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에 나온 영화 ‘탑건’에서 톰 크루즈의 경쟁자로 나왔고, 병환 중임에도 올해 새로 나온 ‘탑건: 매버릭’에서도 잠깐 얼굴을 비쳤던 배우 발 킬머의 근황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화려한 목걸이가 눈에 띈다. 흔한 남성용 골드 체인 목걸이가 아니라 각종 보석과 금속 장식이 많이 붙은 여러 줄의 목걸이들을 가득 걸고 있는 발 킬머 사진이 많다. 그는 후두암 수술 후에 착용하는 인공후두 기기를 가리기 위해 목에 스카프를 매는데, 화려한 목걸이는 이 스카프와 잘 어울리는 장신구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목걸이는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발 킬머는 미국 원주민(인디언) 피가 섞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킬머의 증조모가 체로키 인디언이었기 때문에 킬머의 아버지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자랐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어릴 때부터 인디언 문화에 익숙했고, 영화 배우로 활약하면서도 인디언 혈통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이 워낙 인종적으로 다양한 나라이다 보니 혼혈의 역사도 길고,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는 알기 힘든 다양한 피가 섞인 사람들이 많다. 캐머런 디아즈, 앤젤리나 졸리, 조니 뎁 같은 영화 배우는 물론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도 원주민의 혼혈이고, 지미 헨드릭스도 마찬가지.

이렇게 잘 알려진 인물이어도 원주민의 피가 흐르는 걸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누구나 원주민의 후손인 걸 알고 있지만 어쩌면 그렇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혹은 미묘하게 사회적 차별을 겪는 일도 있다. 지난 7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912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 선수 짐 소프(Jim Thorpe)가 5종 경기와 10종 경기의 단일 우승자(금메달)라고 발표했다. 무려 110년 전에 있었던 경기의 우승자를 밝힌 배경에는 소프 선수의 기록을 정정해달라는 미국 원주민 커뮤니티의 오랜 탄원과 노력이 있었다. 짐 소프는 누구이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 세기가 지난 후에야 진정한 기록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짐 소프는 미국의 사크와 여우(Sac and Fox)족 원주민 출신 천재 운동선수였다. 부모가 각각 백인과 원주민의 피가 섞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클라호마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태어나 자랐고, 학교는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던 인디언들을 위한 칼라일 공업대를 졸업했다. 그의 운동선수 경력은 칼라일 미식축구팀에서 시작되었는데, 무명의 칼라일이 당시만 해도 최강 팀 중 하나였던 하버드대 팀을 상대로 승리한 전설적인 경기에서 짐 소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전미(All-American) 선수에 두 번이나 뽑혔다.

미국 원주민인 짐 소프는 20세기 전반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라 불린다. 올림픽 금메달을 두 개나 받았고, 프로 야구와 프로 미식축구 두 리그에서 동시에 활약한 운동의 천재였다. 

하지만 단지 미식축구를 잘해서 천재 운동선수라고 불렸던 게 아니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참여해 육상에서 두 종목 우승을 했을 뿐 아니라, 올림픽에서 돌아온 후부터 1919년까지 세 개의 메이저리그 야구팀에서 프로로 활약했는데, 그러던 도중 1915년에는 프로 미식축구에도 진출해서 14년 동안 여섯 개의 팀에서 선수 생활을 한 만능 운동선수였다. 큰 인기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미식축구로 끌어낸 공로로 1920년에는 프로 미식축구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고, 대학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 프로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훗날 체육기자들이 그를 ‘20세기 전반 최고의 운동선수’로 꼽기도 했다.

그의 운동 실력과 투지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그가 올림픽에서 경기 후에 찍은 사진인데, 잘 보면 그가 두 발에 서로 다른 신발을 신고 있다. 경기 직전 누군가 그의 한 켤레밖에 없는 운동화를 훔쳐 가는 바람에 쓰레기통에서 누군가 버린 운동화 한 짝을 오른쪽에 신었고, 다른 한 짝은 팀 동료에게서 빌려 신은 모습이다. 주운 오른쪽은 너무 커서 양말을 겹으로 신어야 했고, 빌린 왼쪽은 너무 작아 발이 터져 나올 듯 보인다. 이런 신발을 신고도 우승을 한 것이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출전한 짐 소프의 모습. 그는 경기 직전 운동화를 도둑맞아 쓰레기통에서 주운 한 짝과 빌린 한 짝을 신고도 5종 경기와 10종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1912년 당시만 해도 온통 백인 잔치였던 올림픽에서는 눈에 띄는 유색인종이었다. 달리기와 던지기, 높이뛰기 종목을 모아서 경쟁하기 때문에 육상의 꽃이라고 하는 5종 경기와 10종 경기에 출전해 1위를 해서 금메달을 받았지만 일 년 후 IOC는 그가 과거에 월급 몇 푼을 받고 야구선수로 뛴 기록을 찾아내 아마추어 정신에 어긋난다며 실격 처리했고, 그의 메달 기록은 사라져 버렸다. 운동으로는 먹고살 수 없었던 당시만 해도 올림픽은 넉넉한 집안의 대학생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취미를 살려 출전하는 대회였던 걸 생각하면 소프에 대한 IOC의 판결은 여러모로 차별적이었고, 무엇보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적 결정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참고로,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신문 기사가 있다. 뉴욕타임즈가 짐 소프를 소개한 1912년 기사(아래 사진)다. 이 기사는 소프가 올림픽에 출전해서 겨루게 된다는 내용인데, 제목이 "올림픽에 출전하는 인디언 소프 (Indian Thorpe in Olympiad)"다. 짐(Jim)이라는 엄연한 이름이 있음에도 그의 정체성은 인디언이었을 뿐이다. 부제는 더 심해서 "칼라일에 온 레드스킨(redskin)이 미국 팀으로 출전해서 겨룬다 (Redskin from Carlisle Will Strive for Place on American Team)"고 말한다. 지난 2020년 미국의 프로 미식추구팀 워싱턴 레드스킨스가 팀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을 때 많은 미국인들이 반대하며 이를 진보적인 사람들의 억지라고 했지만, 이 이름이 사용된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바꾸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그 역사가 바로 기사의 부제처럼 인종 자체를 피부색으로 부르던 관습이다.  

하지만 그가 올림픽에서 받은 대우가 부당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꾸준히 탄원을 한 끝에 IOC는 1982년에 한 걸음 물러나 그의 금메달은 인정하되, 당시 기록상으로는 2위였지만 1913년의 실격 처리로 금메달을 받게 된 사람들과 공동 우승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결정에 만족하지 않고 “단독 금메달을 인정하라”는 탄원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무려 40년, 소프가 세상을 떠난 후로 71년 만인 지난 7월에 “짐 소프는 1912년 올림픽에서 5종 경기, 10종 경기의 단독 우승자”라는 결정이 나온 것이다.

그의 말년은 어땠을까?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소프는 말년에 생활고에 시달리며 이런저런 잡일을 하면서 연명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반 세기만 늦게 태어났어도 넉넉한 연봉을 받으며 프로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인종차별도 훨씬 덜한 세상에서 살 수 있었겠지만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당대 최고의 스포츠맨이라고 해도 은퇴를 하는 순간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것이다. 특히 그가 은퇴한 시점은 미국이 대공황에 들어갔기 때문에 더더욱 일자리를 찾기 힘들었고, 자신의 일생을 영화화하는 판권을 영화사에 팔기도 하고, 다른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런 일도 찾기 힘들 때는 공사장 인부로, 도어맨이나 경비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소프는 알콜중독(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 흔하다)으로 고생했고, 입술에 암이 생겨서 구호단체의 도움에 의지해야 했다. 1951년 뉴욕타임즈 기사를 보면 그가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과 함께 그의 아내의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저희는 파산 상태이고, 짐에게 남은 건 (유명한) 이름과 과거의 기억 뿐입니다. 가진 돈을 원주민들을 위해 써버렸고, 때로는 이용 당하기도 했어요." 그런 말년을 보내던 짐 소프는 1953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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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소프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인구가 5천 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의 이름이 짐 소프(Jim Thorpe, Pennsylvania)다. 소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54년 이 지역의 작은 마을 두 개가 합병하면서 이름을 짐 소프라고 짓기로 했던 것이다. 다소 뜬금 없어 보이지만, 완전히 무관한 건 아니다. 소프가 다녔던 학교가 같은 주 칼라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생긴 마을과 칼라일은 차로 2시간을 달려야 하는 거리다. 짐 소프(마을)에서는 새로 붙인 마을의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는지 짐 소프의 유해를 가져다가 마을에 화려한 묘를 만들었고, 대신 그가 태어난 오클라호마주에는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2010년, 짐 소프의 아들 중 하나가 펜실베이니아의 마을이 아버지의 유해를 가져간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 묘역 보호 및 보상법'을 위반한 것이라며 짐 소프 마을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했지만 재판 진행 중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형제들이 재판을 이어갔지만 패소했다.

소프의 유해는 펜실베이니아주 짐 소프에 남아있다.  

짐 소프 마을에 있는 짐 소프의 묘 (이미지 출처: Wikipedia)
묘 주변의 기념비 (이미지 출처: Trip Advisor)

이 글의 일부가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 게재 되었습니다.