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을 설립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젊은 시절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들이 애플을 설립하기 전인 1970년대 초에 장거리 전화를 공짜로 걸 수 있는 "블루 박스(Blue box)"라는 일종의 전화 해킹 장치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어봤을 거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훗날 만든 많은 제품들이 그렇듯, 블루 박스는 그들이 처음 고안한 개념이 아니고, 그들이 이런 장치를 처음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그럼 워즈니악과 잡스는 전화 해킹 장치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를 어디에서 들었을까?

두 사람은 1971년 10월, 남성 잡지인 에스콰이어에서 낸 기사 "작은 블루 박스의 비밀(Secrets of the Little Blue Box)"를 읽고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그 글은 기자가 장거리 전화를 해킹해서 공짜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들을 취재해서 쓴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리킹(phreaking, phone+freak-ing) 문화에 대한 기사였다.

워즈니악과 잡스는 기사를 읽고 자기들이 직접 만들었을 뿐이다.

전화 해킹 장치인 블루 박스 (이미지 출처: Wikipedia)

그럼 장거리 전화를 공짜로 하는 해킹을 처음 고안해 낸 사람은 누굴까? 에스콰이어의 기사는 그 사람이 조 엔그레시아(Joe Engressia)라고 소개했다. 엔그레시아가 전화를 해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그가 7살이던 1957년의 일이다. 그렇게 어린아이가 어떻게 전화를 해킹할 수 있었을까?

오터레터의 지난 글(앤드루 릴런드의 세상)에서 소개한 책 '나는 점점 보이지 않습니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론 로젠바움(기자)은 1971년 <에스콰이어>에 쓴 영향력 있는 기사에서 디지털 이전의 해커들을 언급하며 "폰프릭의 원조이자 할아버지"는 바로 "절대음감을 가진 시각장애인 소년" 조 엔그레시아였다고 언급했다. 선천적 실명인인 엔그레시아는 세 살 때부터 꾸준히 가족의 전화기로 이런저런 실험을 해왔다. 그는 7옥타브 미 음, 전화 용어로 말하면 초당 2,600사이클(헤르츠)을 휘파람으로 불어 전화 시스템 접속을 시작하고 끝내는 음을 모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246페이지)

엔그레시아는 천재였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똑똑한 아이였고, 기사에서 말한 것처럼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그는 왜 전화기를 해킹하게 되었을까? '나는 점점 보이지 않습니다'에도 그의 성장 배경을 간략하게 언급하지만, 엔그레시아의 폰 해킹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라디오 프로그램, 그리고 책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해 보자.


먼저 장거리 전화에 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기억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장거리 전화를 걸려면 교환원에게 직접 문의, 부탁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시외 전화를 걸던 시절이 끝난 건 장거리 직통 전화(DDD, Direct Distance Dialing) 기술이 전국에 보급된 1980년대다. 1989년에는 아예 이 기술의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한 'DDD(디디디)'라는 노래도 나와서 꽤 인기를 끌었다. 미국도 다르지 않아서 1970년대만 해도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도시 밖으로 전화할 때는 교환원과 직접 이야기해서 전화하고 싶은 도시의 이름을 말해야 했다.

당시 미국에서 교환원과 통화하려면 555-1212를 누르는, 아니 돌리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장거리 전화 방식을 설명하는 영상

1950년대 후반 어느 날,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사는 한 어린아이가 장거리 전화를 하려고 555-1212를 눌렀다. 그런데 교환원과 이야기하고 기다리는 동안 아주 작게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장난삼아 휘파람으로 그 소리와 똑같은 음을 냈는데, 갑자기 전화가 찰칵, 하며 끊어지는 게 아닌가? 아이가 따라 한 그 소리가 책에서 언급한 2600 헤르츠였다.

아이는 신기해서 다시 전화를 건 후에 같은 음을 휘파람으로 불어 봤다. 또 끊어졌다. 이게 아이에게는 희한한 초능력이었다. 길을 가다가 공중전화로 통화하는 사람을 지날 때 휘파람을 불어 끄는 장난을 하곤 했다. 이 아이가 바로 조 엔그레시아로, 그가 7, 8살 때의 일이었다.

엔그레시아는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아이로, 부모는 그를 어릴 때부터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시각장애인 학교에 보냈다. 그 당시에 많은 학교에서 체벌을 했지만, 학교의 수녀 선생님들은 그를 심하게 때리곤 했다. 심지어 한 번은 한 수녀가 엔그레시아를 책상에 눕혀 놓고 성추행했지만, 그는 겁이 나서 부모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폭력은 집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아빠는 걸핏하면 엄마를 때렸고, 화가 나면 물건을 부수곤 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엔그레시아는 밤에 들리는 그 무시무시한 소리를 피하기 위해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대고 전화에서 들리는 삐— 하는 소리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 차분하고 일정한 기계음이 아이에게는 일종의 화이트 노이즈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엔그레시아가 휘파람으로 전화가 끊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그즈음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그가 따라 했던 2600 헤르츠의 음은 일종의 기계 언어였고, 원래 전화를 거는 사람은 들을 수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엔그레시아가 교환원과 이야기할 때 우연히 이 기계음이 새어 나와 아이의 수화기에 작게 들렸던 것뿐이다. 그 삐 소리 나는 기계음은 그 선(라인)이 사용중이 아니라는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A 도시의 전화국에서 B 도시의 전화국으로 통화를 시도할 때 삐 소리가 나는 건 통화가 가능한 상태, 즉 현재 사용하지 않는 선이라는 의미다. 거꾸로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기계는 통화가 끝난 거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끊는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블로그)

엔그레시아가 깨달은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전화기가 번호를 인식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옛날식 전화기는 전화를 끊을 때 사용하는 스위치, 즉 수화기를 올려놓는 곳에 있는 버튼을 사용하면 다이얼을 돌리지 않고도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가령 그 스위치를 빠르게 한 번 누르면 1, 두 번 연속으로 누르면 2... 이런 식으로 전화기에 신호를 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누르는 것을 전화기는 삐 소리로 바꾸기 때문에, 만약 수화기에 대고 정확한 음을 재현하면 다이얼 없이도 전화를 걸 수 있다. 엔그레시아는 그걸 휘파람으로 할 수 있었던 거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아무런 쓸모없는 기술처럼 들리지만, 엔그레시아의 해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먼저 555-1212로 전화해서 교환원의 목소리가 들리면 휘파람을 불어 기계가 전화를 끊게 만든다. 그런데 그는 전화가 완전히 끊어지기까지 약 1, 2초가 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 틈을 타서 휘파람으로 자기가 걸고 싶은 번호를 불면 전화를 걸 수 있다. 전화회사는 교환원과 통화하는 번호(555-1212)에는 요금을 부과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방법을 사용하면 공중전화에서도 공짜로 전화할 수 있고, 집에서 걸면 요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이다. 시외전화도 함부로 하지 못하던 시절에 공짜로 전국 어디나, 아무와도 통화할 수 있다는 건, 특히 앞을 못 보는 엔그레시아 같은 아이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아무 번호나 불어서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는 동안 엔그레시아의 어머니는 아이가 학교에서 심한 체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아이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엔그레시아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조 엔그레시아 (이미지 출처: DataNews)

하지만 대학교에 있는 동안 문제가 터졌다. 엔그레시아는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 자기가 휘파람으로 전화를 걸 수 있다고 자랑했고, 이를 믿지 않으려는 친구들 앞에서 이를 시연해 보였다. 그런데 그가 학교에 다니던 플로리다주에서 뉴욕주에 전화를 건다는 게 실수로 캐나다로 걸었고, 잘못 걸렸다는 걸 깨닫고 캐나다 교환원에게 뉴욕으로 돌려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공짜로 통화하게 된 엔그레시아의 친구는 "학교 친구가 공짜로 전화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 자랑했는데, 캐나다의 교환원이 그 얘기를 듣고 뉴욕의 전화 회사에 신고했다.

전화회사는 번호를 추적해 플로리다에 있는 엔그레시아를 찾아갔다. 이를 알게 된 대학교 측에서는 엔그레시아를 퇴학 조치했고, 이 소식은 뉴스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이름이 알려지는 과정에서 엔그레시아는 이런 해킹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엔그레시아 외에도 전국에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휘파람 대신 장난감 호루라기를 개조해서 정확한 음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 "폰프릭"들은 개인용 컴퓨터가 나오기 전에 이미 존재하던 해커였던 셈이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다른 해커들과 교류를 시도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들은 사용이 중지된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런 경우 "사용하지 않는 번호입니다"라는 안내음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중에는 간혹 안내음이 아주 작게 들리는 번호가 있었다. 폰프릭들이 약속한 시간에 이 번호로 동시에 전화하면 "사용하지 않는 번호입니다"라는 안내방송 너머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요즘 인기 있는 디스코드(Discord) 비슷한 음성 채팅을 한 것이다.

엔그레시아는 폰프릭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발견했고,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원하는 건 그들과의 교류가 아니었다. 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그는 전화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다섯 살이 된 남자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