 초기 에피소드를 보면 흑인인 '로빈슨 부부'가 등장하는데, 매트 로빈슨(Matt Robinson)이 남편 고든 역을, 로레타 롱(Loretta Long)이 아내 수전 역을 맡았다. 로레타 롱은 인터뷰에서 자기가 수전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캐릭터가 자기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흑인 여성에게는 흔하지 않은 수전(Susan)이라는 이름의 캐릭터는 미국 중서부의 농촌에서 자란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미시건주 농촌에서 자란 로레타 롱의 이야기였다.

미시건주에서 자라고 대학교까지 그곳에서 마친 롱의 꿈은 미시건주의 대도시 디트로이트에 가서 전설적인 흑인 음악 레이블 모타운(Motown)의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춤과 노래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디트로이트에서 기회를 잡지 못한 롱은 1960년, 뉴욕으로 와서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기 위해 각종 오디션에 참여했다. 하지만 뮤지컬 가수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먹고 살아야 했고,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맨해튼 할렘과 브롱크스에서 임시 교사로 일했다고 한다.

앞줄 왼쪽이 매트 로빈슨, 가운데가 로레타 롱
이미지 출처: People

그러다가 1969년, 뉴욕의 공영 TV 방송에서 흑인 음악과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공동 진행을 맡게 되었는데, 그 프로그램의 스태프 한 사람이 세서미 스트리트의 출범에도 관여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 세서미 스트리트가 배우를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세서미 스트리트 제작팀에서는 제작 초기만 해도 수전이라는 캐릭터를 통기타를 치는 조언 바에즈(Joan Baez) 같은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모타운 가수 분위기의—로레타 롱이 오디션을 보러 나타났으니 제작진은 당황했다. 롱에 따르면 당시 자신은 커다란 아프로(Afro, 흑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헤어스타일)를 한 앤절라 데이비스(Angela Davis, 흑인 민권운동가, 작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롱에게 기타는 어디 있냐고 물었고, 기타를 연주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간 롱이 "무슨 얘기냐"고 하자, 포기하고 그냥 미국 동요, 'I'm a Little Teapot'을 불러 보라고 했다.

조언 바에즈(왼쪽)와 앤절라 데이비스
이미지 출처: Time, ThoughtCo

로레타 롱은 그 동요를 모타운 분위기를 섞어 부르기 시작했지만 바로 멈췄다. 자기가 오디션을 보는 프로그램이 어린아이용이었고, 제작진은 오디션 테이프를 포커스 그룹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합격자를 고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노래를 다시 시작할 테니 어린이 여러분, 모두 일어나서 함께 불러요!" 하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에 따르면 제작진은 여러 오디션 테이프를 보여줬는데, 아이들은 롱의 테이프를 보면서 모두 일어나서 함께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때 할렘에 있는 이름 모를 아이들이 일어나서 노래를 불러주는 바람에 제게 커리어가 생긴 거죠."

로레타 롱은 엔터테이너가 되기 위해 부업으로 교사를 했지만, 덕분에 세서미 스트리트라는 프로그램의 성격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그는 세서미 스트리트에 참여해 일하면서 매사추세츠 대학교 앰허스트에서 도시 교육학 박사까지 받았다.  

아래 영상은 1971년 방송된 세서미 스트리트 에피소드에서 수전(로레타 롱)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다. 그림 속 네 명의 아이 중 다른 아이를 찾는 노래인데, 인종을 섞어 놓았지만,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인종이 아니라 아이들이 하고 있는 활동을 봐야 한다. 이처럼 작고 세심한 설계가 세서미 스트리트를 위대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흑인 차별이 심한 남부 미시시피주 정치인들의 눈에는 그런 설계가 몹시 거슬렸다.


마지막 편, '세서미 스트리트 1969 ③'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