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의 공화당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그런 정당이 아니었다. 물론 보수적인 정당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이 특별히 진보적인 정당이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현대—정확하게는 레이건 이전까지—의 공화당의 성격을 만든 건 2차 세계 대전을 지휘해 승리로 이끌고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였다.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가 미국의 정치를 뒤에서 조종한다"고 하면 사회주의자, 혹은 1980년대 운동권의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 위험성을 경고한 건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서 물러나면서 이런 경고를 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그의 경고를 귀 기울여 들은 것 같지 않다.
아이젠하워의 이 경고를 버니 샌더스가 공유할 만큼 미국 정치의 지형은 크게 변했다.

그만큼 서로 비슷했던 두 당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서서히 색깔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정치학자 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Elmer Eric Schattschneider)는 이념적으로 특별하게 다르지 않은 공화당과 민주당에 이념적 차이를 분명하게 하라고 충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그렇게 했을 때 좀 더 책임감 있는 양당제도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반세기가 지난 후 미국이 이념적으로 분열되어 의회 정치가 사실상 마비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후로 공화당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아이젠하워의 공화당에서 트럼프 컬트가 이끄는 정당으로의 변화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급격한 방향 전환이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레이건의 전기를 쓴 맥스 부트와 그의 책을 리뷰한 대니얼 이머와(Daniel Immerwahr) 노스웨스턴 대학교 정치학 교수는 로널드 레이건이 아이젠하워에서 트럼프로 가는 방향 전환점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맥스 부트는 자라면서 로널드 레이건을 영웅처럼 생각했고, 레이건 전기 역시 그런 존경심에서 출발해서 쓰기 시작했지만, 자료를 살피면서 그와 트럼프 사이에 "깜짝 놀랄 만큼" 유사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레이건은 뉴딜(New Deal) 정책을 파시즘이라고 생각했고, 소련이 헐리우드를 장악했다고 생각하고 동료 배우들을 FBI에 신고했다. 무엇보다 공화당 의원들이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흑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권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할 때 막아선 사람이 레이건이었다. 정부가 보조하는 노인들의 의료보험제도(Medicare)는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했고, 그의 재임 기간에 미국을 휩쓴 AIDS가 "하나님이 동성애자들을 징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듭시다"라고 한 것은 트럼프가 그 문구를 사용했을 때와 똑같이 사회적 진보에 대한 반대였다.

하지만 부트의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레이건이 수사법(rhetoric)과 현실(reality) 중에서 수사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대목이다. 레이건은 "위대한 지도자들은 그들이 해낸 것보다 그들이 한 말로 기억된다"고 하면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그 예로 들었다고 한다. 그는 링컨이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노예를 해방한 업적보다 한 번의 연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그렇게 믿었던 레이건이 정책과 같은 실질적인 업무는 보좌관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대외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썼던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가 카멀라 해리스와의 대선 후보 토론 때 아이티에서 온 사람들이 이웃의 개와 고양이를 먹는다는 허위 주장을 했던 것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의 러닝메이트 J.D. 밴스는 그게 아무리 허위 정보라고 해도 "미디어가 고통받는 미국인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상관없다"며 자기는 계속 허위 주장을 할 거라고 했다.

맥스 부트는 레이건에게서 똑같은 태도를 발견한다.

그에 따르면 레이건에게는 팩트보다 중요한 게 "정서적 진실(emotional truths)"이었다. 레이건이 거짓말을 하는 걸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게 거짓말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던 건 어쩌면—남을 완벽하게 속이는 사람들이 대개 스스로를 잘 속이는 것처럼—레이건 자신이 그 거짓말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레이건의 이런 성향은 그의 자식들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없는 얘기를 만들어 내고, 그걸 믿는다"는 거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트럼프가 거짓말을 해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레이건 역시 거짓말을 해도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평생을 그렇게 허구에 기반한 일을 하면서 살았고, "정서적 진실"을 전달한다면 팩트가 아닌 말을 해도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라는 태도다.

레이건의 20대 시절 약혼녀에 따르면 그는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능력 부족이 그가 하는 일에서는 뛰어난 재능이 되었다. 그가 젊은 시절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스포츠 경기는 현장에서 중계할 기술이 없었고, 방송국에서 아나운서가 실시간으로 전신(電信, telegraph)을 통해 받은 내용을 마치 현장에서 보고 있는 사람처럼 살을 붙여서 이야기해야 했다. 레이건은 이 일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문제는 자기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굳게 믿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가 정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레이건이 자주 인용하던 얘기 중 하나가 2차 세계 대전 중 격추당한 폭격기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의 대화였다. 레이건은 그들의 대화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그가 그 얘기를 어디에서 들어 알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맥스 부트에 따르면 1944년에 나온 헐리우드 영화 'Wing and a Prayer (날개와 기도)'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레이건이 보고 실화로 기억한 것으로 보이는 영화 'Wing and a Prayer' (이미지 출처: Rotten Tomatoes)

비슷한 사례는 많다. 레이건은 자기 애완견(밀리)의 이름을 묻는 기자에게 "래시(Lassie, 1970년대 인기 TV드라마에 등장하는 개 이름)"라고 대답한 적이 있고, 1940년대 B급 영화 'Murder in the Air (공중 살인)'을 보고 핵미사일을 하늘에서 막을 수 있는 방어망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그의 황당한 상상은 훗날 적의 미사일을 우주에서 요격하는 전략방위구상(스타워즈 계획이라는 별명이 붙었다)에 집착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입자 광선이나 레이저를 쏘아서 소련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파괴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런 집착에 소련이 미국을 침략할 거라는 망상까지 더해져 당시 소련과 추진 중이던 핵무기 감축 조약이 실패할 뻔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시카고 대학교의 법학과 교수인 에릭 포즈너(Eric Posner)는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독재자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독재자는 치밀해야 한다"면서 트럼프는 독재를 할 실력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추진했다가 실패로 끝난 국경 장벽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선거운동 때 멕시코와의 국경에 "높고 아름다운" 장벽을 만들 것이고, 그 비용은 멕시코가 내게 할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멕시코가 아닌 미국의 세금을 사용해서—짓다가 포기했다. 포즈너 교수는 트럼프는 연설 중에 문득 장벽을 지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트럼프는 팬데믹 때 기자 회견을 하면서 손소독제를 주사하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지 않느냐, 소독 기능이 있는 강한 빛을 몸 안에 쏘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소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장벽을 지으라(Build the wall)"는 말을 했더니 청중의 반응이 좋았던 거다.

코미디언이 반응이 좋은 펀치라인을 반복하는 것처럼 트럼프는 청중이 좋아하는 주장을 반복하다가 대통령이 되었고, 정말로 할 수 있는 프로젝트, 해야 하는 프로젝트로 탈바꿈했다.

(이미지 출처: NBC News)

'레이건/트럼프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