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다른 버전이 '미 대선을 결정하는 올드 미디어, 종이쪽지'라는 제목으로 미디어오늘에도 게재되었습니다.


한국이 음악과 패션, 영화 등 문화적으로 세계적인 유행을 이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한국 사회가 긍정적인 면에서만 앞서가는 건 아니다. 가령 한국의 ‘이대남 현상’이 그렇다. 이를 ‘선망국’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으로 부를 필요는 없지만, Z세대로 일컬어지는 20대 남성들이 보수, 혹은 극우에 가까운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선호하는 현상은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질 뿐,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추세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같은 또래의 여성 유권자 사이에서는 진보적인 성향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윗 세대의 눈에 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Z세대 정치 성향의 젠더 차이(gender gap)를 취재하는 뉴욕타임스 기자가 경합주인 위스컨신주에서 20대 남성들과 했던 인터뷰를 들어 보면 미국에서 이번 선거가 이 유권자 그룹을 얼마나 극명하게 가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의 이대남들은 트럼프를 “진정한 남성의 롤모델”로 생각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트럼프 지지자인 한 남성은 여자 친구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서 정치 얘기를 피한다고 답했다. 특히 이번 미국 대선의 경우 진보적인 후보가 여성인 카멀라 해리스이고, 남성 후보가 보수 대법관 밀어넣기를 통해 여성의 임신 중지권을 없앤 것을 주요 업적으로 자랑하는 트럼프라는 점에서 젠더 차이가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하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무효화에 항의하는 시위대. "우리는 잊지 않겠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이미지 출처: X)

그런데 유권자가 결혼했거나, 남성과 함께 사는 여성인 경우, 문제가 복잡해진다. 미국에서는 이런 여성들이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보도가 많이 나온다. 남부 지역을 포함한 보수 지역에서 유독 많다고 하지만, 갈수록 트럼프 지지가 컬트에 가까운 모습을 띄면서 지지자와 함께 살면서 정치적으로 다른 견해를 표현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남편을 따라 트럼프를 지지했거나 보수적인 성향이었지만,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관련해 이번 선거에서 지지 후보를 바꾼 여성의 경우, 남편이나 동거 남성에게 생각을 밝히기 꺼리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미국에서도 비밀 선거의 원칙이 적용되지만, 점점 늘고 있는 사전 우편 투표의 경우 동거인과 함께 작성하는 일이 흔하고, 그걸 피해서 몰래 작성해서 봉인하면 해리스를 찍었느냐는 의심을 받는 등 무언의 압력을 받기 쉽다. 게다가 소셜미디어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익명성을 유지한 채 온라인에서 자기의 생각을 밝히기 힘들어졌고, 검색과 콘텐츠 소비 기록은 타깃 광고로 쉽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여권 운동가 레베카 솔닛은 이 문제를 지적한 칼럼, '왜 그렇게 많은 여성이 남편에게 자신의 투표 계획을 숨길까? (Why are so many women hiding their voting plans from their husbands?)에서 “많은 가정이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 체제”라며, 이렇게 가정에서 일어나는 압력이 이번 선거의 결과를 바꿀 만큼 두 후보가 박빙의 경쟁을 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레베카 솔닛 (이미지 출처: Vanity Fair)

솔닛이 칼럼에서 소개하는 사례들은 21세기 미국에서 일어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수준이다. 과거 선거에서 민주당 선거운동원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유권자를 만날 때 종종 맞닥뜨리는 장면이 문을 연 남편이 선거 운동원과 자기 아내가 대화하는 걸 막는 것이다. 해리스 선거운동원의 말에 따르면, "문을 두드리면 남편과 아내, 혹은 동거하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나왔다가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여자에게 '가서 다른 일 하라'며 듣지 못하게 하는 일이 흔합니다. 여성이 혼자 나와서 낮은 목소리로 '저는 해리스를 지지하고요, 그이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폭스뉴스에서 우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막말로 유명한 한 앵커는 "남편 몰래 해리스에게 투표하는 것은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과 같은" 행동이며, 그런 행동은 이혼감이라는 말도 버젓이 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여성들이 찾아낸 방법이 바로 종이쪽지를 통한 캠페인이다. 이들은 포스트잇과 같은 작은 종이에 손으로 쓴 글씨로 “여성이 여성에게”라고 시작하는 짧은 메시지를 작성한다. 내용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투표소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투표 용지를 보지 않는다”며 “해리스와 월즈에 투표해서 당신의 권리를 지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포스트잇은 여성들만 볼 수 있는 장소, 즉 공중화장실에 붙인다.

지지자들이 이렇게 비밀 저항운동에 가까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알게 된 해리스의 선거운동본부는 아예 “당신이 누구를 찍었는지 남편에게 알릴 필요 없다”는 캠페인 광고를 만들었다. 남편들과 함께 투표소에 간 여성들이 눈짓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눈 후 해리스와 월즈에 투표한다. 여성은 “올바른 선택을 했지?”라고 묻는 남편에게 “그럼”하고 대답하고는 다른 여성과 의미심장한 눈짓을 나눈다.

이 광고의 나레이션은 영화배우 줄리아 로버츠의 목소리다.

이런 광고를 본 트럼프는—마치 아내가 해리스에 투표한 것을 알게 된 남편처럼—분노했다. 그는 “아내가 자기가 누구를 찍었는지 남편에게 말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느냐”며 “아무리 부부 사이가 나빠도 남편에게 얘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의 지지자와 보수 언론의 태도도 다르지 않다. 언론에서는 남편은 아내의 투표 내용을 알아야 한다는 트럼프의 말을 인용하면서 2016년 선거 때 트럼프가 함께 투표하는 아내 멜라니아의 투표용지를 들여다보는 사진을 소개했다. 트럼프와 지지자들의 언행은 이번 선거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달린 선거임을 여성들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는 해리스와 민주당의 기대처럼 여성 유권자의 힘으로 첫 여성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될까? 워낙 팽팽한 경쟁을 하고 있어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많은 선거가 그렇듯 결국 이번 선거는 어느 후보가 더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후보가 더 많은 사람을 투표소로 끌어내느냐로 결정될 게 분명하다. 여론조사가 정확하다면 오늘의 선거는 다섯 명의 선거인단 차이로 조지 W. 부시가 승리한 2000년에 버금가는 아슬아슬한 승부가 될 거라는 예측도 있고, 실제로 뚜껑을 열어 보면 어느 한 쪽이 충분한 표 차이로 넉넉하게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여성들에게만 전달하는 비밀 쪽지들 (이미지 출처: Instagram)

미국 시간으로 지난 토요일, 아이오와주에서 최종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해리스가 그동안 줄곧 우위에 있던 트럼프를 3% 포인트 차이로 역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이오와주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적지 않지만, 트럼프가 승리한다는 게 정설이었고, 이번 선거의 경합주 7곳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런 아이오와에서 어떻게 그런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을까? 그 조사가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곧 알게 되겠지만, 맞다면 그건 분노한 여성 유권자들 때문이라는 얘기가 많다.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농촌 지역에서 트럼프가 뒤진다면 여성, 그것도 백인 여성 유권자들이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해리스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여성들이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을 취재한 기사에서 백인 여성 유권자들은 2016년에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에 패했던 일에 가슴아파하면서 이번에는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바이든이 후보직을 해리스에게 넘긴 직후 이들은 “백인 여성들이 응답한다”는 대규모의 화상회의를 개최했고, 20만 명이 참여해 우리 돈으로 150억 원에 가까운 모금을 기록했다. 여성 유권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곳에서는 줌이라는 뉴미디어로, 그럴 수 없는 곳에서는 종이 쪽지에 쓴 손글씨라는 올드 미디어로 해리스를 위해 뛰는 모습은 2024년 미국의 정치 환경을 잘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