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의자
• 댓글 2개 보기우리는 클리셰(cliché, 진부한 표현, 진부한 생각)를 싫어한다. 진부한 생각을 싫어하는 것과 새로운 생각을 좋아하는 것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는 새로운 생각, 따끈따끈한 유행어, 새로운 제품을 선호하기 때문에 흔하게 사용되는 오래된 표현이나 물건에 가치를 덜 두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상투적인 표현, 어디서나 발견되는 물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기가 있다는 얘기다. 뻔한 줄거리를 가진 영화, 드라마가 나오는 이유는 그런 줄거리를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은, 실패한 아이디어를 거듭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성공하고도 미움을 받는 클리셰의 운명을 클리셰로 표현하자면, 그건 "성공의 대가(victim of its own success)"다.

클리셰는 보통 사고방식이나 표현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물건에도 클리셰가 있다. 처음 나왔을 때는 모두가 반기고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 모두가 사용하며 세상에 널린 것을 보고 모두가 싫어하게 된 물건.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편의점 의자'라고 불리는 플라스틱 의자다.
세상에서 이 의자를 처음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재질이나 모양으로 판단하건대 아주 오래된 물건은 아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가루가 되어 우리 몸에도 스며든 플라스틱은 20세기 후반—정확하게는 1960년대 이후—부터 세상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으니까. 이게 우리 주변에 널렸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건 편의점의 확산과 비슷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이 의자를 "편의점 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거다. 물론 이 의자의 기원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많은 인기 제품들이 그렇듯,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둘러싸게 되었다.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는 일반적으로 모노블록(monobloc)이라 불린다. 조립할 필요 없이 한(mono) 덩어리(bloc)라는 의미에서 모노블록이라고 불리는데, 전부 조금씩 다른 모양과 색을 갖고 있어도 누구나 쉽게 알아본다. 그 저렴한(?) 재질은 앉기 전에 의자를 당길 때 소리로, 손에 전달되는 진동으로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의자에 앉을 때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을 때와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뭔가 더러운 게 묻어 있을 거라 가정하고 살핀 후 별문제가 없으면 앉되, 몸의 무게를 모두 실어서 털썩 앉지는 않는다. 모노블록 의자의 다리는 우리의 체중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지만, 금이 가서 '구조적 안정성이 손상된' 의자를 종종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노블록 의자가 형편없는 제품이라는 건 아니다. 역할을—완벽하지는 않아도—충분히 수행하면서도 다른 의자들이 흉내도 못내는 장점이 있다. 폴리프로필렌(PP)이라는 플라스틱을 사출 성형으로 빠르게 찍어내는 생산 공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 의자는 가볍고 적당히 튼튼한 의자를 값싸고 빠르게 제작하려고 고민해온 디자이너, 엔지니어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모노블록 의자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더글러스 심슨(Douglas C. Simpson)으로 알려져 있다. 건축가로 캐나다에서 활동한 심슨은 1946년, 당신만 해도 새로운 재료였던 플라스틱을 사용해 한 덩어리로 된 의자를 고안했고, 그의 디자인은 1970년에야 실제 생산에 들어갔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얘기다.
하지만 "성공한 아이디어는 부모가 많다"는 말처럼, 모노블록의 기원 설화는 많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소개한 영상에 따르면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 덩어리로 된 플라스틱 의자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래의 사진들을 보면 1960년대 건축가와 가구 디자이너들이 일제히 모노블록 의자 디자인에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 못과 같은 전통적인 재료를 벗어나 새로운 재료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재료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지 대량으로 플라스틱 의자를 찍어낼 수 있는 공정의 혁신은 아직 없었다.


본격적인 생산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프랑스 엔지니어 앙리 마소네(Henry Massonnet)가 디자인한 포테이(Fauteuil) 300이 그렇게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된 첫 모노블록 의자다. 이 의자(아래 왼쪽)를 보면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은 지금의 모노블록 의자(아래 오른쪽)와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에 나온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등장한 마소네의 디자인이 현대 모노블록 의자의 효시로 여겨지는 이유가 이거다.
하지만 디자인 자체보다 더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소네가 의자의 제작에 들어가는 시간을 한 개 당 2분 이내로 줄였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마소네가 자신의 디자인에 저작권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누구나 마소네의 완벽에 가까운 디자인과 공정을 사용해 모노블록 의자를 찍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기회를 보고 본격적으로 시장을 개척한 첫 기업은 그로스필렉스(Grosfillex)로 알려져 있다. 그로스필렉스는 가볍고, 저렴하고, 구석에 쌓아둘 수 있고, 비에 젖어도 상관없는 이 의자를 정원용으로 팔았다.

그렇게 퍼지기 시작한 모노블록 의자는 세계를 정복했고, 좋든 싫든 우리가 세계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엘르 데코(Elle Decor)에 모노블록 의자에 관한 글을 쓴 이탈리아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봄베이(뭄바이)의 카페 구석에서도, 테라스에서도, 마라케시의 야외 시장에서도 볼 수 있고, 어쩌면 당신이 사는 집의 발코니에서도,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도, 이웃집 정원에도 있을 거다. 아니, 어쩌면 바티칸도 이 흰 플라스틱 의자를 창고에 보관하고 있을 거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모노블록 의자가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전혀 예측하지 못한, 혹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장소들 모두에 흰색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가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령 플리커(Flickr)에는 “Those White Plastic Chairs (그 흰색 플라스틱 의자들)”이라는 그룹이 있고, 전 세계 사람들이 여기에 자기가 쉽게 보는, 혹은 새롭게 발견한 모노블록 의자의 사진,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모노블록 의자가 놓인 풍경을 모아둔다.

어떤 이는 모노블록 의자를 "세계에서 가장 흔한(ubiquitous) 물건"이라고 부른다. 디자인은 조금씩 달라도, 이 의자들은 모두 같은 의자다. 선사시대부터 걸터앉을 곳을 찾았던 인류가 드디어 가장 저렴하고 얻기 쉬운 최종 답안을 찾은 게 아닐까? 언어에서 클리셰가 등장하는 이유는 그 표현이 가장 빠르고 쉽게 특정 상황이나, 생각을 표현해 주기 때문인 것처럼, 3, 4천 원 정도의 비용이면 제작할 수 있고, 1만 원이면 살 수 있는 의자, 그것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들 수 있고, 의자 몇 개가 놓일 공간에 수십 개를 겹쳐 쌓아 보관할 수 있는 의자는 인간에게 잠깐의 휴식을 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솔루션일지 모른다.
인터넷에서 모노블록 의자를 다루는 기사를 찾아보면 알게 되는 일인데, 많은 기사들이 특정 글 하나를 언급한다. 모노블록 의자라는 세계적인 현상을 가장 먼저 진지하게 다룬 글인 동시에 가장 깊은 통찰을 주는 글이어서 여기에서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선 저커먼(Ethan Zuckerman)이라는 저자가 2011년에 개인 블로그에 쓴 글이다.
여기에서 전문을 읽을 수 있지만, 글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옮겨 본다.
"사실상 세상의 모든 물건은 그것이 존재하는 시간과 장소를 보여준다. 하지만 모노블록 의자는 특정한 맥락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아주 극소수의 물건 중 하나다.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가 등장하는 사진을 본다고 해서 그게 언제, 어디에서 찍힌 사진인지 추측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그 정도로 맥락을 떠나 존재하는 (보편적인) 물건이 또 있을지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주위에 물어보면 흔히 나오는 답이 코카콜라 캔이다. 하지만 코카콜라는 나라마다 캔을 다르게 디자인한다. 병도 마찬가지다. 라벨에는 지역 언어로 적힌 브랜드 이름이 들어간다. 하지만 모노블록 의자에는 아무런 언어적 단서가 들어있지 않고, 지역에 맞게 만들어진 흔적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 어디를 가도 모노블록 의자를 만나면 집에 온 것 같은 익숙함을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모노블록 의자는 다국적 기업이 알바니아와 아프가니스탄의 구분을 없애버리는 미래의 모습이 아니다. 전 세계를 동질화하는 기업으로 유명한 맥도날드도 지역화(localization)에 엄청나게 투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맥도날드는 인도처럼 힌두교가 우세한 국가에서 소고기가 든 햄버거를 팔려고 고전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지역화 덕분에 '맥치킨 티카'라고 적힌 햄버거 포장지를 보면 여기가 일본이 아니라 인도임을 알 수 있다.
모노블록 의자는 (역설적으로) 세계가 지역적이고, 독특하고, 서로 차이가 눈에 띄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세계화가 세상을 동질하게 만들고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물건은 어느 정도의 맥락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역화를 거부하는 몇 안 되는 물건들은 특별한 존재로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교외 지역에서 사용되는 물건이 지역화하는 과정 없이 아프리카에서도 성공적으로 정착한다는 것은 그 디자인이 완벽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모노블록이 싫다면 그건 당신의 손해다. 이 의자처럼 맥락이 없는 물건은 아무도 감히 꿈꾸지 못하는 수준의 세계적인 셀레브리티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맥락을 거부하는 물건이라고 해도, 거기에서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애착이 형성된다.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의자만큼 우리 몸을 온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존재도 없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물건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 특별한 존재가 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의 노래도 내게는 나만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

무료 콘텐츠의 수
테크와 사회,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냅니다.
유료 구독자가 되시면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