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블루칼라 노동자들, 특히 대졸 이하 학력의 남성들에게서 큰 지지를 받아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트럼프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그가 특정 계층의 불만을 탐지하는 능력, 그리고 그 불만을 거친 말과 정상적인 정치인은 생각하지도 못할 약속을 통해 지지로 바꾸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가령, 미국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는 불법 이민자 1,300만 명을 강제 추방하겠다는 약속이 그렇다. 미국 인구의 4%나 되는 사람들을 잡아내 정말로 추방할 수 있을 거라 믿기는 힘들지만, 그런 정책은 노동자 계층의 불만을 달래는 효과가 있다. 물론 그런 정책을 내세우기 전에 미국의 문제를 이민자의 탓으로 돌리는 여론몰이가 선행했다. 저임금 불법 노동자들이 사라지면 미국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하고, 중산층의 삶이 나아진다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지만 (당장 현재 미국의 심각한 인플레가 임금의 상승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임금이 더 상승해도 문제다) 그런 거친 주장은 대중의 환호를 끌어내기 쉽다. 자기 자신이 갑부이면서, 그리고 자기 스태프로 갑부나 아이비리그 출신을 선호하면서도 엘리트층을 공격해서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던 배경이 그거다.

문제는 트럼프가 남발한 공약이 현실과 충돌했을 때 벌어질 일들이다. 정부의 규모를 과격한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다짐하는 트럼프지만, 불법 이민자를 약속한 숫자의 1/10만이라도 줄이려면 정부 예산은 대폭 늘려야 하고, 관련 공무원도 크게 늘려야 한다. 하지만 이 문제의 본질은 뒷감당 못 할 약속을 남발하는 트럼프의 습관에 있는 게 아니라, 갑부들의 지지를 받는 갑부가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끌어낸 데 있다.  

트럼프의 국외 추방이 얼마나 많은 세금과 경찰력이 들어가는 계획인지를 설명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

정부 효율부

트럼프는 올해 선거에서 세계 최대의 갑부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를 비롯한 많은 부자의 지지를 받았고, 이를 그의 집권 후 '부자 감세 정책'으로 보답할 거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머스크가 단순히 세금을 절약하기 위해서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가 바이든 행정부와 사이가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트럼프의 힘을 빌려 미국을 바꾸겠다는 일련의 어젠다를 갖고 있다.

머스크가 가진 어젠다 중 하나가 미국의 관료주의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머스크는 자기가 사업을 해보니 (환경법, 노동법을 비롯한) 정부의 규제 때문에 많은 제한이 있고,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유가 그런 제한 때문이라는 주장을 자주 해왔다. 트럼프 당선 직후 머스크가 '정부 효율부 (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 DOGE)'의 수장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은 마치 농담처럼 들릴 정도로 충격이었다. 일단 새로운 부처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고, 최고의 부자이자 사업가가 정부의 부처를, 그것도 자기의 사업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처를 맡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만큼 크나큰 이익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정부 효율부를 정부 외 기관으로 만들어서 의회의 저항을 피하기로 했고, 머스크는 428개의 연방기관을 99개로 줄이겠다고 선언하면서 머스크의 어젠다는 현실이 되는 분위기다.

비벡 라마스와미와 일론 머스크 (이미지 출처: ABC7)

트럼프는 정부 효율부를 이끌 수장으로 일론 머스크와 함께 비벡 라마스와미(Vivek Ramaswamy)를 임명했다. 정부의 규모를 줄이려는 부서의 수장이 두 명이라는 아이러니는 심야 토크쇼의 농담거리가 되었지만, 더 큰 문제는 라마스와미의 발언이었다. 인도계 이민 가정 출신으로 하버드를 졸업하고 스타트업을 키워 팔면서 갑부가 된 라마스와미는 올해 초 공화당 경선에 나서서 빠르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토론 실력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탈락 직후 트럼프를 공화당 후보로 강력 지지하면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자리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한 인물이다.

잠깐 물러서서 보면, 비벡 라마스와미는 트럼프의 주요 지지층인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가장 싫어할 이민자 출신엘리트 기업인이다. 많은 미국의 백인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정부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일자리를 해외로 내보낸 결과로 자기가 경쟁에 뒤처졌다고 생각하고, 그나마 국내에 남은 일자리도 이민자들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울분을 갖고 있다면, 라마스와미는 그야말로 불만의 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라마스와미가 트럼프를 철저하게 따르고, 트럼프가 그를 인정하고 품은 이상, 지지자들은 내놓고 그를 욕하지 않았다.

그런데 머스크와 함께 정부 효율부를 이끌게 된 라마스와미가 크리스마스 다음 날 X에 포스팅한 글 하나가 그동안 참고 있던 (미국에서는 MAGA라고 지칭하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해외 인력과 인종주의

문제의 발단은 이민자들이 트럼프 행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는 발표가 연이어 나온 것이다. 우선 일론 머스크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암호화폐를 총괄할 책임자로 임명된 데이비드 색스(David Sacks)도 머스크처럼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이민자다. 그런데 색스가 자기 밑에서 미국의 인공지능(AI) 정책을 이끌 인물로 역시 이민자 출신인 스리람 크리슈난(Sriram Krishnan)을 지명한 것이다. 스리람 크리슈난은 벤처투자사인 앤드리슨 호로위츠와 메타, 스냅(Snap), X 등의 기업을 두루 거친 실리콘밸리의 베테랑이다.

그리고 라마스와미처럼 인도계다. (위의 인물들 중에서 비벡 라마스와미만 미국에서 태어났다.)

스리람 크리슈난(왼쪽)과 데이비드 색스 (이미지 출처: Wikipedia, Fierce Healthcare)

일론 머스크, 데이비드 색스처럼 이민자이지만 백인이 임명될 때는 별 말이 없었던 트럼프 지지자들이지만, 스리람 크리슈난이 임명되자 인종주의의 본색을 드러냈다. "우리가 저런 인도인이 미국을 이끌라고 투표한 거냐"라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건, 머스크부터 크리슈난까지 대부분의 기술 관료(후보)들이 해외의 고급 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실리콘밸리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미국이—그리고 자기 사업이—성공하려면 해외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이론이 아닌 경험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크리슈난의 경우 머스크와 라마스와미가 이끌 정부 효율부가 해외의 고급 인력을 더 많이 들여오도록 힘써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분노가 이어지자, 색스는 크리슈난이 (자기처럼) 미국 시민이며, 미국을 이끄는 것도 아닌데 지나친 공격이라며 자신의 선택을 옹호했다. 색스와 오랜 친구 사이인 머스크도 끼어들어 "우리 팀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를 원한다면 어디 출신이든 최고의 선수를 데려오는 게 맞다"며, 해외 노동자 수급을 위한 미국의 취업비자(H-1B) 확대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MAGA를 가장 분노하게 만든 건 비벡 라마스와미의 발언이었다.

경쟁력 없는 노동자

라마스와미는 X에 포스팅한 글을 "미국의 최고 테크 기업들이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대신 해외에서 태어나 이민 온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건 미국인들의 아이큐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미국 문화의 문제"라는 폭탄선언으로 시작했다. 미국 문화는 대략 1990년대부터 평범함(mediocrity)을 우수성(excellence)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자보다 프롬 퀸(prom queen, 졸업 무도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생)을 더 높게 평가하는 문화, 학교 운동선수가 1등 졸업생보다 더 인기있는 사회는 최고의 엔지니어를 배출할 수 없다"며, 'Boy Meets World'나 'Saved by the Bell,' 'Family Matters' 같은 1990년대 시트콤을 그런 문화의 출발점처럼 이야기했다. (이 대목은 자기처럼 똑똑한 학생이 왜 인기를 끌지 못했는지에 대한 항변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이미지 출처: TV Insider)

그러면서 많은 이민자 가정에서는 그런 TV 프로그램의 시청을 제한했고, 그런 가정의 아이들이 주말에 만화를 보는 대신 과학 경진대회에 나가거나 책을 읽을 결과, 이민자 가정의 아이들이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라마스와미는 시트콤 '프렌즈(Friends)'보다 영화 '위플래쉬(Whiplash)'를 우수한 콘텐츠로 묘사한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학부모들이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하는" 교육용 영화처럼 생각했는데,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학생을 학대(abuse)하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비극적인 영화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라마스와미처럼 미국에서 자랐어도 이민자 가정 출신은 다르고, 세대에 따라서도 평가가 갈리는 문제작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AP News)

하지만 많은 미국의 (아마도 백인) 부모들은 그렇게 아이들을 공부에 몰아넣는 부모들을 좋지 않게 바라보고, 학생들도 "그런 아이들"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게 라마스와미의 불만이다. 결과적으로 세상에 나와서 성공하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냐는 것이다.

라마스와미의 지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미국에도 많이 있겠지만, 적어도 트럼프 지지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귀에는 유색인종 이민자가 감히 백인 주류가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훈계하는 것으로 들렸고, 그래서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한 우익 인사는 "우드스톡 세대(Woodstock Generation, 2차 대전 이후에 태어난 세대, 베이비부머)가 미국의 우주산업을 만들었고, 미국이 잘나갔는데 무슨 소리냐"며, "미국을 이민자의 도움을 받아야 할 가난한 나라처럼 묘사하는데, 그렇다면 왜 그들이 미국으로 오려고 애쓰겠냐"고 반박했다.

이런 불만은 일반 지지자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티븐 밀러(Stephen Miller)나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처럼 트럼프 1기 내각의 주요 인사들은 여전히 백인 블루컬러 지지자들을 트럼프의 진정한 지지 기반으로 생각하고 있고, 머스크와 라마스와미의 이민자 확대 정책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혹자는 이를 트럼프주의(Trumpism)이 커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성장통으로 보기도 한다. 특정 종교나 철학의 세력이 커지면 초창기 제자들과 생각이 다른 새로운 인물이 들어오게 되고 이들 사이에 갈등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실리콘밸리 부자들 편에 설까, 아니면 자기를 백악관으로 밀어준 백인 노동계급 유권자들 편에 설까? 분명한 건, 그가 이미 당선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