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과 비슷한 시점에 닷페이스에서 아주 흥미로운 콘텐츠를 유튜브 채널에 발행했어요.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주제와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글 아래 소개합니다. 읽으신 후에 닷페이스의 영상을 꼭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1986년에 나와 이제는 고전이 된 ‘탑건(Top Gun)’은 배우 톰 크루즈를 할리우드 최고의 남자 배우로 만들어 준 영화다. 막강한 무기가 동원되는 화려한 액션 영화에 익숙한 요즘 관객에게는 대단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의 군사, 전쟁물과는 많이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해군의 협조로 실제 항공모함과 함재기를 사용해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미군은 전쟁 영화 제작에 협조를 꺼렸다. 베트남전에 패해 철수한 1975년 이후 대표적인 전쟁 영화는 ‘디어헌터’(1978)나 ‘지옥의 묵시록’(1979)처럼 전쟁에 비판적인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화 '탑건'의 한 장면

하지만 1980년대에 나온 ‘탑건’은 달랐다. 보수적인 가치를 내세우고 애국심을 강조하던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시대답게 이 영화는 세계 속에서 미국과 미군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묘사했고, 현대적인 무기를 멋지고 아름답게 표현하면서 전 세계 10대 남자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 해군이 촬영에 협조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이 영화가 크게 흥행한 직후 미 해군 지원자가 무려 다섯 배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해군 전투기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지원 동기를 말할 때 탑건 얘기를 꺼내면 얼차려를 줬다는 얘기가 있었을 만큼 이 영화에 환상을 가진 아이들이 해군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미 해군 장교 중 대부분은 그 영화를 보고 입대를 결정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인기 영화나 드라마가 특정 직업군에 환상을 심어주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흥미로운 건 그런 콘텐츠가 의사나 변호사처럼 전통적 인기 직종이 아닌 일을 하는 사람들을 다룰 때다. 가령 미국의 인기 사이언스픽션 ‘스타트렉’이 처음 TV에서 방영된 건 1966년으로, 미국이 달에 착륙하기 3년 전이다. 당시는 직업으로서의 과학자나 엔지니어에 대한 인기가 크지 않았을 시절이지만 미국 아이들이 그 드라마를 보면서 우주 탐험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중 많은 아이들이 실제로 과학자와 엔지니어로 자랐다. 그 결과 미 해군의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현재 중년 이상인 미국의 과학자, 엔지니어 중에는 ‘스타트렉’이 학업과 직업 선택의 계기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주 구체적인 영향을 미친 경우도 있다. 1996년에 나온 재난 영화의 대명사 ‘트위스터’는 미국의 회오리바람인 토네이도를 연구하는 기상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가 인기를 끈 후에 대학에서 기상학을 선택한 학생 수가 늘었다고 한다. 기상학이 과학 연구 분야 중에서 다소 작고 흔하지 않은 분야임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좋은 일을 한 셈이다.

미국에서 ‘CSI 과학수사대’가 큰 인기를 끌던 2008년에 미국 국립사법연구소(NIJ)는 흥미로운 연구 논문을 소개했다. ‘CSI 효과는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미국에서 범죄 수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뉴스 프로그램의 인기가 미국의 사법기관 활동, 즉 재판에 영향을 주느냐를 연구한 것이었다. 특히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원 중에 범죄 수사, 특히 과학수사와 관련된 콘텐츠를 많이 보는 사람들이 재판 과정에 제출되는 증거물과 수사 내용에서 과학적인 조사와 증거를 더 요구하고 그런 자료를 더 많이 신뢰하는지를 살펴봤더니 사실이었다고 한다. 물론 실제 사건은 드라마와 다른데 그들의 비현실적인 기대가 재판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쨌거나 일반인들에게 생소했던 영역을 소개하는 역할은 톡톡히 해냈다.

‘엑스파일’의 여주인공 스컬리 요원은 여성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깼다.

그런가 하면 ‘스컬리 효과(Scully Effect)’라는 말도 있다. 여기에서 스컬리는 199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TV 드라마 ‘엑스파일(X-Files)’에 등장하는 여성 FBI 수사요원, 데이나 스컬리를 가리킨다. 그럼 스컬리 효과는 뭘까. ‘엑스파일’을 자주 본 여자아이들이 과학과 기술, 엔지니어링, 수학(STEM) 분야를 선택하게 될 확률이 그러지 않은 여자아이들보다 50% 이상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어린 시절 이 드라마를 보고 자라 현재 STEM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이 많다고 한다.

단순히 그런 경우가 많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왜 굳이 엑스파일의 여주인공 스컬리 요원이 여자아이들의 롤모델이 되었느냐이다. 이유는 그 드라마 이전에는 여성이 그런 역할로 그려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런 역할’이란, 단순히 남자 주인공의 보조역(sidekick)이 아닌 동등한 역할을 의미한다. ‘엑스파일’에는 스컬리 요원과 남자 요원 폭스 멀더가 함께 주인공인데, 이전만 해도 이렇게 여성과 남성이 함께 주인공일 경우 여성은 소위 ‘눈요깃감’으로 등장할 뿐이고, 사건을 해결하는 건 남자 주인공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엑스파일’에서는 두 사람이 완벽히 동등한 역할을 했다.

게다가 스컬리 요원은 두 명 중 더 침착·냉정하고 분석적인 사람으로 등장할 뿐 아니라, 총을 쏘는 액션 장면에서도 남자 요원의 보호를 받지 않고 자신의 몫을 다 해내는 사람이다. 남자와 함께 등장한 여자 주인공이 이 정도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캐릭터는 사실상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드라마의 팬 중에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깨닫게 된 계기가 스컬리 요원이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여자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스컬리 효과를 설명하는 영상. 특히 이 지점을 한 번 보면 여성들이 스컬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느낄 수 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 하나가 한 세대 여자아이들의 미래를 바꿨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만, 이는 절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 드라마를 쓴 작가 크리스틴 클로크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본에 두 주인공을 언급할 때 “스컬리와 멀더”라고 쓰곤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두 젠더를 이야기할 때 ‘남녀(man and woman)’라고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촬영장에서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멀더와 스컬리”라는 식으로 남자 주인공 이름을 앞에 붙이는 게 못마땅했고,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 스컬리의 이름을 앞에 두었다는 것이다.

‘스컬리 효과’가 주는 두 가지 교훈이 있다. 하나는 사회에서 힘이 없거나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미디어에서 주류가 부여하는 과장되고 정형화된 모습, 즉 캐리커처(caricature)로 등장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류가 만들어낸 왜곡된 이미지는 어린아이들이 소비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내재화하며 자신을 그 틀에 맞추게 되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의 존재는 사회의 편견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하나는 그런 편견을 고치는 데는 미디어 콘텐츠가 아주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스컬리 효과를 연구한 사람들은 “여자아이들은 자라면서 본 롤 모델을 통해 알게 된 직업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여자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문제는 사회와 미디어에서 힘 있고 능력 있는 롤 모델이 대부분 남성이라면 그 기회는 남자아이들에게만 돌아가게 된다는 데 있다. 세상을 한꺼번에 뜯어고칠 수 없다면 미디어에서부터 편견을 걷어내는 게 좋은 출발점이라는 얘기다.


닷페이스 | 인공지능으로 분석한 한국영화, 그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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