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에서는 O.J. 심슨이 세상을 떠난 게 큰 뉴스가 되었다. 젊어서는 미식축구 스타 플레이어였고, 스포츠를 넘어 광고와 영화로 인기를 끌었지만, 1994년 이혼한 아내를 살해한 사건으로 악명을 높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7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미국인들은 O.J. 심슨이라는 이름이 미국 사회에 어떤 의미였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정말로 아내를 살해했을까? 재판에서는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대다수의 미국인이 그가 살인범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모든 정황을 봤을 때 그는 범인이 맞을 거다.

하지만 그가 받은 무죄 판결은 미국 사회가 받은 유죄 판결이었다. 미국 사회의 오래된 문제 때문에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무도 그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O.J. 심슨의 인생은 단순히 '영웅의 추락'이라는 그리스 비극으로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흑인이기 때문에 다른 선수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았고, 더 큰 "부귀와 영화"를 누렸을 수 있지만, 그가 추락하는 순간 미국 사회는 가장 보기 흉한 참모습—백인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을 드러냈다.

O.J. 심슨과 그의 아내 니콜 브라운(Nicole Brown)의 1984년 사진 (이미지 출처: CNN)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선출한 미국의 유권자들이 후임으로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주었지만, 사실 그 힌트는 이미 20여 년 전에 나온 O.J. 심슨 평결에 있었다. 1997년 남부 조지아주 오거스타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마스터스 골프 대회에 출전한 타이거 우즈(Tiger Woods)가 경호원을 대동해야 했던 것은 2년 전에 나온 심슨의 무죄 평결 때문이었고, 심슨이 무죄 평결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 몇 년 전에 일어난 로드니 킹(Rodeny King) 폭행 사건과 백인 경찰의 무죄 판결 때문이었다. (2010년 오거스타 마스터스에서는 타이거 우즈를 보호하기 위해 무려 90명의 경호원이 동원되어야 했다.) 이 모든 일은 연결되어 있고, 그 근원에는 미국의 노예제도가 있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국의 원죄는 노예제도이고, 이는 인종 문제로 남아 지금껏 미국 사회를 규정하고 있다.

O.J. 심슨의 인생은 미국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오렌털 제임스 심슨(Orenthal James Simpson)은 어릴 때부터 "주스(Juic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비행기에서 미국인이 승무원에게 오렌지 주스를 달라고 하는 걸 들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미국에서는 오렌지 주스를 흔히 "오제이(OJ)"라고 부른다. 심슨은 오렌털이라는 특이한 이름 대신 약자인 O.J.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걸 선호했고, 친구들은—그리고 훗날 그의 팬들은—그를 "주스(the Juice)"라고 불렀다.

O.J. 심슨은 어릴 때부터 유명해지고 싶었다고 한다. 누구나 길거리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했고, 그는 그 꿈을 이뤘다. 1947년, 정신병동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한 드래그 퀸(drag queen)이었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미식축구를 시작해 두각을 나타냈고,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USC)에 입학해 크게 활약하며 스카우트들의 눈에 띈다. 1967년 미국 최고의 대학 미식축구 선수에게 주어지는 하이즈먼(Heisman) 트로피를 아깝게 놓쳤지만, 이듬해인 1968년에는 수상하게 된다.

흑인 운동선수로서는 사상 3번째 수상이었다.

1967년의 O.J. 심슨 (이미지 출처: Wikipedia)

그가 하이즈먼 트로피를 받은 때가 1968년이라는 사실은 사소하지 않다.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그해 암살당했고, 그의 레거시를 이어 진보 정치의 우상으로 떠올랐던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상원의원도 같은 해에 암살당하면서 미국 내 인종 갈등이 극으로 치닫던 시점이다. 미국의 백인들은 흑인, 특히 젊은 흑인 남성을 보면서 뉴스에 등장하는 인종 폭동 속 폭도와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런 시절에 최고의 영예인 하이즈먼 트로피를 받은 심슨은 대학 졸업을 기다리지 않고 이듬해인 1969년에 프로리그(NFL)로 진출을 선언, 드래프트를 통해 뉴욕주 버팔로 빌스(Buffalo Bills)에 입단한다.

심슨은 프로에서도 탁월한 성적을 냈고 1970년대 최고의 러닝백(running back)으로 NFL 사상 최초로 한 시즌에 2,000야드를 돌파한 선수가 되었다. 그 기록만으로도 대단하지만, 한 팀이 한 시즌에 14경기만 치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 시즌 17경기를 치르는 지금의 2,000야드와는 비교하기 힘든 대기록이다. 그의 재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가 당시에 성적이 신통치 않은 팀에서 뛰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같은 기록이라도 못하는 팀에서 낸 건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O.J. 심슨을 알게 된 것은 단순히 그가 스타 플레이어였기 때문이 아니다. 심슨은 1975년부터 유명 광고에 등장하면서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얼굴을 알렸다. 특히 미국 1위의 렌터카 회사인 허츠(Hertz)의 광고에 출연하면서—정치적이지 않은 의미에서—가장 유명한 흑인이 되었다.

그런데 허츠 광고의 출연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심슨이 출연한 허츠 광고 (이미지 출처: Flickr, Wikipedia)

뉴욕타임즈는 O.J. 심슨이 사망한 직후, 그가 1970년대 허츠 광고에 출연한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아주 흥미롭게 설명한 기사두 편 게재했다. 기사가 인용한 1976년 당시 심슨의 인터뷰에 따르면 허츠는 "렌터카 업계의 수퍼스타"라는 슬로건을 준비했는데, 당시 최고의 수퍼스타는 자기(심슨)이었기 때문에 성사된 계약이다. 이 광고는 대성공이었고, 이를 본 다른 기업들도 앞다퉈 심슨과 광고 계약을 맺으면서 그는 운동용품, 탄산음료, 면도기 등의 광고에도 출연하며 TV 앞에 앉은 미국인들의 눈에 익숙한 미디어 스타가 되었다.

1990년대 미국 프로농구 NBA의 스타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이 큰 인기를 끌고 있을 때 전 세계의 팬들은 경기를 보면서 그가 흑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경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위치, 상징적인 지위에 도달하면 인종이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조던 보다 그 위치에 먼저 도달한 사람이 O.J. 심슨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내 피부색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People have told me I'm colorless). 모두가 나를 좋아한다. 나는 정치 얘기를 하지 않고, 종교 얘기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양복을 입어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심슨이 등장하는 허츠의 TV 광고

애초에 허츠는 이 광고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심슨 같은 유명인을 사용할 계획이 아니었다. 그저 시간에 쫓긴 비즈니스맨이 공항에서 뛰는 장면을 보여주며 허츠의 서비스가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이며, 믿을 만한지를 설명하는 컨셉이었기 때문에 (회사원이 아닌) 심슨이 양복을 입고 등장하는 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당시 허츠의 주 고객은 압도적으로 백인 남성들이었다는 사실도 흑인을 사용하는 데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허츠의 경영진은 시청자가 기억할 수 있는 '인물(personality)'이 있으면 좋겠다고 결정했고, 남성들이 즐겨 보는 스포츠의 스타인 심슨을 채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광고 기획자들이 가장 걱정했던 문제는 따로 있다. O.J. 심슨이 경기장이 아닌 (TV 속) 일상에 등장할 때 시청자들은 말은 하지 않아도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힘 있는 젊은 흑인 남성이 백인들의 공간(=공항)을 휘젓고 다니는 걸 백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는 흑인들의 대규모 폭동은 없었지만, 뉴스에서 "미국 전역이 불타고 있다"고 했던 1968년의 인종 폭동이 10년도 되지 않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심슨이 공항 곳곳을 뛰어가는 동안 백인들이—마치 경기장에서 하듯—늘어서서 "Go, O.J. go!"라고 응원하는 장면을 넣기로 한 것이다. (이 구호는 훗날 그가 차를 몰고 도주할 때 다시 등장해서 유명해졌다.)

심슨이 등장하는 허츠 광고는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1993년에도 나왔다.

O.J. 심슨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서 뛴 것을 마지막으로 1979년에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지만, 광고를 통해 얻게 된 그의 스타덤은 꾸준히 이어져 경기 해설가, 시트콤 코미디언, 심지어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아프리카에서 붙잡혀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 노예 쿤타킨테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담은 TV 시리즈 '뿌리(Roots)'에 깜짝 출연했고, 코미디 영화 '총알 탄 사나이(Naked Gun)'에 그가 어리버리한 경찰로 나오는 장면(아래)은 코미디 역사에 길이 남는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많은 스타들의 삶이 그렇듯, 심슨의 개인적인 삶은 그다지 평화롭지 못했다. 그는 아직 대학생이던 1967년, 어린 시절 친구 마거릿 휘틀리(Marguerite Whitley)와 결혼해서 세 아이를 낳았다. (막내아이는 두 살 때 집에 있는 수영장에서 익사한다.) 심슨은 결혼 생활 중이던 1977년, LA의 베벌리힐스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18살짜리 백인 웨이트리스를 알게 되어 데이트를 시작하고, 2년 후 이혼한다. 그때 만난 웨이트리스가 훗날 잔인하게 살해당하게 될 니콜 브라운(Nicole Brown)이었다.

O.J. 심슨은 니콜과 몇 년을 사귀다가 1985년에 결혼한다. 수퍼스타 흑인 남성과 금발의 백인 여성의 결혼은 많은 미국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1960년대의 인종 갈등은 이제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고, 20년 전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결혼(미국 대법원이 인종 간의 결혼을 인정한 건 1967년의 일이고, 이를 대법원까지 끌고 간 사람들은 백인 남성-흑인 여성 커플이었다)이 미디어의 큰 관심을 끌면서 미국인들은 이제 세상이 바뀌었고, 미국 사회는 인종 갈등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O.J. 심슨과 니콜 브라운 심슨 (이미지 출처: E! News)

'Running black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