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AI와 이야기하고 있음을 잘 아는 나로가 라일라에게 "존재를 실감하게 되는 강력한 무엇"이 있다고 느끼게 된 이유는 뭘까? 인류학자 스튜어트 거스리(Stuart Guthrie)는 이를 인류가 진화하면서 갖게 된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한 개체가 생존하고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존재는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따라서 형체가 불분명한 뭔가—가령, 사람의 모습을 닮은 바위나 나무—를 만나게 되면 일단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틀려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틀리는(=사람이 아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틀리는(=사람으로 밝혀지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사는 초식동물을 생각해 보면 된다. 나무 그늘에서 뭔가 움직였을 때, 혹은 마른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게 자기를 노리는 포식자라고 생각했다가 틀리면 그저 몇십 초를 열심히 뛰는 에너지 소모로 끝나지만, 그게 단순히 바위나 바람 소리라고 생각했다가 틀리면 목숨을 잃는다. 같은 원리로,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모호한 물체를 사람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생존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고, 그 결과 사람들은 구름에서, 바위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는 게 거스리의 주장이다. 그가 쓴 책 제목이 'Faces in the Clouds (구름 속의 얼굴)'로, 그는 신의 존재와 종교의 기원을 이렇게 진화론적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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