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다이트의 진실 ①
• 댓글 남기기호프(Hope)라는 사람이 있다. 프라이버시를 위해 그의 성(last name)은 말하지 않겠지만, 나는 한 때 그와 함께 일하곤 했다. 대학원생 시절, 부업으로 한국의 학회지를 비롯한 출판물을 영문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는데, 호프는 내가 쓴 영어 문장의 맞춤법을 고쳐주고 어색한 부분을 다듬어 주는 프루프리더(proofreader)였다. 하지만 작업물은 이메일로만 주고 받았고, 비용은 개인 수표로 보냈기 때문에 3, 4년을 같이 일했지만, 얼굴을 본 적도, 전화 통화를 한 적도 없다. 프루프리더를 구할 때 온라인에서 본 사진으로 50대 정도의 백인 여성이라는 것만 알았다.
내가 그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후에도 호프는 가끔 내게 이메일이나 링크드인 메시지를 보내 혹시 내게 프루프리딩 맡길 일이 있는지, 자기의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이나 회사가 없는지 묻곤 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서 메시지를 받은 것도 10년이 되어 간다. 일을 빠르고 깔끔하게 해줬고, 비용도 저렴한 편이었기 때문에 내가 영역 작업을 직업으로 한다면 함께 일하겠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그 일을 한다고 해도 호프의 프루프리딩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챗GPT를 비롯한 다양한 AI 서비스가 프루프리딩 정도는 아무런 문제 없이 무료로 해주기 때문이다. 이제 호프의 부업은 완전히 사라졌다. 기술의 발전으로 한 직군이 사라진 거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을 목격한 기억이 있다. 내가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을 무렵, 한국 유학생들—당시에는 많았다—을 상대로 하는 작은 식품점들에서는 한국 영화, 드라마를 비디오에 녹화해서 대여하는 걸 부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대 초가 되면서 인터넷에서 파일 다운로드가 인기를 끌었고, 그런 기술에 빠른 학생들은 더 이상 식료품점 구석에 진열된 비디오테이프를 찾지 않았다.
어느날 물건을 사러 가게에 갔다가 주인 아주머니가 내게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찌 된 게 요새는 한국 드라마 비디오를 아무도 찾지 않네요?" 나는 그분에게 차마 그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아, 그래요?"하고 계산만 하고 가게를 나왔다.

미국인들은 첨단 기술을 싫어하거나 그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롱조로 '러다이트(Luddite)'라고 부르곤 한다. 영국의 산업혁명 시대에 나타난 '러다이트 운동'이 뭔지는 안다면, 이런 사용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이는 미국인들이 지능이 낮고 무식한 사람들을 '네안데르탈(Neanderthal)'이라고 부르는 (내가 자랄 때는 한국에서는 '크로마뇽'을 그렇게 비하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것만큼이나 틀린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러다이트 운동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19세기에 방직기가 나타나 일자리를 빼앗으며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은 막강한 성능의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요구했고, 그 운동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러다이트'라는 이름부터 살펴보자. 흔히 네드 러드(Ned Ludd)라는 인물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고 해서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져 있다. 네드 러드는 1779년에 기계화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편물기(編物機, knitting machine)를 부순 섬유 노동자라고 알려지기는 했지만, 실제 그런 사람이 존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9세기 앵글로 색슨의 왕 러데카(Ludeca)의 전설에서 이름을 가져와 사용했다고도 한다. 그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러다이트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러드 장군(General Ludd)'이 운동을 이끌고 있다고 믿었거나, 적어도 그런 가상의 인물을 선언문 등에 대표자로 기록했다.
만약 러다이트의 이미지를 산업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망치를 들고 기계에 화풀이한 사람들 정도로 생각한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을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당시 기술직 노동자였다. 당시 영국이 부를 창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상품인 면직물을 만드는 핵심 인력이 바로 그들이었다. 거칠게 비유하면, 20세기 중반 미국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 노동자, 21세기 실리콘밸리의 프로그래머와 같은 중요한 존재였다.
유럽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줄줄이 일으키는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런 프랑스와 싸우고 있던 영국 정부는 영국 핵심 산업의 첨단 기계를 부수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 혁명을 영국에 가져오려는 사람들로 착각했다고 한다. 뉴요커에 'How to Survive the A.I. Revolution (AI 혁명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글을 쓴 영국 출신의 존 캐시디(John Cassidy) 기자는 러다이트가 후세 사람들이 부여한 이미지와 달리 별생각 없이 기술에 반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분명한 논리에 따라 행동한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 보수주의자들이었다고 설명한다.

러다이트 운동은 1811년부터 1816년까지 일어났다. 그런데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 1867년이니, 당시 섬유 노동자들로서는 폭력 시위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일자리를 잃은 그들은 생존을 위해 가재도구와 가진 옷까지 저당 잡혔지만 굶주림을 피하지 못했다. 다급해진 그들은 정부에 최저임금을 보장해달라고 탄원했지만, 영국 의회는 이를 거절했다. 당시 기록에는 그렇게 직업을 잃은 노동자의 집에서 굶어 죽은 가족의 시신도 치우지 못하고 숨만 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을 만큼 상황은 참혹했다.
그러니까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에 일자리를 뺏긴 후 다른 일자리를 찾기 싫었던 사람들의 화풀이가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기계를 부수어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경종을 울린 시위였다. 캐시디는 'The Mechanic and the Luddite'라는 책을 쓴 제이선 사도우스키(Jathan Sadowski)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설명한다. "러다이트는 기술과 미래가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길 원한 사람들이다."

흥미로운 건 영국의 섬유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기계의 등장으로 피해를 본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면직물을 만드는 작업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방적기(물레)를 사용해 면화에서 실을 뽑는 작업이고, 두 번째는 직조기(베틀과 북)를 이용해 천을 짜는 작업이다. 두 작업 중 먼저 기계화된 건 상대적으로 단순한 첫 번째 작업이다. 그런데 실을 뽑아내는 작업이 기계화되면서 생산량이 늘어나자 다음 단계인 천을 짜는 작업에 필요한 노동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영국에서는 방적기가 보급된 1780년부터 1812년 사이에 직조 노동자가 3만 7,000명에서 12만 8,000명으로 급증했다. 숫자만 증가한 게 아니라, 수요 덕분에 개별 노동자의 수입도 늘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두 번째 단계인 직조를 자동화하는 장치가 발명되었다. 에드먼드 카트라이트(Edmund Cartwright)가 자동 직조기의 특허를 제출한 게 1785년이었다. 자동 직조기는 처음에는 문제가 많았고 사용이 어려워서 보급이 느렸지만, 1800년대 초가 되면 증기기관을 이용한 직조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노동력을 대체할 기계가 나온 시점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섬유 수출이 감소세로 돌아서면서 직조 노동자들은 일감을 잃는다. 1804년부터 1810년 사이, 이들의 수입은 무려 40%나 감소했다.
노동자들도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생존을 모색했다. 이들은 1808년, 자기들의 최저 임금을 보장해달라는 탄원서를 의회에 보냈지만, 영국 의회는 이를 단칼에 거부한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폭동이 시작된 게 이즈음이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이들이 시위하는 이유를 듣는 대신 참여자를 대대적으로 체포하면서, 노동자들은 비밀리에 더 큰 일을 꾸민다. 면직 공장을 습격해 기계를 부수고, 공장주의 집에 불을 지르는 과격 행동에 착수한 것이다.
이들은 습격할 공장에 편지를 보내서 경고하기도, 때로는 기습적으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장주들은 총을 들고 습격에 맞서며 양쪽에서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영국 정부가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노동자들의 의지를 꺾었다. 1812년에는 유명한 '기계파괴방지법(Frame Breaking Act)'을 통과시켜 섬유공장의 기계를 파괴하는 것을 중범죄로 규정했다. 이 법은 정부가 기업주의 편에 서서 직업을 잃은 노동자들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캐시디는 러다이트 운동이 영국의 격변기에 5년 안팎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음에도 지금껏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이 운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변덕스러운 시장과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경제 체제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중요한 사회적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영국 사회가 상업 자본주의(mercantile capitalism)에서 공업 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으로 넘어가면서 그동안 유지되었던 사회적 계약이 무너진 탓이라는 것.
봉건주의 시절, 그리고 (초기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상업 자본주의 시절만 해도 영국 사회는 엄격한 계급사회—상류 계급인 귀족, 중류 계급인 상인과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농민을 중심으로 한 하류 계급으로 구성된 사회 —가 유지되고 있었는데, 이 말은 이런 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공식적, 비공식적 노력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가령, 누구나 기술 직종에서 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도제로 일해야만 하는 등의 방법으로 노동력의 수급을 관리했고, 직업을 잃은 노동자들이 굶지 않도록 다양한 구제책이 존재했다.
하지만 공업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이런 계약은 깨진다. '자유 시장'을 원칙으로 하는 이 시스템에서는 노동자가 아닌 고용주의 권리가 중요시되었고, 정부의 개입은 나쁜 것이 되었다. 러다이트 운동은 이렇게 변화한 시스템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본 사람들의 항거였다.
'러다이트의 진실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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