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전쟁
• 댓글 97개 보기지난해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는 내각 인선을 발표하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당선인이 선거 운동 과정에서 도움을 준 측근을 장관직에 임명하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지만, 정부에서 일해 봤거나, 조직을 이끌어 본 경험이 없는 인물(피트 헤그세스 폭스뉴스 진행자, 국방부 장관), 맡게 될 임무와 상충하는 주장을 해온 인물(백신 부정론자로 유명한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 심지어 성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정치인(맷 게이츠 하원의원, 법무부 장관)들을 줄줄이 내각 후보라고 발표하자, 사람들은 트럼프의 진의가 무엇인지,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의지가 있는지 알 수 없다며 어이없어했다.
트럼프의 인선을 옹호하(지는 못해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설명은 이렇다. 트럼프는 미국 연방정부가 자기를 싫어하거나 자기 어젠다에 동의하지 않는 공무원으로 가득하다고 믿는다. 그가 보기에 이들은 연방 정부라는 시스템에서 오래 일하면서 고인물이 된 사람들이고, 정부의 작동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트럼프가 시스템을 크게 바꾸려 할 경우 이에 저항해 트럼프의 어젠다를 막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는 한국에서 공무원 집단을 비판할 때 사용하는 '복지부동(伏地不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이들이 단결해서 조직을 우선시하는 집단으로 변모할 경우 '원전 마피아,' '재경부 마피아,' '검찰 마피아' 같은 이름으로 범죄자 집단처럼 보는 시각이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것을 생각하면, 2015년에 첫 출마하면서부터 워싱턴의 고인물을 빼내겠다고 선언한 트럼프가 그런 우려를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트럼프가 재무장관 후보를 발표하자 많은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트럼프가 지명한 인물은 유명 헤지펀드의 CEO 스캇 베센트(Scott Bessent). 한마디로 월스트리트가 반길, 월스트리트 전문가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미국에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인선에서 "몇 안 되는 온전한 인물"이라는 평가와 함께 "트럼프가 다른 부분에서는 실수를 해도 경제에서는 실수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라는 말이 나왔다.
물론 스캇 베센트 장관 후보는 오랜 공화당 지지자이자, 트럼프 지지자이고, 트럼프 가문과 수십 년 동안 아는 사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선거 운동을 열심히 도왔고, 현재 트럼프의 이인자처럼 행동하고 있는 일론 머스크가 훨씬 과격한 다른 인물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센트를 지명한 것은 눈에 띄는 선택이다. 게다가 베센트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 남편과의 사이에 두 자녀가 있다. 상원 인준을 통과하면 공화당 내각에서 첫 성소수자 장관이 될 만큼, 보수층의 지지를 받는 트럼프에게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거다.
트럼프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가장 짧은 답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제에서만은 실수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깊은, 그리고 훨씬 더 흥미진진한 설명을 들으려면 오래도록 미국 재무부를 담당한 기자 살레하 모신(Saleha Mohsin)이 쓴 책 '달러 전쟁(Paper Soldiers)'를 읽어 보기를 권한다. 21세기 경제 문제를 다룬 책으로 이만큼 흥미진진하게 읽은 책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재미있는 책이다.
한국어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환거래 딜러들의 얘기인 줄 알았지만, 제목의 '달러 전쟁'은 달러로 돈을 벌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달러를 무기로 사용하는 전쟁이고, 원서 제목 Paper Soldiers는 서류(paper)를 사용해 세계 안보 문제를 해결하게 된 미 재무부의 관리들, 특히 재무장관들을 의미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미국의 달러가 이미 세계의 기축통화가 된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달러가 세계적으로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갖게 된 건 한 세기도 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미국 달러와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연방 재무부의 장관이 입을 열 때마다 전 세계가 주목하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경제 분야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고등학교 시절에 한 번쯤 들어봤을 브레턴우즈(Bretton Woods, 1944년) 체제, 금본위제 폐지(1971년) 같은 말들은 미국 달러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달러 전쟁'은 그걸 배운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람들에게 친절한 책이다. (이 책의 2장에서 그 역사를 링컨 시절부터 시작해서 쉽고 재미있게 들려준다.)
그렇다고 '달러 전쟁'이 미국 달러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이냐면, 그렇지 않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책은 1990년대, 그러니까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미국 연방 재무부(Treasury)의 역사, 좀 더 정확하게는 재무장관의 연대기에 가깝다. 대통령도 아니고, 한 부서 장관의 역사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위에 경제 분야에서 일하는 지인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 분야, 특히 재무와 투자 분야에서 오래 일해 온 사람들은 미국의 역대 재무장관들을 대통령만큼이나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자주 얘기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미국의 대통령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미국의 재무장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같이 마치 전설 속 영웅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로버트 루빈(Robert Rubin, 재임 기간: 1995~1999)이다.
미국 달러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 우즈라는 조용한 동네(나는 몇 년 전 그 근처를 운전하다가 도로 표지판에 적힌 Bretton Woods라는 이름을 보기 전까지 브레튼 우즈가 미국의 지명인 줄 모르고 있었다)에서 열린 국제 통화정책 회의를 계기로 세계의 기축통화로 떠오른다. 이는 미국이 세계 금융 시스템의 조정자가 된다는 의미였고, 엄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 미국은 계속해서 번영하는 경제를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따르며, 청렴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더 어려운 문제가 미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강한 달러와 약한 달러 사이의 갈등이다.
자국의 화폐 가치가 높아지면 낮은 가격에 외국 제품을 수입할 수 있고, 해외여행에 유리하지만, 자국 산업, 특히 수출이 중요한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 달러의 가치를 높게 유지하느냐, 낮게 유지하느냐의 결정은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고, 미국이 그리는 미래의 비전이 어디에 있느냐가 좌우하는, 가치관의 문제가 된다.
로버트 루빈은 "강한 달러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A strong dollar is in our national interest)"는 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문처럼 반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월스트리트 출신이었던 그는 미국 재무장관의 한 마디가 언론을 통해 얼마나 쉽게 오해되고, 시장을 패닉에 빠트릴 수 있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걸 막을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달러 전쟁'은 중산층 감세라는 매력적인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이 첫 재무장관을 잘못 선택해서 어떻게 고생했는지, 그리고 그 실수에서 얻은 교훈으로 루빈을 차기 재무장관으로 선택해서 어떻게 미국 경제를 안정시키고, 세계 경제를 안심시켰는지 설명한다.
하지만 잘 만든 영화를 보면 영화를 만드는 게 쉬워 보이는 것처럼, 어려운 역할을 너무나 잘 수행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훗날 사람들이 로버트 루빈을 전설적인 재무장관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 후임자들이 모두 루빈처럼 뛰어난 지휘자가 아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독자가 루빈의 위대함을 깨닫는 건 후임자들이 어떤 난관에 부딪혔고,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설명하는 5장부터다.
대표적인 실패작이 클린턴의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조지 W. 부시가 선택한 폴 오닐(Paul H. O'Neill), 존 스노(John W. Snow)다. 부시 정권이 월스트리트 출신이 아닌 기업인 출신으로 뽑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두 사람은 아무리 크게 성공한 사업가라고 해서 좋은 재무장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보여줬다. 돈을 버는 것과 국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건 전혀 다른 스킬셋이다.
그렇게 두 명의 재무장관 인선에 실패한 부시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사람이 또 하나의 전설이 된 헨리 폴슨(Henry Paulson)이다. 공화당원이 아니었고, 부시의 정책을 좋아하지 않았던 헨리 폴슨이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부시 행정부에서 일하기로 했다는 결정을 듣고 울었다고 한다) 재무장관을 맡게 된 건 미국과 세계 경제에 큰 행운이었다. 그가 입각한 지 1년이 되지 않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subprime mortgage crisis)'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터졌기 때문이다. 이후로 여러 해 지속된 이 경제 위기로 크나큰 피해가 났지만, 폴슨의 지휘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 되었을 거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달러 전쟁'은 폴슨 이후로 등장하는 네 명의 장관들의 공과를 자세히 설명하지만, 이즈음부터 이 책이 진짜 하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바로 달러의 무기화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어떤 나라도 도전할 수 없는 초강대국이지만, 아버지 부시의 걸프전과 아들 부시의 이라크전 이후로 군대를 동원하는 일을 극도로 꺼린다. 특히 아들 부시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군대를 동원해 군사적으로 승리하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그 후에 벌어질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줬다. 그리고—적어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는—대규모 전면전의 시대는 사실상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명분도 부족하다. 그래서 미국이 선택한 것은 바로 세계의 기축통화라는 미국 달러의 지위를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달러를 무기화한다는 것은 이 화폐가 가진 "세계의 지불 수단"이라는 지위를 위협하는 행동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금방 와 닿지 않는다면 걱정할 필요 없다. 저자가 쉽게 설명해 준다.) 이 책의 도입부는 의미심장하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2022년 2월 26일 오후 5시 13분을 달러 제국이 약화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으로 기억할지 모른다. 현재 최고의 화폐로 여겨지는 달러가 그때 세계적 지위를 영구적으로 상실했는지는 수십 년이 지나도 확실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스포일러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이 책의 결론을 이야기하면, 달러는 여전히 최고의 통화,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미친 듯이 혼자 잘나가는 미국의 경제 때문이기도 하고, 달러를 대체할 만한 통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미국 상황, 특히 "약한 달러"를 외치는 트럼프의 재집권은 미국의 달러 제국이 앞으로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쉽게 짐작하기 힘들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주 유용하다. 트럼프 2기의 미국 연방 재무부와 백악관의 힘겨루기와 그 과정에서 쏟아져 나올 경제 뉴스를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배경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아직 읽지 않았다면 새해에 읽을 첫 책으로 삼아 보시라고 추천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을 출간한 '위즈덤하우스'에서 오터레터 독자들에게 10권을 선물하시기로 했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로 의사를 표해주시면 제가 한국 시각으로 토요일 오전에 당첨자를 발표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